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에서 열리는 ‘글로벌사우스’ 정상회담

[정호재의 남방회로 ③]

2026년 북중미 월드컵 32강전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을 잡을 수 있었던 일본의 선전. 사진= 연합뉴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32강전에서 세계 최강 브라질을 잡을 수 있었던 일본의 선전. 사진= 연합뉴스
  • 선수 11명이 대표하는 정상회담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대회를 넘어, 강대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주변부 국가들이 세계의 중심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는 가장 거대한 ‘정상회담’이다.
  • 주변부 국가가 중심이 될 수 있는 기회 자본과 군사력이 아닌 오직 경기력만으로 국력을 증명하는 축구장 위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비로소 강대국과 동등한 규칙으로 맞서며 국가적 자존감을 확인한다.
  • 산업화·도시화에 성공한 아시아의 도약 대서양 중심의 축구 질서가 아시아의 산업화·디지털 에너지와 만나 역동적으로 변하는 지금, 월드컵은 주변부 국가들이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는 세계사적 이벤트가 되었다.

수천 대의 붉은색 자동차가 대표팀 버스를 따라 달렸다. 사람들은 도로 양옆을 가득 메웠고, 국기를 흔들며 선수들을 배웅했다. 월드컵 출정식이라기보다 독립기념일 퍼레이드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2026년 월드컵을 앞둔 튀르키예(터키)의 모습이다. 무려 24년만의 월드컵 출전이기 때문에 튀르키예 국민들의 감정은 사뭇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월드컵에 나서지 못한 지난 시간 터키는 정치경제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고충을 겪었다. 그렇기에 월드컵을 대하는 튀르키예 국민들의 응원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축구 열기’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왜 어떤 나라에서는 월드컵이 단순한 스포츠 대회를 넘어 국가 전체의 가장 민감한 관심사가 되는가. 왜 어떤 승리는 하루의 뉴스가 아니라 국민적, 역사적 기억으로 남는가.

우리는 월드컵을 시청하면 종종 국제정치를 떠올린다. 세계에는 G7도 있고 G20도 있으며 BRICS 정상회의도 있다. 하지만 그 회의에 수천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반면 월드컵은 다르다. 국가는 선수 11명을 통해 자신을 세계에 보여주고, 시민들은 함께 그 국가를 응원한다. 어쩌면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의 가장 거대한 정상회담은 외교 회의장이 아니라 축구장 위에서 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월드컵은 ‘글로벌사우스’ 카니발

월드컵이 시작되면 평소에는 뉴스에서 잘 등장하지 않던 국가들이 세계의 중심으로 올라온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우루과이, 모로코, 세네갈, 가나, 튀르키예,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제정치 뉴스에서는 미국과 중국, 독일과 프랑스가 그 주인공이다. 세계 경제를 논할 때라야 동북아 일본과 한국이 잠시 포함되는 게 전부다. 글로벌 기업 순위나 첨단기술 경쟁에서도 G7 이외 국가는 좀처럼 중심에 서지 못한다.

올림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영에서는 미국과 호주가 강하고, 체조에서는 미국과 중국, 육상에서는 미국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러나 월드컵은 다르다. 한 경기장 위에 선수는 11명뿐이다. 농구처럼 장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도 아니고, 수영처럼 거대한 시설 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자동차 경주처럼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스포츠도 아니다. 축구공 하나와 운동장만 있으면 된다.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90분 동안은 완전히 다른 질서가 작동한다. 그래서 축구는 가장 민주적이며 제3세계 성향의 스포츠가 되었다.

물론 현실의 축구 역시 돈과 산업의 영향을 받지 않는건 아니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90분 동안만큼은 국내총생산도, 군사력도, 국가 규모도 크게 의미가 없다. 브라질과 독일이 같은 숫자의 선수로 싸우고, 모로코와 스페인이 같은 규칙 아래 경쟁한다. 작은 나라와 큰 나라가 동일한 조건에서 맞설 수 있는 드문 공간이다.

그래서 월드컵은 국제정치의 역전된 세계를 보여준다. 평소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있던 국가들이 중심으로 올라오고, 강대국들은 때로 약소국 앞에서 무너진다. 수십억 명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국력보다 기술이, 자본보다 열정이, 규모보다 조직력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튀르키예는 지난 6월 26일(한국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D조 3차전에서 미국을 3대2로 이겼다. 사진= 연합뉴스
튀르키예는 지난 6월 26일(한국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D조 3차전에서 미국을 3대2로 이겼다. 사진= 연합뉴스

월드컵이 월드컵인 이유

바로 이 때문에 월드컵은 글로벌사우스의 대(大)축제다. 국제회의장에서는 발언권이 적었던 국가들이 이곳에서는 주인공이 된다. 브라질의 드리블, 모로코의 수비, 가나의 역습, 세네갈의 스피드는 경제지표로 측정할 수 없는 국가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월드컵 딱 한 달 동안만큼은, 적어도 축구장 위에서는 조금 더 평등한 세계가 만들어진다(한때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은 ‘투지’ 하나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월드컵이 글로벌사우스 국가들에게 특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글로벌 세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미디어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에서 이들 국가는 종종 ‘개발도상국’이나 ‘주변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제 규모나 군사력이 아니라 오직 경기력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에게 월드컵은 수많은 국제행사 가운데 하나일 수 있지만, 많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게 월드컵은 국가의 존재를 세계에 증명하는 드문 순간이다. 이번 월드컵도 다르지 않다.

