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함, 더러움, 상스러움으로 맞는 새해 되기를
[우희종의 ‘좋은 세상’] 새해 희망과 염원은 철저히 무력했다 왜 무력했을까 성찰해보며 맞이하자 “추함을 인정하면서 선함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선함을 얻는다”
희망이 세상을 바꾼 적이 있던가
또다시 새해가 밝아 오고,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누구나 새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매년 반복이기는 하지만, 희망이 나쁠 것은 없다. 희망이 현재를 죽이거나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의 삶을 조금씩이나마 바람직하게 변화시킨다면 말이다.
우리의 단골 새해 희망은 행복, 사랑과 같은 인류애로부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공적 가치, 혹은 가족 화목이나 개인 성취로 가득하다. 대부분 이미 여러 종교나 성현들의 말씀, 철학 같은 인문과학, 정치 등의 사회과학 등에서 강조하는 가치이며, 공통적으로는 동물 같은 삶으로부터 인간다운 삶, 혹은 인간답게 살라는 메시지다. 허나 ‘작심삼일’이라는 개인 성취는 그렇다 치고, 70년 가까이 지속된 통일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다. 돌이켜 보면 사랑과 평화라는 소망도 몇 천 년 내려오는 소중한 가치지만, 매년 새해 희망으로 반복 등장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구 현실을 돌아보아도 이스라엘의 처참한 가자 지구 민간인 학살에서부터 강대국 대리전 속에 장기전이 된 우크라이나는 물론, 중국의 티벳 탄압이나 아프리카 지역의 기아는 여전하고, 기후 위기와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 팬데믹 유행이 일상화되었다. 전 세계 공통적으로 던지는 새해 희망이 오랜 기간 매년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처럼 세상 고통이 변함없이 여전하다는 것은 오랜기간 이어온 연초의 아름답고 멋진 희망의 염원이 무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공허한 새해 희망을 매년 덕담처럼 해온 셈이다. 우리는 새해에 던지는 멋진 말과 희망에 늘 사기당하고 속아온 것 아닐까.
새해 인사로, 혹은 새해 결심으로 던져지는, 익숙한 멋진 구호와 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새해마다 다짐하는 희망과 염원이 현실에서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고서 또 다시 듣기 좋은 말로 새해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악(惡)함을 인정하자
지금은 농사 이외에는 별다른 일거리가 없는 농촌 지역에 노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예전 농촌에는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이 모여 술 마시고 도박하며, 늙은 부모에게 돈 달라고 행패 부리는 아들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늙은 어머니는 자식 잘되라고 매일 아침 정한수 떠놓고 지성으로 기도하며, 주변 힘든 이들을 먼저 생각하고 마을 일에도 우선 나서는 마음 따뜻한 노인들이건만 못난 자식들에 시달려 늘 마음고생이었다.
한편 1886년 출간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라는 소설은 인간의 이중인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의학박사, 민법박사, 법학박사, 왕립협회 회원 등 존경받는 지킬 박사의 내면에 있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도덕적으로 무감각해 타인에게 고통 주는 하이드가 있다. 결국 최후에는 하이드가 자살하는 교훈적인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과거나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난 11월에는 과외 앱으로 알게 된 20대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내어 유기한 여성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를 찾아간 피고인의 왜곡된 욕구 탓이라는 판시가 있었다. 이 외에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폭력과 범죄는 일상적이다. 못난 아들과 하이드 씨, 혹은 각종 범죄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 왜곡되고 잘못된 것이기에 우리가 부정하고 자살시키고 처벌하면 끝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일부임에도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스스로도 부정하게 된 우리의 악한 측면이다. 우리 내면의 악이자 어두운 심연이다. 인류 시초부터 카인은 아벨을 죽였고, 인류 역사상 전쟁과 각종 폭력 및 사기, 협잡, 학대와 착취, 경우에 따라서는 존속 살인은 물론 근친상간도 있었고, 역사에 등장하는 각종 폭군과 간신배들의 끔찍한 기록은 문학과 역사 문헌에 넘쳐난다.
