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전쟁③ 왜 독립후 혼란이 더 컸을까

[어느 프랑스 공화정 연구자의 목소리] 풍부한 자원에도 세계 주요국 지위 못올라 극심한 갈등과 혼란...극복 어려운 식민주의 언어와 경제, 프랑스 영향에서 못벗어나 여전한 알제리 전통의 문화와 전통의 가치

알제리와 프랑스는 아직도 긴장관계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알제리 청년들이 알제 프랑스총영사관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알제리와 프랑스는 아직도 긴장관계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알제리 청년들이 알제 프랑스총영사관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있다.

예상보다 빨리 완결된 ③편

1962년 3월 18일 스위스 접경지대인 소도시 에비앙의 호텔 파크 앞에 헬리콥터 한 대가 내렸다. 보안의 위험 탓에 스위스 군에서 제공한 헬기에서 내린 이들은 알제리임정대표단이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역사적 6인’에 드는 크림 벨카셈을 단장으로 알제리 임정의 외교 장관 사드 달라브, 대변인 레다 말렉 등 6인이었다. 대표단은 어려운 협상을 이끌었던 드골의 심복 루이 족스 및 프랑스 대표들과 함께 93매의 협정 전문에 조인하고 회의장을 곧 떠났다.

에비양 협정을 위해 스위스에 도착한 FLN대표단. 가운데 손을 들고 있는 이가 크림 벨카셈 단장이다.
에비양 협정을 위해 스위스에 도착한 FLN대표단. 가운데 손을 들고 있는 이가 크림 벨카셈 단장이다.

드디어 독립전쟁이 끝났다

1958년 9월 수립 이후 활동도 많이 하고 분란도 많이 겪은 알제리 임정이었다. 그럼 이제 당연히 임정이 주축이 되어 독립한 알제리를 통치하게 되었겠지 하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임정은 두 가지 공적을 이뤄냈다. 하나는 국가의 영토를 일체 훼손하지 않고 독립에 도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일부라도 영토를 양도하지도 않고 어느 선에서 분할하지 않은 것이었다. 1956년 1월 알제리 동부, 리비아 국경에 인접한 에젤레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이 지역을 남기기를 원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FLN의 다른 공적은 물심양면 국제적 지원을 받았어도 외국군을 알제리 땅에 불러들이지 않은 점이다. 그동안 전투에 고생한 민족군의 지도자들과 그동안 세계를 상대로 대외교전을 수행한 임정 지도층과 또 오직 수고만 한 민중이 힘을 합쳐서 새 나라 건설에 들어갔을거야 라고 우리는 믿을 수 있다. 빈곤은 그렇게 무섭지 않아, 사람들이 활기 차고 서로 믿고 웃으면 해낼 수 있어. 제발 역사가 순탄하기를!

1962년 7월5일 알제리 해방의 날 모습.
1962년 7월5일 알제리 해방의 날 모습.

독립후 더욱 분열되는 알제리

순탄하면 역사가 아닌지, 독립한 알제리의 군과 민, 군과 군은 격심하게 싸웠다. 상부의 싸움은 마을마다 전염되었고 1962년 9월에는 다들 참담한 심경이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있다. 식민주의의 큰 병폐는 그 구조 안에 들어간 피식민인들이 내적인 역량을 키우기 어렵다는 점이다. 식민지배자들이 원하는 자기 비하가 체질이 되고 자민족끼리 ‘네 탓’만 하면 정치는 고사한다.

정치가 여러 힘과 여러 사상의 대립이면서도 결합이라고 정의한다면, 식민지 해방이 되었다고 그 나라 민중과 지도층이 하루아침에 이 결합에 도달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알제리는 아직 부족의 생활방식을 지켰고(피에르 부르디외, 『알제리 사회학』, 1958), 전쟁이라 군인들이 중요했으니 나라의 무게 중심이 민간에 놓이지 않았다. 아마 군인들의 눈에는 군이 나라를 지켜야지, 민에게 권력을 이양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이론이야 어떻든, 알제리 임정은 벤유세프 벤헤다 지도하에 7월 3일부터 알제에 자리 잡았다. 7월 1일 국민투표로 알제리 독립이 99. 72%의 찬성을 획득했다. 하지만 모로코와 튀니지에 대기하고 있던 2만 1000명의 국경부대가 임정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세력을 지지하는 윌라야 사령관들이 다수였고 벤헤다는 곧 사직한다. 두 번째 임정 수반이던 그는 아반 람단 생전에 둘도 없는 참모였다. 숨맘대회에도 참석했다. 이제 막상 독립을 하니 숨맘대회의 결의가 얼마나 사무쳤을까. 민이 군에 우선한다는, 정치가 군사를 제어한다는 그 국가적 원칙이.

