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저와 서자(庶子) 하이에크: 권력과 자유
[현동균의 알기 쉬운 경제] ‘권력의 법칙’과 ‘자유헌정론’ 동시 출간 ‘주목’ 하이에크 자유, 권력자에 남용될 수 있는 자유 ‘자유주의’ 세뇌돼 자유 상실한 하이에크 ‘비애’
아주 공교롭게도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스승 ‘폰 비저’의 《권력의 법칙》과 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술 《자유헌정론》(개정판)이 지난 달과 이 달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후자는 정·재계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는 ‘자유기업원’이라는, ‘자유’를 목놓아 외치는 자금력이 강한 단체가 지원하여 새로 번역 출시되었다. 반면 전자는 가난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자기 길을 추구하는 출판사(진인진)에 의하여 기획되었다. 스승과 제자의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두 저술의 성향이 유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자유기업원과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
자유기업원의 웹 사이트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이 책을 홍보한다. 길지만, 그래도 발췌하여 이상한 선전문구를 보여주자면:
“법치의 올바른 구현을 위한 책, 《자유헌정론》이 개정된 번역으로 새롭게 출간됐다. 이 책에서 자유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왜 소중한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법치가 핵심적인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법에 의해 국가권력을 통제하고 자의적인 지배를 배격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이성을 신봉하기보다 인간의 고유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에 방점이 있다. 법치의 올바른 구현은 자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윤 대통령 또한 작년 5월 취임사에서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인식해야한다”며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다”고 말하며, 취임사 전체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총 35번이나 언급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명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유. 그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는 책, 바로 ⟨자유헌정론⟩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면 이 책을 선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 제 3자를 선전하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자생적 질서’에 대해
칼 멩거(Carl Menger)에서 시작되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는 전통적으로 소위 ‘비의도적’인 제도의 진화를 강조하는데, 그러한 측면은 하이에크의 대명사처럼 된(실제로는 스승들의 개념인), 소위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인간의 제도들은 애당초 어떠한 ‘의도’가 개입됨이 없이 형성되었다. 인간의 언어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며, 많은 관습, 규범, 제도 등이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논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인간의 인지와 예지 능력에는 당연히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사의 ‘모든 것’을 중앙 정부가 창조해내고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하이에크의 논조는 두가지 연관된 규범적 가치판단을 은근 슬쩍 도입하고 있다.
첫째는 그러한 ‘자생적 질서’에서 생성된 것은 기능적인 면에서 ‘효율적’이고, 그래서 ‘선’이며, 반대로 중앙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은 ‘비효율적’이고 ‘악’이라는 흑백논리이다. 둘째는 ‘자생적 질서’에서 도출된 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는 흑백 논리이다. 양자 모두에서 종교적인 논리의 비약을 엿볼 수 있다.
만약에 대한민국의 모든 중국 음식점을 국가가 소유하고 통제하는 경우에 새로운 메뉴의 개발이 힘들 수 있고, 비효율적이며, 각 조리사의 창발성을 제약할 수 있다. 이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도로나 철도망을 단순히 민간에만 의존하여 건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각 분산된 도로망을 통합하는 자생적 질서가 쉽게, 자연히, 그리고 신속하게 생성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힘들다.
케인즈는 일찍이 소위 ‘보충성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국가 계획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 성격에 있어서 개인의 역량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국가가 하는 것이다. (…) 그것의 목적은 신중한 예상을 바탕으로 개인들의 역량 범위 밖의 것들을 조정하고 관리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유롭게 서로간에 경쟁하며 활동하는 환경을 수정하고 또한 규정 짓는 것이다.”(Keynes and Moggridge, 2010: 81). 양자는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하는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케인즈의 발언은 일면 흑백논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런데 이에 더하여, 일찍이 슘페터가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필적하는 대저술이라고 극찬한, 하이에크의 스승인 비저의 저서 《권력의 법칙》에서 강조된 바와 하이에크 식의 논리를 비교하여 보면 후자의 문제점이 보다 잘 드러날 수 있을 듯 하다.
비저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러한 ‘자생적 질서’는 기능적으로 볼 때 효율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처음에는 효율적이었다가 역사적으로 점차 고착되어서 오히려 진보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이를 소위 ‘역사적 고착 권력’이라고 부른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일단 형성된 제도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권력으로 변질될 수 있고, 또한 누군가는 그러한 권력을 사유화하고 타인을 지배하고 타인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하여 이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들은 비효율적이고 압제적이면서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 또한 ‘자생적 질서’의 소산이다.”