독일 같은 축구 강국을 꺾은 에콰도르에서는 대통령이 다음 날을 국가 공휴일로 선포했고, 24년 만에 월드컵 본선 승리를 거둔 튀르키예는 비록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국민적 환호를 경험했다.

대회 초기 아시아가 승승장구하자, 전세계 미디어는 “드디어 (축구에서)아시아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환호했다.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국가적 자존감과 집단적 기억의 무대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미와 유럽의 전쟁

월드컵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당연하게 글로벌사우스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실상 태생부터 유럽과 남미의 대결이었다.

1930년 첫 대회부터 2022년 카타르 월드컵까지, 월드컵은 모두 22차례 열렸다. 그중 유럽 국가는 12번 우승했고, 남미 국가(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는 10번 우승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북중미 국가는 아직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결승전 무대도 마찬가지다. 월드컵 결승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럽과 남미 바깥의 국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월드컵의 역사는 “유럽 대(對) 세계”가 아니라 “유럽 대(對) 남미”의 역사에 가까웠다.

이는 월드컵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축구는 유럽이 만들었다. 규칙도, 클럽 시스템도, 국제대회의 형식도 유럽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스포츠를 세계적 예술로 번성시킨 곳은 남미였다. 브라질은 축구를 리듬과 드리블의 문화로 바꾸었고, 아르헨티나는 축구를 창의성과 광기의 서사로 만들었다. 우루과이는 작은 나라가 거대한 세계를 이길 수 있다는 첫 번째 신화를 썼다.

그래서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경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이 만든 게임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에서 다시 태어나, 원산지인 유럽과 맞붙은 역사였다. 유럽이 축구의 문법을 만들었다면, 남미는 그 문법에 음악과 몸짓과 감정을 불어넣었다.

이 점에서 남미는 글로벌사우스 안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월드컵에서 존재감을 얻었지만, 아직 세계 축구의 패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반면 남미는 유럽과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경제력으로는 유럽을 이기지 못했지만, 축구장 위에서는 유럽과 같은 높이에 섰다.

아시아도 주인공일 수 있나?

남미가 유럽의 신세계였다면, 아시아는 유럽 바깥의 오래된 오지(奧地)였다. 남미가 대서양을 건넌 유럽 이민자들의 사회 속에서 축구를 빠르게 자기 문화로 만들었다면, 아시아에서 축구는 식민지와 항구, 군대와 학교를 통해 들어온 외래 문화였다.

결국 축구는 아시아 곳곳에 퍼졌지만, 정상권에 오르긴 시간의 세례가 짧았다. 고작 관찰자이자 도전자에 머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21세기 월드컵의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아시아는 남미의 역동적인 몸짓과 달리 산업화와 도시화, 미디어와 팬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뒤늦게 세계 스포츠 문화에 접속했다.

일본은 조직과 기술의 축구를 만들었고, 한국은 압축성장 세대의 투지와 대중문화의 에너지를 결합했다. 중동은 막대한 자본과 국가 전략으로 월드컵의 무대를 끌어왔고, 동남아시아와 인도는 아직 축구 강국은 아니지만 거대한 시청자와 팬덤의 시장으로 월드컵에 참여한다.

이 점에서 아시아는 남미와 다른 방식으로 글로벌 사우스의 미래를 보여준다. 아시아는 축구를 산업과 미디어, 도시와 팬덤의 언어로 다시 번역한 것이다. 월드컵에서 아시아의 성취는 아직 우승의 역사로 쓰이지 않았지만, 그 갭은 점차 줄어가고 있다.

한국의 2002년 4강, 일본의 꾸준한 성장과 우승 도전장,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르헨티나전 승리, 카타르 월드컵의 개최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세계 축구의 중심이 더 이상 대서양 양안에만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20세기 월드컵이 유럽과 남미의 대서양적 경쟁이었다면, 21세기 월드컵은 아시아가 세계 축구의 질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선전이 무척이나 부러우면서도 우리의 부진이 더 아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축구장 위에서 펼쳐진 정상회담

2026년 북미 월드컵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그 사실을 보여주었다. 독일을 꺾고 20년 만에 16강에 오른 에콰도르에서는 대통령이 다음 날을 국가 공휴일로 선포했다. 개최국 미국을 꺾고 24년 만에 월드컵 본선 승리를 거둔 튀르키예에서는 거리마다 환호가 이어졌다.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이겼는데 왜 독일은 못 이기겠느냐”고 말하며 당당히 강호와 맞섰다. 그리고 캐나다에서는 원주민 공동체가 월드컵 팬들과 자신들의 문화를 나누며 “우리를 세계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월드컵은 단지 승패를 기록하는 대회가 아니라, 한 나라가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다. 그것은 평소에는 주변부로 밀려났던 국가들이 잠시 세계의 중심으로 걸어 나오는 시간이다.

정상들이 모이는 이벤트는 많다. 그러나 수십억 명의 지구촌 인민이 함께 참여하는 정상회담은 하나뿐이다. 어쩌면 오늘도 글로벌사우스의 가장 거대한 정상회담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글쓴이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정호재는 아시아 문화와 정치, 한류와 K-pop, 동남아시아 지역연구를 연구하는 연구자이자 칼럼니스트다. 싱가포르국립대학교(NUS)에서 비교아시아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시각과 ‘남방적 감각’을 바탕으로 동시대 아시아를 해석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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