알제리 여기저기는 사실 그해 3월부터 7월 사이에 혼란과 대립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우선 3월에 당장 어제까지는 구경꾼이던 무리가 알제리 승리의 전망에 ‘3월파’가 되어 보복을 자처했다. 다른 한편 거친 폭력의 진원지는 ‘프랑스의 알제리’를 사수하려는 OAS였다. OAS는 FLN과 협상도 했고 1962년 봄에 공식적으로 물러갔으나 ‘이 훌륭한 대학을 무슬림들에게 내줄 수 없다’고 알제대학 도서관을 불 질렀고 1월, 2월 서부 오랑에서 연일 타격과 살해를 저질렀다. 7월 5일 독립이 선포되자 이번에 오랑에서 폭력을 휘두른 것은 누군지 모르는 무슬림들이었다. 사망자는 프랑스인이 353명, 친불파 무슬림이 100명으로 알려졌다.

알제리 산속마다 살해당하고 처형당한 이들은 우선 ‘하르키’였다. 프랑스군에 협력했다가 새로운 알제리 독립정부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한 이들이 ‘하르키(Harki)’다. 그들이 왜 프랑스 군대에 들어갔는가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생계가 어려운 농촌에서 프랑스 군대에 들어가면 먹는 것은 해결이 되었다. 또는 알제리가 독립한다는, 알제리가 내 나라이고 프랑스는 내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이 결핍된 이들도 많았다. 어떻든 하르키들은 재판 없이 약식 처형되었다. 역사가들은 처형된 하르키를 10만 명 이상, 또는 15만 명으로 추정했지만 FLN은 1만 명을 제시했다. 그동안 그러니까 1차대전 이후 프랑스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직업군인이었던 무슬림들도 배신자로 취급되어 공격 받고 때로는 죽임을 당했다.

알제리와 프랑스 관계는 어떻게 됐나

식민지를 경영했던 ‘피에누아(검은 발)’는 떠났지만 그들의 재산은 어떻게 되었을까. 피에누아도 대부분은 중소 농민이나 소상공인, 혹은 공무원, 기술자들이었다. 작가 알베르 카뮈가 자란 알제의 벨쿠르는 유럽인과 무슬림이 섞여서 가게를 차리고 사는 동네였다. 모든 상황을 한 줄로 엮어서 넘길 수는 없다. 어떻든 피에누아의 토지 재산은 국유화법으로 처리되었다. 알제리 가용 토지의 27%에 해당했다. 대토지 소유자의 땅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전체 피에누아 중에서 아마 1% 넘는 정도였지만 철학자 프랑시스 장송이 격분한 것도 이 광대한 대토지를 목격하고서였다.

피에누아 이야기는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금기였으나 2000년대 넘어서는 점점 여러 해석이 나오고 프랑스 의회는 2005년 2월 23일 법으로 ‘피에누아’와 ‘하르키’의 존재를 인정했다. 한편 드골의 알제리 정책에 반대하여 1961년 4월 알제에서 봉기한 장군들, 즉 공군의 앙드레 젤레르, OAS의 수장이던 라울 살랑, 공군의 모리스 샬, 에드몽 주오는 체포되고 재판 받았다. 3년 전 1958년 5월에는 드골을 정계에 불러들인 5성급 장본인들이었다. 1966년에 석방되지만 수년간 수감된 젤레르 장군은 감옥 일기를 썼고 현역 때 미뤄두었던 괴테 번역을 시작했다.