자유와 자유의 허상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에서는 그가 강조하는 ‘자유’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모호하기만 하다. 현대적 권력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 룩스가 제시한 권력의 분류를 따르자면(Steve Lukes 2004),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하는 권력을 ‘1차원적 권력’이라고 하는데, 하이에크의 ‘자유’는 단지 이러한 1차원적 권력으로 부터의 자유에 국한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깡패’에 의하여 무력 협박을 당하지않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
그런데, 짜장면과 짬뽕 중에서만 선택하라고 하면서 탕수육을 먹지 못하게 하는 선택의 자유가 진정한 선택의 자유일까(즉, 일정 프레임 내지는 활동 반경을 설정하여 놓고 상대가 그 반경 내에서만 운신할 수 있도록 하는 권력을 스티븐 룩스는 ‘2차원적 권력’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소위 가스라이팅하여 상태를 조정하면서 상대가 ‘자유의지’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때, 그 상대방은 과연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러한 권력은 스티븐 룩스의 ‘3차원적 권력’에 해당한다).
하이에크적인 자유는 단순히 법 앞에서의 평등에 따른 자유인데, 그 법이 수호하고자하는, 그 법을 만드는 사회적 설정, 그리고 법을 누가 제정하고, 그래서 그 법이라는 운동장이 어떻게 기울어져 있고, 또한 그 법을 누가 어떻게 집행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실종되어 있다(Hook, 1960). 룩스가 말한 2차원, 3차원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하이에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야릇한 것은 스승인 폰 비저가 그렇게 강조하였던, ‘자유’라는 말이 내포하는 위험성, 내지는 ‘자유의 허상’은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에서는 실종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단 비저는 권력에 대하여 말한다. “권력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다중이 가진 ‘힘’을 결집하여 그것을 다시 그 다중을 지배하기 위하여 다시 유용하는 것이다. 전제군주는 백성들이 가진 힘(그것은 경찰, 군대와 무기 등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을 그 백성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즉, 반란하는 백성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힘을 유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은 단순히 무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권력은 인간의 정서에 작용한다. 무기 자체가 아니라, 무기가 인간의 정서에 야기하는 공포가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종교와도 같이 인간의 내면을 정복하는 권력이 보다 강력한 것이다. 하이에크의 스승인 폰 비저는 다분히 ‘부르디외’ 내지는 ‘푸코’적이다. 하이에크 식의 맹목적인 자유는 없고, 자유는 사실 ‘권력에 의하여’ 규정된 자유이다. 그리고 내적 권력은 인간의 정서를 지배하는데, 그럼에도 그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외친다.
하이에크는 시장 제도를 자유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강조하였다. 하지만 비저, 그리고 비저와 정신적 친교를 하였던 막스 베버에 의하면, 시장 제도는 마치 자유에 근거한 것처럼 보여지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속박한다는 측면에서 무력보다도 강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비저와 베버는 마르크스식으로 반문한다. 자본가와, 가진 것은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가 노동‘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 과연 서로간의 ‘자유’로운 거래라고 할 수 있는가. 비저는 또한 묻는다. 부자의 100원이 가난한 자의 100원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가. 100원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100원으로 간주하는 시장 제도는 과연 ‘자유’로운 질서인가?
즉, 하이에크에 따르면, 짬뽕과 짜장면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면,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그 둘 중 하나를 사먹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왜 탕수육을 주문할 수 없는지는 하에에크식 자유를 결정하는 요소는 아니다. 그리고 그는 시장을 통해서만 자유가 보장되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모든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조직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비저와 막스베버에 의하면 시장이라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 시장이 공평한 운동장이 되기 위하여서는 비저에 의하면, 모든 이들의 소득이 똑같아야만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공평하게 협상하기 위하여서는, 노동자들도 뒷배가 있어서 당분간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시장에서 평등하게 거래하지 못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은 피부로 느낄 수 있지만, 시장을 통한 권력의 행사는 비가시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따라서 더 강력한 지배의 수단이다.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아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감히 거부하지 못하는 막스 베버의 이야기이다.

하이에크는 진정 스승을 이해했을까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에는 그의 스승 이름이 세 번 등장한다. 하나는 조세에 관한 것이니, 본 글의 맥락에서는 상관없고, 한 번은 정치적 권력은 단순히 무력만이 아니라고 한 사람들 중의 하나라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권력이란 궁극적으로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을 복종하게 만드는 의견의 상태이다”라고 말하면서, 데이빗 흄과 비저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간다.
