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접속’이다

[정호재의 남방회로 ①] BRICS와 느슨한 글로벌사우스의 시대

지난 2024년 10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회의. 이 회의에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을 대체하는 새로운 결제망 구축이 논의됐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 2024년 10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회의. 이 회의에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을 대체하는 새로운 결제망 구축이 논의됐다. 사진= 연합뉴스
  • BRICS 뉴델리 회의가 보여준 새로운 문법 공동성명 무산이라는 겉모습과 달리, 오늘날 BRICS는 완벽한 합의를 고집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이익에만 유연하게 연결되는 21세기형 ‘느슨한 플랫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반미가 아닌 ‘불안’이 추동하는 탈달러화 서방의 러시아 제재를 목격한 글로벌사우스는 국제 금융망이 무기화될 수 있다는 구조적 불안감 속에서, 경제 주권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와 금융의 대안적 결제 채널(접속망)을 구축하고 있다.
  • 한미동맹의 경계를 넘어설 우리의 시급한 생존 과제 에너지의 97%를 수입에 의존하고 신흥 제조국에 수출을 기대야 하는 한국 경제에 글로벌사우스의 지각 변동은 추상적인 국제정치가 아닌 눈앞의 생존 조건이다. 우리는 한미동맹이라는 단일 고정선에서 벗어나, 이 거대하고 유연한 ‘남방회로’에 어떻게 멀티 접속할 것인가를 시급히 고민해야 한다.

《정호재의 남방회로》는 한국 사회가 동남아시아와 글로벌 사우스를 어떻게 새롭게 이해할 것인가를 탐색하는 칼럼이다. 관광이나 경제를 넘어, 도시·문화·정치·대중음악·산업·문명 감각까지 아우르며 ‘남쪽으로 열린 한국의 시야’를 그려낸다. 서울 중심의 익숙한 시선에서 벗어나, 방콕·자카르타·싱가포르·호찌민·마닐라 등 아시아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며 변화하는 아시아의 현실 정치와 문화 지형을 입체적으로 해석한다.-필자주

이번 달(5월14~15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BRICS 외교장관 회의는 공동성명을 도출하지 못했다. 한국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BRICS 내부 균열, 혹은 반미 연대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처럼 보도하기도 했다(사실은 무관심이 압도적이었지만).

실제로 회의에서는 이란-미국 전쟁을 둘러싸고 회원국들의 입장이 크게 엇갈린 탓이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강경 비판을 요구했고, UAE와 인도는 보다 신중한 표현을 원했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려 했다. 결국 합의는 무산되었고, 의장국 인도는 공동성명 대신 의장 성명만을 공개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실패” 자체다. 어쩌면 이번 뉴델리 회의는 BRICS의 실패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질서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장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BRICS를 하나의 ‘반서방 정치동맹’처럼 상상하지만, 실제 BRICS는 UN보다 더 역동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실질적’이기 때문이다.(BRICS 회원국은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란, UAE, 이집트, 에티오피아,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가 참여해 모두 11개국이다-편집자주)

2023년 남아공화국에서 개최된 BRICS정상회의. 왼쪽부터 룰라 브라질 대통령, 시진핑 중국국가 주석, 라마포사 남아공대통령, 모디 인도총리, 그리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대신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2023년 남아공화국에서 개최된 BRICS정상회의. 왼쪽부터 룰라 브라질 대통령, 시진핑 중국국가 주석, 라마포사 남아공대통령, 모디 인도총리, 그리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대신해 라브로프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동맹과 접속의 경계

BRICS는 오늘날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이 서구 중심 질서 밖에서 새로운 금융·에너지·외교 네트워크를 모색하는 가장 상징적인 플랫폼 가운데 하나다. BRICS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이 무엇이 “아닌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BRICS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공동 방위 의무를 지닌 군사동맹이 아니다. EU(유럽연합)처럼 단일 시장과 공동 규범을 추구하는 통합체도 아니다. 심지어 냉전 시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처럼 하나의 이념으로 결속된 것도 아니다.

