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가득했던 1910년대 프랑스 사회당 전당대회
[어느 프랑스 공화정 연구자의 목소리] 전국을 돌아다니며 열리는 전당대회 장미와 주먹의 에피네 대회: “삶을 바꾸자“ 우리나라 전당대회 속기록은 어디에 있을까
당대표를 왜 뽑아야하지?
그때 그 당은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를 뽑지 않았다. 당은 처음부터 1인의 지도자라는 개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무슨 당이 그래? 그 당은 1905년, 개혁파와 혁명파와 또 다른 당파들이 어지간히 싸운 끝에, 그것도 외부 세력인 인터내셔널(The Second International)의 압력을 받아 어렵사리 통합한 프랑스 사회당(SFIO)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심란했을까. 누가 확실히 당을 이끌어야지?
당의 길잡이는 연차당대회였다. 원내 의원들이 당을 쥐고 흔들지 못했다. 정치문화는 누구 마음대로 잘 가동하지 않고 그 나라 사람들 사는 방식이 배어드는 것 같다. 프랑스 제3공화정은 대통령제도 아니었지만 의회든 당이든 1인의 권력이라면 사절했다. 대한민국 수권 정당의 전당대회가 진행중인 우리는 사람 중심이 아니라, 사상의 이름으로 싸웠던 당대회 모습 한 두 자락을 보려 한다.
당 진로 놓고 ‘분당’ 위기감 고조
1908년 프랑스 사회당 제5차 전국당대회는 멀리 남부 툴루즈에서 열렸다. 10월 15일 목요일 아침에 개막하여 16, 17일 이틀간 길고도 긴 연설로 서로 치고받아, ‘분당이냐’ 하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회계보고, 원내의원 보고 같은 정규 일정을 마친 후에는 오전, 오후 회의도 모자라 야간 회의를 속개하며 모두들 열을 낸 문제는 당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그것이었다.
좌파든 우파든 온통 개인주의인 판에 그래도 사회당은 체계를 갖추었지만 간소한 상임위 외에는 지도부가 없었다. 사회당은 나은 편이었고 제3공화정의 중추이던 급진당(Radical Party)의 개인주의는 장관이었다. 의원 279명, 위원회 476개, 프리메이슨 지부 155개, 신문 255개가 모여 이뤄진 것이 사회당에 앞서 1902년 창당한 급진당이었다. 사회당의 기층은 도(dépatement) 연맹이었다. 지구당이라 하면 간단하겠지만 공천권을 쥔 중앙당이 없는데 지구당이라 호칭하는 것은 이상해서 공식 명칭 그대로 연맹을 쓰기로 한다.
툴루즈 대회에는 254명의 대의원이 77개 도연맹의 위임장을 들고 참석했다. 무슨 도가 그렇게 많아. 자유와 동시에 평등이 사무쳤던 프랑스 혁명은 각 도를 작고 비슷한 크기로 잘랐다. 하지만 그런 연맹에도 실세가 있었겠지? 돈을 많이 내야 당에서도 대접 받을 테니까. 그랬다. 파리와 이 수도를 에워싼 일류 공업지의 센 연맹, 탄광·제철·직물의 북부 노르 연맹이 양대 산맥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지도자급인 쥘 게드나 장 조레스 혹은 이론가 폴 라파르그도 각기 자기 선거구의 도연맹을 대표했을 뿐이다. 한 번만 발언한 이들까지 합치면 도 연맹의 발언자가 73명이었다.

툴루즈의 분란에는 여러 요인이 겹쳤다. 통합당을 만들었다고 해묵은 앙금이 가시지는 않았다. 거기에 합당 후 1906년 총선 결과가 성에 차지 않자 드디어 이론과 감정은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결론은 화합이었다. 이 위기를 넘기려는 당원들의 열망을 하나의 사상 체계로 엮어낸 ‘조레스의 융합론’이 먹혔다.
당은 개혁 노선으로 가지만 끊임없는 개혁으로 어느 날 혁명에 도달하리라는 그의 연설이 이틀에 걸쳐 4시간이 넘자 결국 참석자 326명 중 325표로 조레스의 융합론을 가결했다. 하지만 이런 융합론에 젊은 세대가 감동한 것은 아니다. 30대 법학도이자 노동운동가 라가르델(Hubert Lagardelle 1874-1958)은 정당정치의 허울을 벗겨냈다. 16일 밤 9시 30분, 야간 회의 첫머리에 발언을 시작한 라가르델은 지금의 사회당은 제대로 된 당이라 할 수 없다고, 선거철이면 농민과 인사하고 노동자를 위한다는 모습의 당은 진솔하지 않다고 질타했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그의 말을 하나도 가로막지 않았다. 공격을 당한 조레스도 다 경청하고 연단에 올랐다. 물론 툴루즈 이후에도 당의 분쟁은 그치지 않아 이듬해 생테티엔 대회에서 어느 당원은 간곡히 발언했다. “이러지 맙시다. 우리가 모이고 비용을 잔뜩 들여 피곤하게 대회에 온 것은 매번 개인적인 경쟁심, 파당 싸움을 들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당대회는 1920년 투르 당대회이다. 성탄절인 12월 25일에 시작해서 26, 27, 28, 29, 30일까지 6일간, 370명 당원이 대회를 지켰다. 한 줄씩 열을 지어 앉은 것이 아니라 커다란 테이블을 정연하게 배치하고 당원들이 마주 앉았다. 1차 대전 후 당이 겪은 국내외 정세가 험악해서 대회를 조용히 치르려고 투르까지 내려왔지만, 대회를 마치는 그날 프랑스 사회당은 두 개의 당으로 갈라졌다.