일단, 필자가 보기에는 자신의 스승이 말한 권력에 대하여 하이에크는 전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 그의 스승의 요점은 권력은 피지배자의 ‘정서’를 지배하는 힘이라는 출발점이다. 단지 누군가를 따르게 하는 ‘견해’라는 하이에크의 권력에 대한 요약은 그의 스승이 말한 권력의 본질과 상충되는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스승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표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위의 스티븐 룩스의 분류를 따르자면 하이에크는 단지 1차원적 권력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하이에크에게 있어서는 제도란 인간에게 있어서 비의도적이며 자생적으로 생성되는 단방향 만의 인과만이 존재할 뿐, 자신의 스승이 강조하였던 바, 자생적으로 형성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착화된 제도와 그러한 제도를 이용하는 권력자가 이제는 인간을 규정하는 반대방향의 인과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물론 하이에크는 그의 스승인 비저가 그렇게 강조하던 권력과 지배를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도 한 인간이었기에, 정작 자신은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도 집착하던 자유주의라는 종교적 신념의 지배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였을 듯 하다. 자유주의라는 종교에 사로잡혀 자유를 상실하는 이율배반…이에 그의 비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파시즘의 원인?
또한 파시즘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스승과 제자의 의견은 갈린다. 집단주의, 사회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하이에크와는 달리, 그의 스승인 비저는 민주주의의 ‘남용’을 파시즘의 기원으로 본다. 비저에 의하면, 파시즘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남용함으로써 생긴 결과이며 우민 정치의 소산이다. 무솔리니나 스페인의 파시즘은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로 등장하였다. 역사적으로 도야되지 않은 대중 위에 등장한, 마치 민중의 자유에 근거한 것처럼 여겨지는 민주주의는 대중 선동주의가 되며 자칫 파시즘으로 흐른다는 것이 비저의 주장이다.
그런데, 하이에크는 그의 정신적 친구인 프리드먼과 함께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을 철저히 옹호하였고 피노체트를 격려하기 위하여 몸소 칠레를 방문하였다. 하이에크의 정의에 따르면 피노체트는 시장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자유의 수호자였다. 따라서 피노체트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학살과 만행은 다 용서되었다. 피노체트는 ‘가진 자’의 자유를 사랑하였기에 파시즘이 아닌 진정한 자유의 수호자였다.
판단은 독자의 몫
어찌 그렇게도 상이한 이야기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나올까. 사실 미스터리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독자의 판단이다. 어찌되었건 스승과 제자의 저술이 동시에 한글로 출시되었기에 기존 하이에크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비저의 책을 읽고 곰곰히 생각할 기회가 있게 되었다. 적어도 최근 광풍처럼 퍼지는 소위 ‘신자유주의’에 대한 살을 베는 듯이 날카로운 비판을 그들 신자유주의자의 바로 그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을 수 있는 기회는 생긴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 자세이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후쿠야마 교수는 일전에 필자와 유사한 맥락에서 하에에크의 《자유헌정론》을 비판하였는데(Fukuyama 2011), 이에 발끈하여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서있는 미제스 재단에서 반대 논조를 제기한 바 있다(Thies 2011).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미제스 재단의 반론은, 하이에크의 ‘자유’ 개념에 대한 정작 중요한 문제점 지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고, 그저 자신들의 종교는 항상 옳다고 강변하는 신앙고백처럼만 보여진다. 어찌되었건, 필자의 이 글에 대하여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교주로서 숭배하는 ‘자유기업원’으로부터의 반론을 기대해 본다.
(인용 문헌)
Fukuyama, Francis (2011), Friedrich A. Hayek, Big- Government Skeptic, The New York Times
Hook, Sydney (1960), Review of Hayek’s “The Constitution of Liberty,” New York Times Book Review, Feb 12, 1970.
Lukes, Steven (2004) Power - A Radical View, 2nd ed. Palgrave. 한글 번역이 존재하나, 1974년 출판된 제1판에 대한 번역이며 2판의 내용과는 차이가 많이 존재한다. 참고: 스티븐 룩스, 3차원적 권력, 나남 (1992).
Keynes, J. M. and Moggridge, D. E. (2010), Keynes on the Wireless,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Thies, Clifford F. (2011), The End of Hystery? Francis Fukuyama’s Review of The Constitution of Liberty, Mises Institute.
비저, 프리드리히 폰 (2023) 권력의 법칙. 현동균 역/해제, 진인진. 원저 Friedrich von Wieser (1926) Das Gesetz der Macht.
하이에크, 프리드리히 A. (2023) 자유헌정론 (개정판), 최지희 역, 자유기업원. 원저 Friedrich von Hayek (2011), Constitution of Liberty, The Univerity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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