회원국들은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고, 때로는 상호 경쟁 관계에 놓여 있으며, 핵심 외교 현안에서조차 입장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BRICS는 도대체 무엇인가. 가장 정확한 표현은 아마 “플랫폼”일 것이다. 즉, 모두 동의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특정한 목적을 위해 느슨하게 연결되는 구조다.

이 플랫폼의 핵심은 유연성과 실용성에 있다. 회원국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에서만 협력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영역에서는 각자의 길을 간다.

인도는 중국과 국경 분쟁을 겪으면서도 BRICS 회의에 참석하고, UAE는 미국과 군사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BRICS 회원국이 된다. 이란은 반미 노선을 고수하지만, 같은 BRICS 회원국인 인도는 미국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강화한다.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이 가능한 이유는 BRICS가 “모든 것에 합의하는 동맹”이 아니라 “필요한 것에 접속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회원국들은 에너지 안보, 금융 시스템 다변화, 공급망 재편 같은 구체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며, 그 외의 영역에서는 독자적 행보를 유지한다.

이런 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21세기 국제정치의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는 “어느 진영에 속하는가”가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네트워크에 얼마나 접속해 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국가들은 더 이상 하나의 블록에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대신 여러 플랫폼에 동시 접속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BRICS는 바로 이런 새로운 국제정치의 문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고, 때로는 비효율적이며, 내부 갈등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21세기 글로벌사우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실제로 BRICS 내부를 들여다보면 매우 이질적인 국가들이 공존하고 있다. 인도는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중국을 견제하고, 동시에 러시아와의 관계 역시 유지한다. UAE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BRICS에도 참여한다. 이란은 강한 반미(反美) 노선을 유지하고 있고, 중국은 미국 중심 국제질서의 재편을 원한다.

민주주의 국가와 권위주의 국가가 공존하며, 에너지 수출국과 제조업 국가가 함께 있다. 이들은 하나의 가치 체계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RICS는 계속 확대된다.

확대 BRICS와 G7 국가의 비교. 파란색 국가가 G7, 녹두색은 BRICS기존 회원국, 연두색은 BRICS 신규 회원국. 그래픽= KIEP
확대 BRICS와 G7 국가의 비교. 파란색 국가가 G7, 녹두색은 BRICS기존 회원국, 연두색은 BRICS 신규 회원국. 그래픽= KIEP

불안에서 출발한 실용적 연대

확대되는 배경의 답은 구조적 불안에 있다. 2022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에게 하나의 결정적 순간이 되었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동결되고, 주요 은행들이 SWIFT(글로벌금융통신망)에서 퇴출되는 과정을 처절하게 지켜보고 깨달은 것이다. 국제 금융 시스템이 중립적 인프라가 아니라 언제든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이것이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란은 이미 수십 년간 금융망에서 고립되어 왔고, 베네수엘라와 북한 역시 같은 처지다.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이 보기에 지금의 국제 금융 체계는 “공정한 규칙”이라기보다 “통제 가능한 레버리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레버는 워싱턴과 브뤼셀에 있었다.

이 때문에 탈(脫)달러화 논의는 단순히 새로운 공동통화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대안적 결제 채널’을 구축하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위안화-루블 직거래를 확대하고 있고, 인도는 루피 결제 시스템을 통해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과의 석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시범 운영 중이며, BRICS 국가들은 자국 통화 간 직접 결제망 구축을 논의하고 있다.

이것은 달러를 완전히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달러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즉, 돈 흐름의 달러 중심성을 해체하고 대안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취약성을 줄이려는 전략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에너지 정치와 맞물린다. 왜냐하면 석유와 가스는 여전히 달러로 거래되는 가장 큰 상품이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는 전 세계 공급량의 약 21%를 차지하고, 말라카 해협은 중국과 일본, 한국으로 향하는 에너지 물류의 핵심 통로다. 이 해협들이 봉쇄되거나 불안정해지면 단순히 석유 가격만 오르는 게 아니다. 달러 결제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고, 글로벌 금융 흐름이 재편된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위협할 때마다 국제 유가가 요동치는 이유도,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군사력을 강화하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다. 에너지 수송로 장악과 금융 흐름을 통제는 맥락이 같다. 그리고 BRICS 국가들은 이 연결고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과 레버리지의 문제다.

