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숙서 파트너로…태국·비엣남의 ‘메콩 동맹’
[정호재의 남방회로 ②] 태국과 비엣남이 이끄는 새로운 ASEAN
- 앙숙에서 포괄적 파트너로 진화한 태국과 비엣남 과거 19세기 메콩강 패권 경쟁과 냉전기 이념 대립으로 총부리를 겨누던 태국과 비엣남이 수교 50주년을 맞아 ‘공동 성장’을 천명하며, 단순한 외교 의전을 넘어 공급망과 물류를 공유하는 실용주의적 상호의존 파트너로 전격 변모했다.
- ‘3 Connects’와 메콩 대륙 경제권의 급부상 양국이 추진하는 공급망·산업·지역경제 연결 전략은 과거 투자자들이 두 나라 중 한 곳을 양자택일하던 구도를 깨뜨렸으며, 라오스·캄보디아를 거쳐 중국 남부로 이어지는 거대한 ‘메콩 유역 대륙형 성장 모델’이라는 새로운 동력을 창출하고 있다.
- 아세안 공동 리더십이 요구하는 한국의 시각 교정 결론적으로 두 나라가 아세안 대륙부의 거대한 통합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며 공동 리더십을 형성하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과 정부도 “어느 국가에 투자할 것인가”라는 일차원적 질문을 폐기하고 “양국이 함께 이끄는 새로운 아세안”에 맞춤형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올해는 태국과 비엣남(베트남) 수교 50주년이다. 지난 5월 28일 비엣남의 또럼(Tô Lâm) 공산당 서기장이 태국 방콕을 방문해 아누틴 찬위라꾼(Anutin Charnvirakul) 태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아세안(ASEAN) 국가 간 정상 방문이야 흔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양국의 역사적 관계를 돌아보면 이번 만남은 결코 당연한 장면이 아니었다.
태국과 비엣남은 지난 반세기 동안 흔히 말하는 ‘가까운 이웃’과는 거리가 있었다. 태국은 오랫동안 동남아 대륙부의 중심국가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냉전 시기에는 미국 진영의 핵심 동맹국으로 기능했다. 반면 비엣남은 사회주의 혁명과 전쟁의 기억을 안고 있던 국가였다.
자연스럽게 태국은 비엣남을 가난한 공산주의 국가로 인식했고, 비엣남 역시 태국에 대해 일정한 문화적·정서적 거리감을 유지해 왔다. 그런 두 나라가 수교 50주년을 맞아 ‘공동 성장(Shared Growth)’과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남아 국제정치 질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정상회담과 함께 열린 ‘태국–비엣남 비즈니스 포럼’은 외교 행사라기보다 거대한 경제 협력 설명회에 가까웠다. 행사장에는 정부 관계자뿐 아니라 항공, 물류, 금융, 제조업 분야의 주요 기업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논의의 중심 역시 안보나 이념이 아니라 공급망, 디지털 경제, 관광, 에너지 전환이었다. 특히 비엣젯은 태국-비엣남 노선 누적 승객 5천만 명 돌파를 기념하며 태국 내 차세대 항공기 증편 계획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한때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던 두 나라의 지도자들이 기업인들과 함께 투자와 물류, 인적 교류 확대를 논의하는 모습은 지난 50년 동안 동남아가 걸어온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번 회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상들의 악수 자체가 아니었다. 양국은 디지털 경제와 녹색 경제, 공급망 안정화와 물류 연결성을 공동 의제로 제시했고, 항공과 산업 협력 프로젝트도 함께 발표했다.
이는 더 이상 태국과 비엣남이 서로를 경쟁국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때 이념적 대립 속에서 서로를 경계했던 두 나라는 이제 ‘메콩 경제권’을 함께 구축해야 하는 공동운명체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의 라이벌이 오늘날 ASEAN 성장의 두 축으로 나란히 서게 된 것이다.

ASEAN의 오래된 앙숙
태국과 비엣남의 경쟁과 화해의 역사는 세 개의 장면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 장면은 19세기 초 메콩 유역이다. 태국과 비엣남의 경쟁은 냉전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당시 동남아 대륙부에는 서쪽의 ‘시암 왕국’과 동쪽의 ‘응우옌 왕조’라는 두 강대국이 존재했다. 양국은 오늘날의 캄보디아와 메콩 유역을 둘러싸고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였고, 결국 1831~1834년과 1841~1845년 두 차례 전쟁으로 충돌했다. 당시 캄보디아는 두 세력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시암과 응우옌은 각각 자신들의 영향권을 확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메콩 유역의 주도권을 놓고 정면 대결을 벌였다. 오늘날 태국과 비엣남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그 뿌리가 이미 200여 년 전 지역 패권 경쟁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장면은 1978년 캄보디아 전쟁이다. 비엣남군은 캄보디아에 진주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렸고, 그 여파는 곧 태국 국경까지 이어졌다. 당시 태국은 미국 진영의 핵심 동맹국이었고, 비엣남은 사회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였다.
방콕은 하노이를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 직접적인 안보 위협으로 인식했다. 실제로 1980년대 태국-캄보디아 국경지대에서는 비엣남군과 태국군 사이에 무력 충돌과 포격전이 반복되었다. 냉전기 태국과 비엣남은 단순한 경쟁국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진영을 대표하는 전략적 라이벌이었다.
세 번째 장면은 1995년이다. 비엣남의 ASEAN 가입은 동남아 국제정치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냉전 시기 ASEAN이 사실상 공산권 확장을 견제하기 위한 협력체였다면, 이제 비엣남은 그 조직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과거 총부리를 겨누던 두 나라는 공급망과 투자, 관광과 무역을 논의하는 파트너로 변하기 시작했다. 냉전의 적대가 실용주의로 대체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태국과 비엣남은 메콩 경제권과 ASEAN 성장을 함께 이끄는 공동운명체를 이야기하고 있다.