악은 유별나거나 특별한 이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너와 나, 우리 모두의 한 부분이며, 인류 보편적 모습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으로 지적했다. 개인마다 어느 측면이 더 비중 있는가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악과 선을 동시에 담고 있는 존재이며, 그 어느 쪽을 부정하는 논리나 자세로는 결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도 모르는 시골집 노모나 연말연시 헐벗은 이웃에게 보내는 따뜻한 자선 행위, 힘들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등의 선한 마음 역시 명확한 우리의 일부분이다. 이는 굳이 어려운 경전이나 성현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지 않아도 발현되는 우리 내면의 선한 본성이다.
선(善)만 강요하는 종교는 우리를 통제한다
평범한 너와 나를 이루고 있는 선과 악이건만, 모든 종교나 성현들과 철학자들은 악을 부정하며 버리라고 말하고 선함만을 강조한다. 지고지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오지 않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경건과 깨끗함과 순수함을 강조하며 비움과 배려를 말한다. 동물과 같은 삶을 살면 안된다고 ‘인간답게’ 살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탐욕과 추함, 더러움을 떠나야 하고 이를 위한 수행을 말한다, 참선, 명상, 묵언, 기도 등 다양한 방법을 멋지게 제시한다.
맑고 깨끗한 선함과 수행을 강조하는 방식을 통해 권력을 부여받은 종교나 성현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게 하여 자신들의 통제 속에 두려는 지배자의 헤게모니를 확보한다. 그런 지배자들의 언어와 논리를 내면화하여 길들여진 이들은 선악의 양면을 지닌 자신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새해 인사와 희망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지배 권력자들의 반쪽 언어를 되풀이한다. 아름답고 깨끗한 멋진 희망의 언어를 구사한다. 실제로는 ‘쌍년놈’들인 자기 자신을 착각한다. 악을 잔뜩 지닌 자들이 마치 악은 다른 이의 것인양 착각하면서, 인간은 동물 같아서는 안된다고 되뇌이면서. 비속어를 사용하면 깜짝 놀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분열된 상태로 몰아간다.
동물은 인간처럼 욕망을 사기와 협잡을 통해 탐욕스럽게 창고에 쌓아두지 않는다. 힘센 사자도 배고플 때 먹이를 죽이지, 힘이 있다고 계속 잡아 쌓아놓지 않는다. 일부 집단 생활하는 곤충들이 저장하는 행동을 하지만 서로 공유할 뿐 인간처럼 내 것이라면서 사적 소유물로 선을 긋고, 타인이 손 대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평생 돈과 명예, 권력을 끝없이 축적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거짓말은 물론 각종 음해와 모함으로 동족을 제거하고 3대를 멸하는 짓을 한다.
인간은 동물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교활한, 더 못한 존재다. 지구 생태계를 망가트린 것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동물 같은 삶만 살면 세상이 이렇게 각종 사기 협잡이나 집단 폭력으로 점철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이 믿는 추상적 소신이나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적으로 살 수 있는 이타적 측면도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임은 분명하다.
태생적으로 지닌 인간의 이중적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어떤 종교나 철학, 정치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기독교, 불교, 각종 철학과 막시즘, 생태주의 등 그토록 좋은 말과 멋진 가르침, 심오한 철학, 다양한 수행법이 있어도 결코 이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 옳은 말들은 그런 말들이 뿌리내려야 하는 인간이 지닌 어두운 반쪽을 부정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맞는 말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한 부분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인간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의 소리가 될 것인가. 그것은 삼인성호(三人成虎)로 이뤄진 사기다. 단지 우리가 그것에 길들어져 사기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자신이 지닌 어두운 측면을 부정하고 맑고 아름다운 지고지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집단 착각을 유도해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던져진 허울 좋은 미끼다.

내면의 더러움과 추함을 인정해야 한다
끝없는 탐욕과 악을 지닌 인간이 동물보다 못함을 부정하면, 그 어떤 말도 현실에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인간은 그 내면에 더럽고 추하고 야만적인 부분이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을 부정하며 제거한 상태로서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만을 인간답다고 하는 순간, 그 이후의 모든 언설은 공허하게 퍼져나가는 사기꾼의 말이 된다. 그것은 내 삶과 상관없는 예수님 말씀이고, 부처님 말씀일 뿐이라서 우리에게는 위선 떠는 것만 남는다.