그런 문제들은 부차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정작 문제는 국가 대 국가로서 알제리와 프랑스의 관계였을 것이다. 우선 프랑스 군 병력은 (에비앙 협정에 따라) 1년 후, 2년 후에는 완전히 철수했고 알제 해안가의 단아한 총독부 건물들은 비어졌다. 하지만 양자 관계를 칼로 자를 수는 없었다. 프랑스는 일제리 두 곳의 군사기지를 확보했다. 한 곳은 2차대전의 해군 기지였던 서부 항구 메르스엘케비르였다. 또 하나는 남부 사막 레간(Reggane)에 위치한 핵 기지였다. 알제리 전쟁기는 마침 강대국들이 핵실험에 착수하는 때였고 프랑스 역시 2차대전에서 나치에도 지고 연합군에도 밀린 군사력의 회복이 시급했다. 프랑스는 레간 일대에서 1966년까지 핵실험을 시행했다.

프랑스어를 그대로 써야했던 알제리

그렇더라도 그런 것은 양측의 필요상 주고받을 수 있는 문제 같고, 말(언어)이야 이제 프랑스어 세상이 끝났겠지. ‘엉 되 트루아’(프랑스어 하나, 둘, 셋), 그 소리 얼마나 듣기 싫었겠어. 그런데 우리는 1954년 전쟁선언문이 프랑스어로 먼저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한참 후에 FLN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로부터 해방이 목적인데 왜 그 선언문을 프랑스어로 썼냐고. 하지만 FLN 엘리트에게는 학교에서 배운 말이 그 말이었고 지적 언어가 그 언어였고 그 말로 프랑스 교사가 읽는 빅토르 위고를 알았고 그 언어로 미국과 세상에 나가 의사가 통했다. 물론 알제리는 독립 후 곧 아랍어 전용 정책을 지향했다.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 수립이 큰 방향이었다. 1930년대 민중을 일깨운 3대 구호가 “이슬람은 우리 종교, 아랍어는 우리말, 알제리는 우리의 조국”이었다. 그런데 대다수 알제리인이 사용하는 아랍어는 방언 아랍어이다. 문어인 고전 아랍어는 모든 사람이 배우기 쉬운 언어가 아니다.

이집트에서 아랍어 교사들이 들어왔지만 곧 철수했다. 동부 이슬람권과 북아프리카 이슬람권은 달랐다. 이미 14세기에 이슬람의 대 사상가, 정치가, 군사전략가인 이븐 할둔이 망명길에 올라 카이로에 갔을 때 거기는 너무 낯설었다. 복식도, 말도, 정서도 이질적이었다. 1965년 초대 대통령 벤벨라를 축출하고 집권한 후아리 부메디엔의 사회주의 정부는 특히 알제리의 고유성에 집착했으나 국민의 언어를 오직 아랍어로 한다는 것은 너무 현실과 맞지 않았다. 학문과 기술을 프랑스어를 제치고 진전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국민 언어인 아랍어와 외교, 상용, 교육에 사용되는 프랑스어가 모두 공식 언어가 되었다. 계층에 따라 다른 것 같기도 했지만 개인 집에서도 두가지 말을 다 썼으며 텔레비전 방송은 주로 아랍어, 신문은 프랑스어 신문을 즐겨보는 것 같았다. 좋은 점도 있었다. 작가들이 세계무대에 곧 진출했고 사회과학자들도 그랬다. 그러나 언어와는 상관없이 이슬람 종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프랑스어가 몸에 배인 계층도 기독교인이 아니다. 알제리인의 99%가 수니파 이슬람 신자이다.

알제리와 프랑스 사이는 언어로만 엮이지 않았다. 독립 후에도 알제리의 오레스와 카빌 지역의 젊고 우수한 청년들이 계속 프랑스로 간 것은 사회경제적 조건 때문이었다. 알제리 이민자들은 이미 독립전쟁 동안에 21만 명에서 35만 명으로 늘었다. 그 전에 1차대전에 17만 명의 병사가 동원되고 군수산업을 합쳐 30만 명에 달하자 ‘청년알제리’ 같은 알제리 민족주의 당파가 프랑스 정부에 대가를 요구했다. 이들 알제리 이민자들은 1930년대 알제리 정치단체의 당원이며 자금줄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도 파리 시내 5구에 아름다운 모스케 건물을 세웠고 교외에는 프랑스-무슬림 병원, 또 무슬림 묘지도 지정했다. 19세기 말부터 인구 부족에 시달린 프랑스는 북아프리카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이 다 모여드는 이민의 나라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알제리 이민자 문제는 특히 심각했다. 이들은 뿌리 뽑히고 정처 없는 모습들이었다. 전쟁 후기에 알제에서 군 복무를 대신했던 젊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전쟁 후 파리로 초빙한 지식인들이 여럿이었다. 그 중에도 그의 동료였던 알제리 사회학자 압델말레크 사야드는 이민 사회학에 전념하여 이들 젊은 알제리인들의 고뇌와 사색을 학문화했다.