아마 핵심은 “반미”가 아니라 “불안”일 것이다.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은 지금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이념적 반감이 아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고민에 가깝다.

화두는 ‘탈달러화’다

러시아 제재를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달러와 SWIFT는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미국이 언제든 누군가를 경제에서 배제할 수 있는 무기라는 점. 그리고 그 무기의 대상이 자신들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말이다.

이란은 이미 그 경험을 했고, 베네수엘라와 북한도 마찬가지다.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은 이제 깨달았다. 달러 패권 아래서는 자신들의 경제 주권이 항상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글로벌사우스의 화두는 ‘탈달러화’다. 물론 이들이 당장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공동통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여러 국가가 “달러 하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러시아산 원유를 루피나 위안화로 결제하려는 시도, BRICS Pay 논의, 자국통화 결제 확대 논의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금 에너지로 귀결된다. 최근 BRICS 회의에서 중동 문제가 민감하게 충돌한 이유도 결국 석유 거래의 통화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AI 시대가 오면 석유의 중요성이 줄어들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국제정치는 여전히 에너지 위에 구축되어 있다. 중국과 인도는 거대한 에너지 소비국이며, 러시아·이란·UAE는 핵심 산유국이다. 에너지 수출국과 수입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그 거래 통화가 곧 금융 패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BRICS가 생산국과 소비국을 동시에 포괄하는 플랫폼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은 이념 연대가 아닌 에너지와 금융을 둘러싼 생존형 네트워크라는 것. 이것이 오늘날 글로벌사우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다. 과거의 “제3세계론”이나 “종속이론” 등이 정치적 연대의 언어였다면, 오늘날 글로벌사우스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연결망으로 성장했다.

한국 사회는 세계를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로만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실제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의 움직임은 역동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들은 어느 한 진영에 자신을 완전히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네트워크에 동시에 접속하려 한다.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중국과 거래하고, 러시아와 에너지 관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BRICS에도 참여한다. 오늘날 국제정치는 “누가 누구 편인가”보다 “누가 얼마나 많은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 점에서 BRICS는 21세기형 국제질서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단한 동맹의 세계가 아니라, 느슨한 플랫폼의 세계다. 모두 동의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이 충돌하면서도 연결을 유지한다.

이번 뉴델리 회의에서 공동성명이 나오지 못한 것 역시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오히려 합의 불가능성을 안고서도 플랫폼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이 오늘날 BRICS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글로벌사우스 이해의 시급성

한국 정부 역시 최근 들어 글로벌사우스에 대한 관심을 빠르게 높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공식 외교 담론에서는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라는 표현 자체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모습은 흥미롭다.

이는 단순한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사우스라는 개념은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상당히 민감한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미국 중심 질서와 거리를 두는 정치적 신호처럼 읽힐 수도 있고, 반대로 중국·BRICS 진영과의 연대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한미동맹을 외교안보의 핵심축으로 유지하는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이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데 일정한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많은 정부기관과 공공기관들이 이미 글로벌사우스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공급망 재편, 에너지 안보, 방산 수출, 개발협력, 콘텐츠 산업, 도시 인프라, 디지털 플랫폼 시장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글로벌사우스는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라 핵심 전략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은 아직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글로벌사우스의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바로 이 글로벌사우스의 변화에 극도로 민감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인도와 베트남, 브라질 같은 신흥 제조국의 수요 증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에너지 가격 변동에 직접 영향을 받으며, 조선업은 BRICS 국가들의 해운 물동량과 LNG 운반선 발주에 연동되어 있다. 자동차 수출 역시 인도, 브라질, 중동 시장이 핵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은 에너지의 97%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다. 호르무즈 해협이 불안정해지면 원유 도입 가격이 급등하고, 말라카 해협에서 물류 병목이 발생하면 공급망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인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생존 조건 그 자체다.

글쓴이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정호재는 아시아 문화와 정치, 한류와 K-pop, 동남아시아 지역연구를 연구하는 연구자이자 칼럼니스트다. 싱가포르국립대학교(NUS)에서 비교아시아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시각과 ‘남방적 감각’을 바탕으로 동시대 아시아를 해석하는 글을 쓰고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