기독교 7대 죄악인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라는 너나 나나 우리 각자 모두 가지고 있는 이 부분을 부정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팔다리를 자르라는 것과 같은 셈이다. 그래야 이룰 수 있는 아름다움과 지고지순의 가치란 그리할 수 있는 몇몇만의 일이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먹힐 수 없다.
무엇보다 스스로 우리 내면의 더러움과 추함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 안의 어두운 음란함과 게으름과 폭력의 가학성과 질투, 분노 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그것을 밟고 일어설 수 있음이 중요하다.
기독교 7대 죄악이나 유교의 칠거지악, 불교의 삼독심 등 오랜 세월 그들이 부정해 온 모든 더러운 모습이 우리 인간 자체의 한 부분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직시하며, 이를 품을 때 비로소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만하고 거룩한 종교로부터 불교의 밑바닥 입전수수(入廛垂手)나 기독교의 진정한 이웃 사랑이 가능해진다. 종교나 성현들의 가르침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 결국 이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부정하며 권력을 움켜쥐어 지배권력이 된 종교와 성현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번지르르한 기름진 말에 속지 않아야 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의 경우는 인간과 세상을 바꾸려는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논리 체계의 가르침이라 해도 사상누각의 부실함 속에 전혀 작동되지 못하지만, 악하고 못난 그대로의 인간을 인정하는 후자에 근간할 때 탄탄한 가르침이 되어 인간과 세상의 실질적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
방탕한 몸짓으로 자유를 찾자
올해 새해에는 인간의 추함과 더러움을 인정하고 직면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씨발, 쌍년, 쌍놈, 십팔년, 개새끼 등의 욕설로 점철되고, 음란하고 음탕함의 탐욕 가득한 눈길로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서로 바라보며 맞이하자. 그것이 인간이다. 수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비이성적이고, 광란의 추한 모습이 사람마다 정도는 달라도 다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 모습이야말로 인간다움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동물보다 못한 생명체이면서 동시에 ‘지금 이대로’ 온전하게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을 말한다. 인간다움이 인간의 선한 반쪽만 말할 때, 그 인간다움은 영원히 얻을 수 없는 허상이다.
돌이켜 보면 추함을 부정하고 선함을 말하는 지배자의 논리나 가치는 모두 옳지만 맞지 않다.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면서 선함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선함을 얻는다. 이를 추함과 더러움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그것들에 머물라는 것으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추하고 더러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비웃거나 질책하거나 경멸하기보다는 자신과 같은 존재로서 품고 보듬자. 그것이 우리가 인간을 이루고 있는 악의 평범성에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선의 일상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탐욕의 눈길과 타락의 몸짓으로 당당하게 출발할 때 비로소 각종 수행법이나 명상도 힘을 발휘할 수 있고, 모든 신년 희망도 구체적 힘을 갖고 실현될 수 있는 진정한 희망이 된다. 인간의 어두움과 추함과 더러움을 따뜻하게 품어 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변화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지배자들이 심어 놓은 자기부정을 기반으로 해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매면 반복하는 신년 희망이다.
이제 우리의 새해 희망은 추한 더럽고 상스런 나의 한 부분을 인정하고 따뜻하게 보듬으면서 수용하는 것이다. 속지 말자. 씨팔 년놈들아, 너희가 포장하고 있는 자존심이나 청정함이나 숭고함, 그런 것은 모두 쓰레기이자 착각이다. 오히려 더럽고 추하고 악한 그것이 곧 너의 온전함이요, 지고지순의 진리 모습이다. 악이 평범한 나와 너, 우리 일부임을 인정할 때, 진정한 선의 일상성이 빛을 발한다. 그렇지 않은 선은 모두 위선이자. 사기일 뿐이다.
동물보다 못한 삶을 살 것인가, 말만 동물 같지 말자면서 괴로워할 것인가, 아니면 진정 동물 수준을 넘어 사랑의 모습으로 살 것인가. 그 어느 경우건 ‘모두 인간답다’는 것부터 인정하면 되겠다. 올해는 못나고 탐욕 많은 자기 자신을 보다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품고 보듬으면서, 그리하여 못나고 탐욕스런 이웃도 따뜻하게 바라보며, 우리를 선과 악으로 분열시켜 힘들게 하는 모든 지배 권력을 거부하는 방탕한 몸짓으로 자유를 찾아보자. 우리는 본디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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