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전쟁①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나
[어느 프랑스 공화정 연구자의 목소리] 1954년 11월1일 시작된 독립전쟁 전쟁 주도한 FLN “인민이 영웅이었다” 7년4개월만에 종전, 국제정세가 큰 도움
지난 7월 5일은 알제리 독립기념일이었다. 1962년 일이니 올해로 61주년, 유럽과 마주한 지중해안의 수도 알제, 이베리아 반도에서 곧 닿는 서부 오랑, 중부 산악 카빌의 작은 문화도시 티지우주, 모두 축제를 벌이고 정부는 국경일을 기념하여 주택난을 겪고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 아파트를 보급했다. 하지만 우선 여러분은 알제리라면 어떤 인상이 있고 어떤 면을 존중하고 있을지? 이른바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알제리인민민주공화국의 경제지표는 아직 낮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가난하면 상대적으로 그 사람이나 그 사회의 인격이 낮은 것일까. 이 글은 이에 ‘아니오’라고 답하려 한다. 1950년대 식민지 해방의 상징이었던 알제리전쟁(1954~1962)이 이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이 전쟁은 알제리전쟁, 알제리혁명, 알제리독립전쟁의 세 이름을 갖는다. 이 글에서 알제리전쟁이라 칭하는 것은 이 전쟁의 세계사적 의미가 이 한마디로 살아난다고 보이기 때문일 뿐이다.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선포하다
전쟁이 선포된 것은 1954년 11월 1일이었다. 밤사이 몇몇 요처에 기습 공격이 있었고 아침에 보니 알제 도심에 전쟁선언문 벽보가 붙었고 이집트의 카이로 방송이 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전쟁이라니? 전쟁을 빈손으로 하나, 군대가 있고 전쟁비용이 조달되고 상대방과 맞먹는 무기가 보급되어야 하는데, 누가 감히 강대국 프랑스를 상대로 물리적 전쟁을 선포했을까? 프랑스가 2차 대전에서 나치에 패배하고 분단 점령을 당했어도 세계 최강에 드는 군사대국이었는데... 그보다 먼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닌 데도 그것이 전쟁일까. 우리는 당연히 의문스럽다.
그러나 이 전쟁 선언은 급조되지 않았다. 1945년 5월 8월 세티프 민중 시위에 이은 대규모 진압이 불씨가 되었다. 알제리민중당(PPA)에서 발원한 시위가 격렬해지고 유럽인 살해가 일어나자 군경과 동시에 유럽인 민병대가 투입되고 이내 프랑스 해군이 세티프와 겔마, 케라타 일대에 함포사격을 가하고 공중에서는 폭탄이 날아와 댐을 부수고 무슬림 민중은 살해, 검거되었다.
진압작전은 공식적으로 한 달 이상 지속되었다. 무서운 세월이었다. 세티프 학살의 사망자 수는 지금도 엇갈린다. 학자에 따라 3천 명, 2만 명, 3만 명 사이를 본다. 어떻든 세티프 사건은 식민지 알제리의 숨겨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알제리의 문호 카테브 야신(1929∼1989)이 이 때 16살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훗날 “나는 거기서 민중의 얼굴을 보았다”고 술회한다. 그로부터 평화적인 방법, 즉 지배층인 알제리-유럽인 측이 제시하는 선거에 의한 개혁은 부질없는 위선이며 오직 의지할 것은 무력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10년이 소요되었다. 알제리의회 선거, 민족주의자들의 특수조직(OS) 결성, 발각, 검거, 대규모 재판도 경험했다. 그러면 식민지가 된 19세기부터 무장항쟁을 할 것이지, 그동안 120년은 뭘 했기에 이제야? 이슬람은 군사력이 강했던 문명이었는데.
“국가가 부재하면 전쟁을 이길 수 없다”
알제리는 인구도 아주 적고 국가의 형태도 희미한 땅이었지만 서양 세력에 쉽게 정복되지 않았다. 알모라비드, 알모하드 제국이 지나간 자리였다.(이브 라코스트, 『이븐 할둔/역사를 보는 이슬람의 눈』, 2015). 두 제국은 그 때 끝났으나 이슬람의 군사력, 기술력, 행정력의 절정과 같았다(바이올릿 몰러, 『지식의 지도』, 2023).