풍부한 자원을 가졌는데도 왜 성장 못했을까

그렇기 때문에 더 진솔한 문제는 나라 전체가 안정되고 풍요한 경제를 일구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쟁의 영웅 알제리 민중은 보답을 받을 일을 하고도 남았다. 여성의 경우 전쟁이 끝나고 전쟁 참여를 증빙할 수 있던 여성은 모두 합해서 1만 1천명 정도였다. 그중에는 자밀라 부히레드, 조라 드리프처럼 사회적 명사로 예우 받은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 길고 험한 전쟁에 1만 여명의 여성만이 참여했을까. 물론 새 나라라는 의욕에 여성의 출산율도 한 때는 1인당 8.1명까지 높아졌고 교육의 민주화는 빨리 퍼졌다. 알제리는 우리 같은 대학 등록금은 상상도 못한다.

그러나 경위가 어떻든 이 나라는 석유와 가스, 광물 등 자원을 갖춘 천혜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세계 20대국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질문은 깊지만 이는 국제경제 전문가에게 맡길 일이고, 하나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알제리 전쟁사를 쓴 독일의 정치학자-경제학자 하르트무트 엘젠한스의 판단이다. 엘젠한스는 두 가지를 짚는다. 유일당 체제에서 오는 관료제 권위주의의 경향, 소득의 생성이 원자재 수출에 주로 근거하고 자본주의 침투 이전에 막대한 소득이 발생하면서 이로써 국가-자본가 계급을 형성한 것이 문제였다는 점이다. 초기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이하지 못하게 됐다는 원인은 그렇게 분석될 수 있다.

개인이나 사회나 돈을 벌고 돈을 모아야 산다. 이미 100년 전에 프랑스 사상가 라파르그는 “돈이 신(神)”이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알제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돈으로 엮인 사회 같지 않았다. 딱히 그것이 무엇인지 해독하기 어렵지만 그 나라에는 자본과 투자와 부동산에 목을 매는 듯한 사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어떤 물결이 퍼져 있었다.

전쟁이 막 끝나고 오갈 데 없는 빈민들이 텅 비어버린 도시의 좋은 집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어느 물건 하나도 손대지 말라고 하셨다”는 기억, 전쟁 직후 어린 시절을 보냈을 세대인 알제 서점 지식인들의 기개. 자신들이 당한 물리적 고초를 한마디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연단에서 말하는 전쟁 세대 여성들, 그리고 수십년 후, 해안 도로에서 “오댕 버스 정거장이 어디에요?”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 않고 그 높은 계단을 같이 올라와서는 “내가 기차 시간이 급하다. 저기 정거장인데 혼자 찾아가겠냐”고 하고는 그 계단을 급히 내려가던 어느 여성, “역사에서는 대의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수단과 방법이 문제입니다”고 처음 대하는 외국인을 똑바로 쳐다보던 전쟁사 학자, 유일당의 역사 해석에 대한 압력에 굴하지 않던 세계적 학술지 NAQD(비평) 편집진, 다니던 문서고를 나오며 이제 간다고 인사했더니 알제의 상징인 쟈스민 꽃 한 송이를 꺾어 내밀던 군인 경비병... 그것이 알제리의 사회적 인격이었으리라 믿는다면 다만 주관이고 직관이기만 할까 의문스럽다.

글쓴이

노서경 프랑스 정치사학자 칼럼니스트

노서경은 서울대 인문대 서양사학과에서 1999년에 프랑스 하원의원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장 조레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했다. 이 논문이 발판이 되어 2022년 <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를 간행했다. 그에 앞서 2017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해방전쟁(1954-1962)을 소재로 <알제리전쟁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을 출간했다. 1969년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일보 외신부에서 6년간 기자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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