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희종의 ‘좋은 세상’]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지만 실천에선 적대감· 적개심 쉽게 표현해 정치에서도 상대를 악마화하지 말길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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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함은 좋은 것’이라 말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고 잘 살게 될수록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은 더욱 증가한다. 단순히 진영이나 집단 내지 특정 계층으로 규정해 치부하는 것은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고 그 자체가 매우 폭력적이다. 종종 회사나 공기업 취업과 대학 입학 등에서 접하게 되는 나이, 성별, 종교, 인종, 국적, 혹은 성적 취향 등등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명시는 이를 반영한다. 현실에서도 같은 MZ 세대라 해도 그 내부 다양성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판단하고 접근하면 낭패 볼 것은 분명하다.

다양한 이들과 함께 간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듣는 ‘차이가 차별이 아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등의 구호에서 강조되듯이, 나와 다른 생각이나 관점과 태도에 있어서 서로 존중하고 또한 존중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옳은 원론적 말과 현실에 맞는 말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한다. 현실에서 좋은 경전 말씀이나 현자의 가르침이 없어서 이렇게 사회 갈등과 분란이 가득한 것은 아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기독교와 불교만 보아도 2천년, 2천 오백년 이전부터 있어 온 말이다. 그렇게 좋은 말씀과 가르침이 있을수록 사회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더욱 소란스럽고 분쟁으로 채워지는지도 모른다.

옳은 이야기는 언제나 이타적인 더불어 살기를 말하지만, 현실 속 현장에서는 공공선보다는 언제나 개인의 이기적 욕망과 관점이 우선한다. 그 개념을 명확히 보여준, 엘리노르 오스트롬(Elinor Ostrom)으로 하여금 2009년 노벨경제상을 받게 한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the commons)’이 그런 우리 모습을 잘 설명해준다.

표현하지 않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까

이념이나 정치적 견해, 종교관, 도덕 기준 등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필요할까? 종종 명절 휴일에 고향을 찾은 일가 친족들 사이에 정치나 종교적 견해 차이로 인해 싸움도 일어나고 의를 상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에서는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기본 예의로 자리잡았지만, 이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정치 입장과 종교 내지 경전 해석 차이 등에 대하여 서로 존중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만을 하는 문화이자, 사회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종종 거론되는 사례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아버지와 아들 간의 격렬한 대화나 논쟁 상황이 있다. 비록 같은 공간과 시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각자 살아온 삶의 배경과 시대가 다르고, 지향하는 가치의 우선 순위도 다르며, 가족 내지 사회 내의 위치도 다르고, 더욱이 표현방식도 다르기에 더욱 불붙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족 내에서의 그 격렬함은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건, 혹은 어머니와 딸의 경우건 다르지 않고, 그 적대감은 마치 뾰족한 칼이나 창으로 상대방을 찌르는 듯이 보인다. 적대감을 느낀 상대방은 가족의 인연 속에 등장한 낯선 적대감으로 인해 더욱 피를 흘리게 된다. 적대감을 던지는 측은 상대방에게 그렇게 하면서 그 동안 억눌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겠지만, 사실 그런 적대감은 서로 상대방 말을 듣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차단하기에 관계 개선이 아니라 악화만 시킨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처럼, 나이 어린 측이 자신의 불만을 말하기보다는 말없이 속으로만 참고 지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적대감을 예상하지 못했던 부모가 갑자기 드러난 자식의 적대감에 대처할 방법은 없다. 설령 한 쪽이 상대방 말을 듣고자 해도 결코 동시에 여는 상황이 없기에 일방적 상황이 이어지면서 개선은 더욱 어려워진다.

평소 양측의 소통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이미 스스로 마음을 닫고 억압하며 오랜 기간 지내온 이의 적대감의 깊이와 날카로움은 상상하기 어렵다. 상대방은 그 적개심의 깊이와 날카로움에 상응한 크기의 상처를 받게 된다. 각자의 배경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제 3자로서는 양측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과도한 적개심을 내려놓는 것부터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골이 깊어진 진보와 보수의 갈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이런 가족 간의 깊은 감정의 골과 갈등은 층위를 달리하면,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갈등이 깊은 우리 사회에도 접목된다. 남북이 갈라진 한반도에서 진영 간 갈등의 골은 매우 깊다. 더욱이 친일세력 청산 실패의 역사적 배경과 군사독재의 기억이 함께 하고 국제 정치 역학 속에서 활용되는 남북 대립이 진행형인 상황에서 이런 갈등은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 내지 적개심으로 표출된다.

요즘 서울 중심가에서는 각자 지지하는 진영의 집회가 과격한 언어와 함께 진행되고 있다. 어느 측이건 격렬한 구호와 함께 비난이 난무한다. 이런 집회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주는 역할을 하기에 필요한 모습이지만, 이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서로 함께 다양함을 아우르는 사회라면 각 집회에서의 너무도 날카로운 발언이나 구호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뜨거운 적개심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을 포함해 다양한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없어진다.

더욱이 지금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정치검찰에 의한 국내 정치 기반의 붕괴가 드러나는 상황이다. 마치 한 집에서 같이 지내던 가족 중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적대감이 드러난 상황과 같다. 처음에는 정치검찰에 대한 당혹감과 실망과 분노가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당장의 뜨거운 분노와 격렬한 분노만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필요하다. 가족과는 다른 점으로서, 정치 현장에서 상황을 개선하려면 상대방과의 소통에 더해서 보다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격렬한 구호와 발언보다는 조금은 귀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와 표현이 요구된다.

연극 ‘단테의 신곡’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연극 ‘단테의 신곡’의 한 장면. 사진= 국립극장

적대감과 분열을 정당화하지 말자

같은 맥락에서 가치를 공유하는 같은 정당 내에서도 입장이 다르다는 것 하나로 듣는 상대방 측에 상처를 주는 발언이 너무 쉽게 등장하는 민주당 상황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각자 안의 적대감을 살피고,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출발부터 다른 가치나 적개심을 결코 내려놓지 않는 상대방과는 결별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같이 있어도 소통이나 개선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확증편향이라는 인지부조화가 늘 작동한다. 자신 입장에 따라 상대방을 악인으로 만들어 더욱 자신 입장을 정당화한다. 갈등과 함께 이미 적대감이 있는 상황에서 서로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하고 돌아서기 보다는 각자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 그리고 무엇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더욱 조장하고 분열을 정당화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동참하고 있는가도 살피는 것이 다양함으로 가득한 21세기의 건강한 사회를 향한 출발선이자 우리의 책무다.

서로 다름이 결별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21세기 사회이기에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내려 놓고 보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각자의 다양성을 말했으면 좋겠다.

글쓴이

우희종 서울대 명예교수

우희종은 서울대 수의과대학을 1981년 졸업한 후 동경대학교, 펜실버니아대학교, 하버드대학교를 거쳐 1992년 이후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정년 퇴임했다. 통일수의학센터장,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상임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앞서 서울대 수의과대학 학장, 전국민교협 상임의장, '더불어시민당' 대표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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