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게 진짜 나일까...전주영화제

[이화정의 ‘영화의 한순간에’] 이란 영화, 정체성을 잃은 여성 이야기 두 한국영화도 불안한 정체성을 소재로 정체성, 고정적이었나 변화무쌍했나 “신선하며 가치 있는 정체성의 균열을”

이란 영화 '위드아웃 허' 스틸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이란 영화 '위드아웃 허' 스틸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전주 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수준 있는 신인감독들의 작품들을 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상업 영화관에서 만나기 힘든 영화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주 영화제에서도 이스라엘, 이란, 아르헨티나, 베트남, 튀르키예 출신 감독들의 신선한 작품을 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10일간 계속 되는 영화제에서 매일 영화를 보다보면 평상시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 된다. 나의 정체성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전주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일부 작품들은 코로나 시대에 제작됐고 영화 속 캐릭터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마스크 없이는 어디든 출입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는데 벌써 과거를 보는 기분이다. 마스크가 사라지니, 마스크를 쓴 모습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낯설음이 느껴진다. 전쟁이나, 재난 같은 특별한 상황은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번 전주 영화제에서 정체성이 흔들리는 주제를 담은 영화들이 눈에 띄었고 코로나라는 재난을 겪은 후라서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미스터리 스릴러 ‘워드아웃 허’

이란 영화 <위드아웃 허>은 이란 테헤란 출신의 아리안 바지다 프타리 감독의 작품이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통해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에서 희생자가 되는 사람은 여성들이기 때문에, 여성을 향한 불평등과 탄압이 극대화된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로야 부부는 덴마크로 이민을 준비 중인데 로야의 비자 발급이 거절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강력하게 이민을 주장했던 남편은 이번에도 몇 년 전처럼 이민이 좌절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초조해한다. 그리고 출국을 불과 2주 앞두고 모든 상황이 거짓말처럼 바뀌게 된다. 로야는 우연히 길에서 만난 한 여자를 돕고자 집으로 데리고 온다.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넋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미지의 여성은 지문을 조회해도 신원파악이 되지 않는다. 평상시에도 남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던 로야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 하나를 여자에게 붙여준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어주고 부르는 순간이 예상치 못했던 재앙의 시작이라는 것을 로야는 그때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로야의 오래된 친구 한 명이 로야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고 사라진 탓에 로야는 출국이 금지된다. 로야는 상황을 부정하면서 뭔가 착오가 있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남편 바박의 생각은 다르다. 몇 년 전에도 로야와 친구 때문에 이민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욱 바박을 분노하게 만든다. 상황은 절박하게 돌아가고 바박의 욕구와 미지의 여인의 욕구가 만나는 순간이 오는데 그것이 로야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민을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박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은 한 여인의 욕구는 둘을 한 팀으로 만든다. 바박은 미지의 여인을 로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다. 로야의 옷을 입히고 로야처럼 말하게 만든다.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그들의 음모에 동조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로야의 여자 친구만이 유일하게 일이 잘못돼가고 있음을 알지만 이 상황을 막을 힘도 의지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뺏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떤다.

결국 로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여성에게 뺏기게 되고 넋이 나간 상태가 된다. 그 상태는 로야가 미지의 여성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과 똑같다. 그 여성도 로야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음을 관객은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로야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또 다른 정체성을 강요받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모르는 남자가 접근해 행방불명된 자신의 아내가 로야라고 주장하고, 그 남자의 가족 모두 로야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기뻐한다.

이 세상에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의 공포를 체험한 로야는 생존과 안정을 위해 거짓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체성이란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다른 정체성의 수용과 적응도 무리 없이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정체성을 갖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정체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상황은 매우 비현실적이지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뒤집게 만든다.

이란 영화 '위드아웃 허' 스틸 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이란 영화 ‘위드아웃 허’ 스틸 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한국 신인감독의 뛰어난 연출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한 불안한 정체성이라는 주제와 연결해 전주 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 영화 두 편도 소개한다. 두 영화 모두 뛰어난 연출 솜씨를 보인 신인 감독의 작품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편영화 <대자보>로 실력을 인정받은 곽은미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탈북민인 한영은 한국 국적과 관광통역 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안정된 직업을 갖기가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하지만 통역안내사 역시 실적을 요구하는 경쟁적인 직업이라 수월치가 않다. 아직 초보라서 일에 서툰데다 중국 관광객의 감소로 한영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기만 하다. 탈북민을 담당하는 경찰의 호의를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오해했음을 깨닫는 순간, 한영의 버거운 삶은 크게 흔들린다.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한영은 또 다른 탈출을 꿈꾼다. 탈북민은 외국인만도 못하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탈북민이라는 애매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국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스틸 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한국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스틸 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너를 줍다>는 심혜정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지수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심한 실망과 혼란에 빠진다. 그로 인해 생긴 타인에 대한 불신은 그녀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온라인 밀키트 판매회사 마케터인 지수는 고객의 특성을 잘 파악해 훌륭하게 대처하는 사원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타인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을 지키려면 먼저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방어기제가 타인의 속성과 기질을 은밀히 분석하게 만든다.

지수가 택한 방법은 타인들이 버린 쓰레기를 조사하는 것이다. 버려지는 것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솔직하게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수는 마치 범죄자를 추적하듯이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버린 물건들의 사진을 찍고 설명을 달아 파일을 만든다. 누가 어떤 약을 복용하고, 어떤 차를 마시고, 어떤 음식을 먹는지 기록한 파일들이 그녀의 책장을 채운다. 그러다가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느끼면서 지수는 다시 흔들린다. 사랑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방어막을 치고 살아가지만 불식간에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공격은 방어막을 무력하게 만든다.

한국 영화 '너를 줍다' 스틸 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한국 영화 ‘너를 줍다’ 스틸 컷. 출처=전주국제영화제

<너를 줍다>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버리거나 숨기고 싶은 것들 속에서 과연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진실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상대에 대한 철저한 파악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자신의 정체성은 지켜야만 할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확고한 것일까.

영화제에서 만나는 영화들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정체성이라는 고정적인 틀에 신선하면서도 가치 있는 균열을 만든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영화심리상담사인 이화정은 영상번역작가로 일하면서 약 700편의 영화와 TV시리즈, 다큐멘터리를 번역했다. 그 후 영화이론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통합예술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예술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탐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현재 영화와 심리에 관한 방송, <꿈꾸는 씨네 카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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