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 사태’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문제는 국민

그의 행위를 청소년들이 배워도 될까 ‘도박’행위, 건전한 노동의욕 훼손시켜 민주당, 김 의원 제명에 앞장서야 국민들의 ‘건강하지 못한 붕당 정신’이 문제

김남국 의원은 논란이 된 가상화폐 투자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고, 이재명 대표는 국민에 사과했다. 사진=연합뉴스
김남국 의원은 논란이 된 가상화폐 투자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고, 이재명 대표는 국민에 사과했다. 사진=연합뉴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에 감염된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는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정서는 상호간에 쉽게 ‘감염’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이웃이 좋은 차를 사면 자기도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또한 이웃이 도박으로 횡재를 하면 많은 이들은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상실하고 자신도 도박으로 횡재를 하기를 바란다. 그 상황에서 누가 과연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이 생기겠는가. 따라서 도박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일하려는 의욕 대신 요행심이 팽배하고, 결국 헛된 물신주의에 지배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눈물을 흘리고 자살하는 자가 있기에 마약보다 그 해악이 더 심하다. 또한 투전판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마약과도 같은 강한 전염력과 생존력을 가진다. 그렇기에 도박은 단순히 개인사로 치부되지 않고 사회적 악으로 간주된다. 사회의 건강함과 인간 간의 결속을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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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과 투자

그런데, 도박과 ‘금융투자’의 경계선은 사실 모호하다. ‘생식능력이 있는’ 동물처럼 ‘투전된 돈’이 자식을 ‘저절로’ 생산하기를 바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 돈을 낳는 행위를 비난하면서 투전으로 인한 이자 등의 대가를 ‘자식’이라는 의미의 tokos라고 불렀다). 굳이 양자의 경계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 중의 하나는, 그 ‘투전’ 행위가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바이다. 사회에 생산적으로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기여하는 한에서 어떠한 경우에는 투전 행위도 용인되기도 하는데, 그렇기에 원래는 해악적인 카지노의 설립도 종종 침체된 지역 경제 발전 등 어떠한 ‘특정 조건’ 하에서만 불가피하게 허용되기도 한다. 또한 주식시장에서의 ‘투기’도 그럼으로써 생산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불가피하다는 주장 하에 허용된다.

하지만 일반 도박판, 비트코인, 그보다도 못한 게임코인은 순전한 도박의 목적 이외의 사회적 기능이 존재하는가? 혹자는 블록체인이라는 핵심기술을 개발하는 유인책으로서 비트코인이 필요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물론, 비트코인이 인기를 끌면 블록체인 기술도 덩달아 개발될 수 있겠지만, 블록체인 기술이 개발되기 위하여서는 ‘필히’ 비트코인이 장려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듯 하다. 특히 블록체인이 단순히 비트코인 투기를 위한 수단이 아닌 다른 중요한 사회적 기능이 있다면, 비트코인이 없이도 블록체인이 개발될 수 있는 여지는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초기에 개발비용이 과다하고, 또한 그 성과를 시현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면 국가 등에서 초기 지원을 할 수도 있는 사안일 듯도 하다. 그런데, 비트코인의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그것이 화폐이다 아니다라는 등의 갑론을박이 존재하지만[1], 위메이드 등의 게임코인은 논의를 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도박을 위한 도박의 수단인 듯 하다. [1] 많은 이들은 화페가 가지는 속성의 한가지인 ‘유동성’을 ‘태환성’과 혼동한다. 주식은 주식시장이 발달한 경우 돈으로 바꿀 수 있는 ‘태환성’은 있지만 가격이 변하기 때문에 ‘유동성’은 없다. ‘유동성’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태환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고자 할 때 그 ‘가치’가 유지되어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케인즈와 막스 베버 모두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비트코인은 유동성이 없고, 태환성도 사실 부분적일 뿐이다. 그리고 기타의 화폐의 중요한 속성에 대하여서는 본 기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한 사회적 기능이 없는 유사 도박행위는 건전한 노동의욕을 훼손시킨다. 그리고, 도박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그로 인하여 인생이 파멸되는 타인의 어두운 음영이 존재한다. 이러한 행위는 제로섬 게임이거나, 혹은 지속적으로 그 시장에 누구인가 계속 참여하여 판을 키워야만 하는 ‘피라미드 폰지 사기’와도 같은 숙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박판에서는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며, 사회의 결속마저도 붕괴된다. 그리고 유사 도박행위는 마약과도 같은 강력한 전염력을 가진다.

이러한 유사도박 수단은 당연히 화폐도 아니고, 근대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에서 등장하는 튤립보다도 못한, ‘독버섯’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튤립은 적어도 향기는 제공하며 단명한다. 하지만 유사도박 수단은 악취를 풍기며, 튤립보다도 더 강한 생존력을 가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어서 전염되기 쉽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악은 아니다. 하지만, 건전한 노동에 의하여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것이 ‘기업가 정신’이건 ‘현장에서의 노동’이건 건전한 노동의 대가를 향유할 수 있는 체제로서만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있기에 자본주의 또한 정당화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해도 좋은 체제라는 세간의 그릇된 믿음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적은 그 돈을 마음대로 ‘지대 추구’를 위해 사용하여도 무방하다는 탐욕의 심리와, 또한 도처에서 자라나는 ‘도박 심리’라는 독버섯이다.