어떻든 지금은 1830년. 프랑스 군함들이 그 해 7월 14일 알제 항에 상륙한 후 프랑스 군사와 알제리의 전쟁은 18년을 지속했다. 화력과 전비와 전법이 강력하고 식민지 침공에 익숙한 프랑스 군이었으나 알제리의 20대 총사령관 에미르 압델카데르(1808~1883) 휘하 알제리 항쟁군도 잘 싸웠다. 그 후에도 보불전쟁 중인 1870년 가을 동부의 항쟁을 거쳐 사막의 정복까지 전쟁이 다 끝난 것은 1900년대 초였다. 수도 알제 언덕의 대규모 군사박물관에는 이 시대의 전투를 그린 대형 전쟁화와 군사 장비들이 전시되어, ‘저렇게 길고 큰 칼을 썼구나’, ‘군마는 저렇게 장대하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항쟁의 지도자 압델카데르는 깊이 깨달은 바 있었다. 국가다운 국가가 부재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제리는 근대 17세기부터 오스만 섭정국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강건한 샤리프 왕조를 지킨 모로코의 정치상황과는 달랐다. 미리 말하면 1962년 이제 20세기의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친 알제리는 압델카데르의 동상을 시내 제3세계 책방 바로 앞 작은 광장에 건립한다. 정복군 뷔조 장군의 동상을 내리고.
1954년 전쟁을 선언하고 주도한 알제리 민족단체의 이름은 FLN이었다. Front de la libération nationale. 알제리에서나 프랑스에서나 못 들어본 기구였다. 그러면 다른 민족주의 단체는 잘 알려져 있었다고? 식민지에서 대놓고 민족주의 정치운동을 하다니. 알제리의 민족주의 정당은 불법이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되었고 알제리와 프랑스 양안에서 활동했다. 알제리의 실제 통치와 재정권한은 알제리-유럽인에 위임되었으나 알제리는 원칙적으로 프랑스 제3공화정의 법 적용을 받았다.
그런데 FLN은 대중에게 인기있던 민중당도, 그보다는 지식인 중심인 페르하트 압바스(1899-1985)의 당(알제리성명민주동맹 UDMA)도 소용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FLN은 주권국가 알제리의 회복을 목표로 무엇보다 대외 전략에 힘을 쏟았다. 프랑스가 알제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아님을 선전하고 국제적 동의를 얻어야 했다. 물론 내부의 전열부터 정비했다. FLN은 ALN, 즉 민족해방군을 곧 결성했으며 군제를 정하고 주력군의 훈련, 의무부대부터 연락, 통신, 홍보를 조직했다.

알제리는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을까
1962년 3월 18일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공화국임시정부(GPRA) 사이의 에비앙협정 조인까지 7년 4개월. 식민지 알제리가 무장항쟁으로 결국 독립을 성취한 것은 신기한 일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알제리를 도운 것은 첫째는 국제정세였다. 1954년 그 전해인 1953년 7월 한국전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1954년이 되자 7년을 끈 아시아의 다른 전쟁이 끝났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지압 장군이 이끄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다.
FLN의 지도부가 되는 군사전략가들은 이 광경을 주시했다. ‘막강한 군사력의 프랑스도 저렇게 지는구나’. 베트남뿐 아니라 구 유럽 식민지들은 2차 대전의 결과 새 날을 맞았다. 15억 인구의 아시아-아프리카를 대표하여 이집트,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유고 등 29개국이 비동맹을 결성했으며 알제리 민족운동은 둘도 없는 구원군을 만났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회의의 대표자들 수카르노, 나세르, 네루, 티토는 젊은 FLN 대표들을 기특하게 보았다. 도와줘야지.