메콩경제권의 핵심 축으로
동남아시아의 주요 뉴스는 대개 남중국해나 말라카 해협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비교적 조용한 공간에서 미래의 질서를 바꾸는 변화가 시작되기도 한다.
최근 태국과 비엣남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급속한 관계 변화가 바로 그런 사례다. 지난 5월 28일 방콕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은 단순한 외교 행사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오랫동안 경쟁자로 인식되었던 두 나라가 이제는 ASEAN의 미래를 함께 이끌 공동 파트너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비엣남의 급부상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ASEAN의 후발주자로 평가받던 비엣남은 이제 글로벌 제조업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했다. 국내총생산(GDP)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국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태국 역시 여전히 동남아 최대 자동차 생산국이자 역내 산업 허브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는 태국이 압도적 우위를 가진 선진 산업국이었다면, 이제는 비엣남이 빠르게 추격하며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양국은 더 이상 서로를 무시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양국의 경제 규모와 산업 역량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상대방의 성장 없이 자신의 성장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호의존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공동 성장(Shared Growth)’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현실을 가장 잘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3 Connects’ 전략이다. 이는 공급망, 산업, 지역경제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통합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태국이 강점을 가진 자동차·부품 산업과 비엣남의 제조업 및 수출 플랫폼을 결합해 새로운 생산 네트워크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과거 글로벌 기업들이 ‘태국이냐 비엣남이냐’를 놓고 투자처를 선택했다면, 이제는 ‘태국과 비엣남’을 하나의 생산권역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협력이 단순히 양국 관계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태국과 비엣남을 잇는 축은 메콩강 유역 전체를 연결하는 경제 회랑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약 8천만 명의 비엣남과 7천만 명의 태국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거대 시장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중국 남부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성장 벨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ASEAN의 미래 성장 동력이 더 이상 해양 동남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콩 유역이라는 거대한 대륙 경제권에서도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메콩’라는 미래
흥미로운 점은 이번 정상회담의 배경에 ‘메콩’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ASEAN을 이야기할 때 싱가포르나 자카르타, 혹은 말라카 해협과 같은 해양 공간을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들 지역의 중요성은 여전히 막대하다. 그러나 최근 동남아의 성장 축이 점차 메콩 유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콩강은 중국 윈난성에서 발원해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비엣남을 관통하며 약 5천 ㎞에 걸쳐 흐르는 동남아 대륙부의 생명선이다. 이 강을 따라 약 2억 5천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쌀 생산지와 농업 지대, 풍부한 수자원과 수력 발전 잠재력, 그리고 젊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 벨트가 형성되어 있다.
최근 들어 중국-라오스 철도를 비롯해 동서경제회랑(EWEC), 남북경제회랑(NSEC) 등 육상 물류 인프라가 빠르게 확충되면서 메콩 유역은 단순한 농업 지대를 넘어 새로운 생산·물류 허브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의 메콩이 왕조와 제국의 경계를 나누는 공간이었다면, 오늘날의 메콩은 태국과 비엣남, 그리고 대륙부 동남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연결하는 성장의 동맥이 되고 있다. 해상 교역이 ASEAN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던 시대를 넘어, 이제는 육상 연결성을 기반으로 한 ‘대륙형 성장 모델’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GMS(Greater Mekong Subregion)와 ACMECS(Ayeyawady-Chao Phraya-Mekong Economic Cooperation Strategy)가 반복적으로 언급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양국 지도자들은 이미 태국과 비엣남의 협력이 단순한 양자 관계를 넘어 메콩 전체의 성장과 직결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메콩 경제회랑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서쪽의 태국과 동쪽의 비엣남이라는 두 축이 안정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ASEAN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미얀마는 장기 내전의 수렁에 빠져 있고, 라오스는 높은 대외 부채 부담에 직면해 있으며, 캄보디아 역시 성장 둔화의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국과 비엣남은 ASEAN 대륙부 경제를 실질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두 나라가 협력 관계를 강화할 경우, 메콩 유역 전체의 경제 지형 역시 크게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단순한 양국 관계 개선에 있지 않다. 과거 메콩 유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두 나라가 이제는 같은 강을 공유하며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19세기에는 전쟁의 공간이었던 메콩이, 21세기에는 협력과 성장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셈이다.
# 한국의 낡은 질문, ‘비엣남이냐 태국이냐?’
그래서 이번 악수의 의미는 단순한 양국 관계 개선을 넘어선다. 이는 ASEAN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 리더십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한국에서 동남아 진출을 논의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은 “태국이냐, 비엣남이냐?”이다. 두 나라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해 ASEAN 시장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적 사고가 여전히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정체된 태국’과 ‘떠오르는 비엣남’이라는 단순한 대비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방콕과 하노이의 정책 결정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이다.
실제로 최근 동남아 대륙부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속도는 매우 빠르다. 태국과 비엣남은 공급망과 물류, 산업과 인적 교류를 연결하며 새로운 성장 축을 형성하고 있다. 메콩강을 따라 형성되는 경제 회랑은 ASEAN의 또 다른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는 해양 동남아 중심으로 이해되던 기존의 지역 질서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어쩌면 이제 낡은 질문은 폐기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엣남이냐 태국이냐?”가 아니라 “태국과 비엣남이 함께 만들어 갈 새로운 ASEAN은 어떤 모습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도 메콩강 유역에서 조용히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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