‘악의 평범성’과 ‘선의 일상성’
[우희종의 ‘좋은 세상’] 나는 ‘악의 평범성’을 넘어설 수 있는 근본 힘이 ‘선의 일상성’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악의 평범성을 인지하되, 선의 일상성에 주목하는 삶이 될 때 사회도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악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말로 ‘악(惡)의 평범성’이 있다. 유태계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대량 학살의 대표적 범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 전범 재판을 지켜보면서 만든 표현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아무 생각없이 하는 행위가 폭력이 되어 악(惡)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 말이다. 따라서 악인은 뭔가 특별하거나 나와 다른 이가 아니라, 너와 나를 포함한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함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사례로서 굳이 화석화된 역사적 사실이나 지난 과거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현재 진행형인 상황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세월호 사태나 이태원 참사 발생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이들은 유별난 이들이 아니다.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또 5.18 광주항쟁에서 시민에게 총격을 가한 군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형이자 동생이었다. 요즘 영화 ‘서울의 봄’에서 다뤄져 많은 이들의 분노 수치를 높이고 있는, 12.12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 군인들도 평범한 군인들이었다.
요즘 정치검찰 독재를 하며 방송 장악과 한반도 전쟁 위기 조성이란 형태로 우리 사회를 퇴행시키고 있는 대통령 역시 그동안 우리 사회의 평범한 검사이자 검찰총장이었다. 법무부 소속의 공무원으로서 해당 부처의 여러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평범한 검사 생활을 하던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즉시 정치판에 뛰어들어 지금과 같은 사회적 퇴행을 빚어내는 주역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자신 및 주변 상황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특정 상황에서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에겐 사랑, 희망, 긍정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악의 평범성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현장에서 우리의 삶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과 희망과 긍정의 시간도 늘 우리와 함께 한다. 그렇다면 악의 평범성만이 아닌 또 다른 선한 힘이 작동한다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지탱하는 생명의 힘이자 삶을 인간답게 하는 동력일 것이다.
악의 평범성과 관련해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과 함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다. 범사라는 평범한 일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범사를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버리라고 한다면, ‘악의 평범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좋은 것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가가 질문 내지 숙제로 남는다. 불경에도 보면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이라고 해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가르침이 있으니 이 또한 다르지 않다.
이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필자가 지난 20여년 간 강조해 온 바와 같이 평범과 일반, 진실과 사실, 세속과 통속 등의 차이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있은 이래 시대와 문화를 떠나 늘 있어 온 것이 평범한 일이라면, 특정 시대와 문화 혹은 집단 내에서 다수를 일반적이라 한다. 일반적인 것은 시대나 유행에 따라 변한다. 이는 내가 대학생이었던 70년대 시절에는 장발이 유행 했고 일반적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범사는 어차피 인류 이래로 늘 있어 온 것이니 그리 새삼스럽거나 유별난 것도 아니다. 생노병사나 오욕칠정으로 생기는 세상사 모두가 범사다. 우리 삶의 대부분이 범사임을 안다면 때로 힘들어도 일상의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실이란 시대와 문화를 떠나서 우리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은 특정 집단 내에서 다수가 믿는 것이 된다. 인혁당이나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고한 이들이 억울한 사형 선고로 목숨을 잃은 것은, 진실은 그렇지 않으나, 당시 조작된 내용으로 다들 처벌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어 사실화 했기 때문이다. 삶에서는 진실과 사실의 간극을 알아차리는 깨어있음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편 세속은 과거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다. 인류 이래, 시대와 문화를 떠나 펼쳐지는 삶의 현장이자 세상 모습이기에 지극히 평범한 것이며, 또한 그 자체가 진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나 부처는 세상과 함께 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반면에 통속은 인간 탐욕과 고정관념에 의한 모습이고, 그것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사회적 가치나 책무 수행보다는 개인을 위한 이기적 선택이 통속을 이룬다.
‘선의 일상성’도 엄연하다
시대와 문화를 떠나 삶 속에 펼쳐지는 평범함 속에는 마치 낮과 밤이 함께 세상을 이루고 있듯이 선이나 악도 그 안에 있다. 악의 평범함이 거론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되,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버리라고 한다면 악의 평범성에 대응하는 좋은 것이 우리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악의 평범성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현장에서의 우리의 삶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려면 사랑과 희망과 긍정의 순간들이 있어야 한다.
악의 평범함 속에 인류 역사가 동물 같은 전쟁터로만 전개되지 않고 노예제 철폐를, 인종 차별 금지를, 여성 참정권 보장을, 동물권을 점차 자리 잡게 하며 나아지는 것은 범사 안에 악만이 아니라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범함에 속해 있지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늘 작동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선의 일상성’이다.
평범성과 일상성의 차이를 말한다면,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 ‘지금 여기’의 형태다. 평범하지만 지금 여기의 현장성을 지니는 것이 일상성인 셈이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의 일상으로 이뤄진다.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이 일상을 이룬다. 삶의 현장에서 선한 마음과 선택이 있을 때 우리 삶은 악의 평범함을 넘어 희망과 긍정으로, 더 나아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

우리에겐 ‘악의 평범성’을 넘어설 힘이 있다
자연재해를 겪은 이들에게 후원과 지지가 쇄도하고, 본인 장기를 기증하고, 사회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소식마저 있는 것처럼, 선의 일상성이 악의 평범함보다 더욱 근본적인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일상성이란 현재성이기도 하기에 우리를 늘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한다.
내일을 염려하지 않으며 하늘을 나는 비둘기와 같게 된다. 사랑과 자비라는 종교의 이타적 가치는 세속이라는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구현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삶의 현장은 관념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고 사소한 평범함으로 이뤄진다. 그 평범함이 일상으로 되어야 한다.
‘진실-평범-세속’은 ‘사실-일반-통속’과 대를 이룬다. 삶은 흑백이 아니기에 흑과 백 사이의 어느 지점엔가 자신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악의 평범성을 인지하되, 선의 일상성에 주목하는 삶이 될 때 우리 사회도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악의 평범성’을 넘어설 수 있는 근본 힘이 ‘선의 일상성’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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