대회장에 남은 젊고 패기 찬 다수파가 새 당 공산당(PCF)을 세웠고, 이럴 수는 없다고 대회장 문을 열고 나간 이들이 사회당을 지켰다. 분당의 핵심 요소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은 역사적 쟁점이지만 그보다 더 울려오는 것은 연단에 섰던 당원들의 피를 토하는 연설 그 자체이다. 세계정세가 아무리 급변해도 우리의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조레스 계열의 레옹 블룸(Léon Blum 1872-1950),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이대로 가면 언제까지나 부르주아 지식인 당을 면치 못한다는 프로사르(L.-O. Frossard 1889-1946), 카생(Marcel Cachin 1869-1958). 두 이념과 두 세력의 대립은 실로 장엄한 정치 무대를 연출해냈다.
새로운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의 집권
하지만 1908년, 1920년이면 너무 옛이야기잖아. 세상이 변하면 당도 변해. 그 당에도 결국은 누가 당권을 쥐는 일이 생겼겠지. 사실 당은 1971년 6월 에피네쉬르세느 대회로 옷을 갈아입었다. 새로운 사회주의 통합이기도 했지만 에피네 대회는 연단의 현수막에 크게 써 붙였다. “삶을 바꾸자(CHANGER LA VIE)”.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의 시구였다. 사회당 노래가 되는 이 가사는 ”지금 여기서 변혁을 부르자“는 후렴구를 거듭한다. 프랑스 사회당의 유명한 로고 장미와 주먹을 채택한 것도 이 대회였다.

이 로고는 조금씩 변형해서 이탈리아, 에스파냐 사회당에서도 차용했다. 에피네 대회는 드디어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1916-1996)을 당서기로 선출했다. 왜 정파 간에 견제와 책략이 없었을까. 그러나 당은 친(親)미테랑, 반(反)미테랑이라는 편의적 용어에 기대지 않고 사상 지향의 길을 가며 10년 후 사회당 단독 집권의 길을 열었다.
프랑스 당대회를 보면서 무척 인상적인 것은 대회가 여기서 열리고 또 저기로 가는 모습이었다. 대회는 돌아다녔다. 이런 방식은 뭇 정당의 관행이었다. 1914년 이전에만도 사회당은 중남부 도자기 생산지 리모주, 동부 국경지대 낭시, 민주파의 아성 툴루즈, 저명한 탄광 도시 생테티엔, 다시 북부 공업지 생캉탱, 실크 도시인 남부 리옹, 대서양 연안의 항만 브레스트, 또 북부 산업기지 아미앵으로 올라갔다. 기차 삯이 어려운 시절에 독일, 영국 할 것 없이 당은 부지런히 곳곳을 순방했다.
대회 순회는 후보들의 선거 유세와 다르다. 빈약한 예산으로 대회를 선전하고 조직하고 행사와 연회를 준비하느라고 직업과 성향이 다른 당원들이 머리를 맞대는 것은 더없는 정치 수련이었다. 2차 인터내셔널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스위스 취리히, 벨기에 브뤼셀,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대의원이 운집했다. 인터내셔널 대회장의 각 테이블 위에는 각국 대의원들이 준비해온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노동, 산업, 사회, 경제에 관한 충실한 리포트였다.
전당대회의 명연설은 왜 기록이 없나
이 글을 준비하면서 못내 의아한 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사정권하에서는 어려웠을지라도 민주화 이후에는 어떤 당이든 당 행사를 낱낱이 기록했을 텐데 그 전당대회 속기록은 어디에 숨어 있기에 안 나오는 것일까(필자가 모를 수 있지만). 지금은 영상기록의 시대라 해도 당대회는 화합의 축제만이 아니다. 모든 발언은 문헌으로 남아야 한다. 100년도 더 전의 먼 나라 당대회를 지금 여기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돈이라고는 없는 그 당이 비용이 무척 드는 완본 속기록을 반드시 제작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왜? 당이나 외곽 단체나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회계는 투명하고 말은 진솔해야 한다는 것을.
이념의 이름 아래 고착된 이 무거운 지정학적 분단 아래서 우리 정치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민주의 피가 흘렀다. 바로 작년에도 전당대회가 열렸고 이제 또 열리는데 2020년대 한국의 전당대회는 보란 듯 자신을 문자로 기록하여 선대에 헌정하고 후대에 자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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