정치인이라는 직업

소위 정치가라는 작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고, 선두에 서서 도박판에 뛰어드는 행위는 좌-우를 떠나서 비난 받아야만 한다. 특히 그가 가진 사회적 위상과 그로 인한 선동적 권력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가 바로 사회의 파멸을 향한 길을 선도하기 때문이다.

김남국 의원의 행위에서 청년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각자는 남에게 쉽게 전염되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열심히 일하기 보다는 자신의 직장에서 한눈을 팔며 김남국 의원이 몸소 실천한 ‘아름다운’ 모범을 모방할 듯 하다. 누구도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사회 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이 몸소 보여준 바를 모방함에 누가 이론을 제기할 수 있는가.

그래서 충고한다. 민주당이 시정 잡배의 집단이 아닌, 적어도 건전한 근로 의욕과 건전한 사회, 그리고 사회의 결속을 지향하는 정당이라면, 김남국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시켜는 발의를 하여야만 한다.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모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는 그가 행한 행위가 적법인가 불법인가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돈은 건강하게 벌어야만 하고, 정치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붕당 정치와 ‘무지의 베일’의 필요성

그런데, 최근의 사태를 볼 때 김남국이라는 영혼을 상실한 청년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여당 편향적 언론이 김남국‘만’을 공격한다거나 검찰이 김남국‘만’을 공격하기에 억울하다고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따지는 것은 단순히 낡은 붕당 정치 이데올로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지 내 편이라고 해서 오물을 숨겨야만 한다는 논리일 뿐이다.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면 악취가 나기 마련이다.

존 롤스가 말하였듯이, 판단하는 각자가 자신이 속한 위치나 정당을 잊어버리고 ‘무지의 베일’을 쓰고 사태를 바라보시라. 쉽게 말해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동일한 행위를 하였다고 하자. 아마도 김남국 의원을 옹호하는 분들은 이번에는 과거의 자신의 주장을 망각하고 국민의힘 국회의원에 대한 성토 대회를 열 법도 하다.

국민의 성숙도가 문제다

따라서 김남국 의원이 불법을 행하였는지, 이해상충이 있는지, 혹은 도덕적 소양이 부족한지를 판단하는 여부보다 더욱 심각하게 생각되는 바는, 김남국 의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호하는 국민들이나 민주당의 미온적인 자세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그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창시자이자 슘페터의 스승이기도 한 위대한 사상가인 폰 비저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저서인 ⟪권력의 법칙⟫[2] 에서 ‘국민적 정당’과 ‘당파적 정당’을 구분하며, 전자를 여-야를 구별하지 않고 국민적 복지라는 높은 이상에 있어서는 서로 동반자적 위치를 가지는 정당체제라고 말하고, 그러한 체제하에서만 진보가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후자인 ‘당파적 정당’은 파당적 이해를 위하여 국민적 이해를 망각하게 되는 정치 행태이다. [2] 본인이 번역하여 2023년 6월에 한글로 출판될 예정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신자유주의자의 초상인 하이에크와 미제스도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데올로기는 정반대이다.

그런데 전자의 정당 체계의 형성에 있어서 절대적 필요조건은 국민의 도야(陶冶) 내지는 성숙함이다. 그럼으로써 정치가들의 개인적 이해와 탐욕을 ‘견제’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정치는 대중선동주의에 경도되고, 혼란이 지속되는 경우 피로한 국민들 위로 ‘파시즘’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데, 그의 말에 따르자면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국민을 이용하는 ‘민주주의의 남용’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작금의 문제는 김남국 의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현재 사회에 만연된, 국민이 가진 ‘건강하지 못한 붕당 정신’과 ‘당파적 정당’이다.

글쓴이

현동균 경제분야 독립연구자

현동균은 금융인 및 경제학 , 경제 사회학 , 사회학 분야의 독립 연구자다 . 과거 30 년간 씨티그룹 , ABN AMRO, VTB 등의 대형 투자은행의 홍콩 및 싱가폴 아시아 지역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인프라 , 에너지 , 자원 , 중공업 산업분야에 있어서 사업 금융 자문 , 직접 투자 및 자본시장 금융 조달 업무에 종사했다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 및 케임브리지대학의 메그나드 데사이 경 및 제프리 하코트 교수 문하에서 정치경제학 및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을 수학하였고 , 포스트 케인지언 및 제도학파의 시각에서 투자이론 , 화폐이론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해외 유수 경제학저널에 발표했다 . 한글 역서로는 《케인스 경제학을 찾아서》 ( 마크 헤이스 저 , 2021),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에의 초대》 ( 존 킹 저 , 2022), ⟪ 권력의 법칙 ⟫( 프리드리히 폰 비저 저 , 2023) 가 있으며 , Bernhard Laum 의 고전 Heiliges Geld 를 영문으로 번역 및 해설하여 ⟪Sacred Money⟫(2023) 를 출판 . 최근 투자와 금융불안정성에 관한 논문인 ‘A financial frontier model with bankers' susceptibility under uncertainty’ ( Metroeconomica, Wiley: Feb. 2023) 를 발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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