1957년 ‘알제전투’로 프랑스 군의 전쟁 수법이 드러나고 1958년 9월 알제리임정이 서자 노련한 정치가 페르하트 압바스, 또 호신 아이트 아흐메드, 므하메드 야지드 같은 젊고 기민한 임정 대표단이 유엔과 미국, 중국과 일본을 순회하면서 알제리는 식민지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중국의 노장 주언라이(周恩來)가 이들을 격려했다. 미국의 젊은 대통령 케네디가 유럽의 식민지 존속을 꺼렸다. 그러면 프랑스가 이 국제적 기류를 읽고 알제리를 내놓기로 하겠지. 무력 침공으로 정복하고 일방적으로 통치했는데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아냐. 아니,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알제리 양 옆의 튀니지와 모로코는 1956년 그동안의 보호조약을 폐지하고 독립했다. 그러나 알제리라면 문제가 달랐다. 공식적으로나 많은 프랑스인들의 심경에 알제리는 지중해 건너 해외에 있을 뿐 프랑스의 영토였다. 1848년 제2공화정기에 정복이 끝난 알제리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3개도로 나누어 프랑스 행정에 편입했다. 따라서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파리 내무부에서 관장했다. 프랑스어, 프랑스의 정교분리, 프랑스의 교육 제도가 아랍어- 베르베르어도 쓰지만-를 쓰는 이슬람 땅에 주입되었다.
1954년 11월 이후 프랑스 군이 전력을 다해 싸운 것은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알제리 동부 국경지대에 460㎞의 모리스 철조망, 샬 철조망을 설치해 무기의 반입을 차단하고 약 200만 명의 주민을 소개하여 민족군의 은신처를 봉쇄하고 자크 마쉬의 10사단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FLN의 알제 조직망을 파괴했다(질로 폰테코르보,『알제리전투』, 1966). 다른 한편, 전쟁의 열쇠는 심리전이다. 프랑스 군은 산간 주민들에게 식품, 의료, 학교, 사회서비스를 제공했다. 전쟁에서는 여성이 중요하니 드골 정부는 알제리 여성의 결혼을 법제화하고 결혼 연령을 올리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돌아온 드골,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후 1년 여 지나 1946년 초. 정계에서 물러났던 드골을 프랑스가 다시 부른 것은 그 동안의 공화정 체제로는 이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유프랑스군을 이끌어 파리 해방에 미영 연합군과 나란히 입성케 한 드골이 필요했다. 자유프랑스군의 수장인 군인 드골은 알제리 수호에 집착하는 군 세력을 제어할 수 있었다. 드골은 3개월 후인 1958년 9월 국민투표로 헌정체제를 바꾸고 알제리 독립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알제리임정 사이 협상은 난항이었다. 3년 반이 걸렸다. 드골의 알제리 독립론에 반대하는 군부 거사도 일어났다. 더 큰 문제는 알제리-유럽인이라 하지만 프랑스인이 주력인 ‘피에누아르(검은 발· 알제리내 유럽인)’ 문제였다. 1962년 3월 19일 휴전 후 알제리 총인구의 10분의 1인 약 100만 유럽인 가운데 80만 명 이상이 귀환선에 올랐다.
집과 농토 도시, 학교, 사업체를 모두 버리고 손에 든 것은 짐 가방 두 개였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이 대거 철수했지만 피에누아르의 운명은 예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미 에비앙협정 전에 ‘알제리 독립’이라는 전망이 확실해지자 극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비밀군사조직(OAS)이 등장했다. OAS는 교사이며 『빈자의 자식』같은 작품을 남긴 카빌의 작가 물루드 페라운을 에비앙 협정 사흘 전인 3월 15일 알제 고등학교에 난입하여 총살한다. 다른 동료 교사들과 함께. 작가 페라운은 무슨 이유로 이 폭력적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그는 정치에 참여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의 『전쟁일기』는 그가 얼마나 깊이, 얼마나 담담하게 전쟁의 면면을 투시하고 있던가를 보여준다. 그러면 온유한 비판이 더 두려운 것일까.
알제리전쟁 이후 20년, 30년이 지나 점점 강세를 보인 프랑스 극우의 기저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독려해서 갔다가 험지를 농토로 일구고 무슬림을 ‘제압’하고 알제리를 ‘건설’하고 통치한 이들 유럽인들이 하루아침에 귀환해야 했던 문제가 깔려 있다. 그러면 이 전쟁은 결국 외교와 협상의 전법이 쌓인 프랑스의 역량으로 끝이 났던 것일까. 아무리 양보해도 그렇지 않다. ②편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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