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경
프랑스 정치사학자 칼럼니스트
노서경은 서울대 인문대 서양사학과에서 1999년에 프랑스 하원의원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장 조레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했다. 이 논문이 발판이 되어 2022년 <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를 간행했다. 그에 앞서 2017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해방전쟁(1954-1962)을 소재로 <알제리전쟁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을 출간했다. 1969년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일보 외신부에서 6년간 기자로 근무했다.
노서경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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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알제리전쟁③ 왜 독립후 혼란이 더 컸을까
1962년 3월 18일 스위스 접경지대인 소도시 에비앙의 호텔 파크 앞에 헬리콥터 한 대가 내렸다. 보안의 위험 탓에 스위스 군에서 제공한 헬기에서 내린 이들은 알제리임정대표단이었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역사적 6인’에 드는 크림 벨카셈을 단장으로 알제리 임정의 외교 장관 사드 달라브, 대변인 레다 말렉 등 6인이었다. 대표단은 어려운 협상을 이끌었던 드골의 심복 루이 족스 및 프랑스 대표들과 함께 93매의 협정 전문에 조인하고 회의장을 곧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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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알제리전쟁② 민족의 독립이 무슨 의미냐고
알제리전쟁의 역사적 결과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민족군 병사, 지휘관, 수뇌부, 그리고 병영 밖의 정치지도자들이었다. 민족군은 스스로 엄했다. 1954년 11월 전쟁 선포 후 1955년 내내, 1956년까지도 이 전쟁을 테러리스트의 준동으로 넘기지 않고 피식민인의 항쟁으로 끌고 간 것은 산악의 농민군이었다. 여기에 정치사상이 경직되지 않았다. 그 때 수감 중이라 ‘역사적 6인’에 들지 못했지만 곧 이 전쟁의 두뇌가 되는 아반 람단(1920~1957)은 원대하고 전략적·현실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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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알제리전쟁① 어떻게 프랑스를 이겼나
지난 7월 5일은 알제리 독립기념일이었다. 1962년 일이니 올해로 61주년, 유럽과 마주한 지중해안의 수도 알제, 이베리아 반도에서 곧 닿는 서부 오랑, 중부 산악 카빌의 작은 문화도시 티지우주, 모두 축제를 벌이고 정부는 국경일을 기념하여 주택난을 겪고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 아파트를 보급했다. 하지만 우선 여러분은 알제리라면 어떤 인상이 있고 어떤 면을 존중하고 있을지? 이른바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알제리인민민주공화국의 경제지표는 아직 낮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가난하면 상대적으로 그 사람이나 그 사회의 인격이 낮은 것일까. 이 글은 이에 ‘아니오’라고 답하려 한다. 1950년대 식민지 해방의 상징이었던 알제리전쟁(1954~1962)이 이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이 전쟁은 알제리전쟁, 알제리혁명, 알제리독립전쟁의 세 이름을 갖는다. 이 글에서 알제리전쟁이라 칭하는 것은 이 전쟁의 세계사적 의미가 이 한마디로 살아난다고 보이기 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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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불굴의 우애’를 다짐하라
피에르 브로솔레트(Pierre Brossolette 1905-1944)의 이름을 아시는지? 그가 파리의 나치 게슈타포 건물 4층에서 손이 뒤로 묶인 채 창문을 열고 투신하여 죽은 것을 들으셨는지. 때는 나치의 프랑스 점령이 최종 국면에 접어든 1944년 3월이었다. 나치 친위대(SS) 소속 첩보부의 심문과 고문 중에도 그는 점심시간이라 간수가 잠깐 쉬는 틈을 타 죽음으로 정보의 유출을 막았다. 고문은 인간 의지를 얼마든지 비웃고 유린하기에 이 상황에 대처할 방법은 죽음뿐이었던 이 장한 고등사범(ENS) 지식인, 사회주의자, 대독항쟁의 지도자. 그가 죽은 3월 22일은 앞으로 석 달 후면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고 다시 두 달 지나 8월에는 파리 해방의 날이 찾아 올 것이지만, 미래는 현재를 살리지 못한다. 현재는 보이지 않는 빛을 따라 묵묵히 종군할 뿐이라 브로솔레트 그는 그 고문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이름 하나 밖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1940년 말 초기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후 프랑스 국내의 흩어진 항쟁을 드골 휘하로 수렴하기 위해 런던에서 프랑스로 잠입했고 다시 남쪽 나르본에서 런던으로 떠났던, 그의 뇌리에 박힌 정보는 나치에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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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논쟁 가득했던 1910년대 프랑스 사회당 전당대회
그때 그 당은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를 뽑지 않았다. 당은 처음부터 1인의 지도자라는 개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무슨 당이 그래? 그 당은 1905년, 개혁파와 혁명파와 또 다른 당파들이 어지간히 싸운 끝에, 그것도 외부 세력인 인터내셔널(The Second International)의 압력을 받아 어렵사리 통합한 프랑스 사회당(SFIO)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심란했을까. 누가 확실히 당을 이끌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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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어떤가요? 그댄’...대한민국 의회와 정치인은
대한민국 입법부의 이름은 국회이다. 한자로는 國會, 그러면 나라 국, 그 글자가 국가인지 국민인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의문은 곧 풀린다. 우리나라 국회는 영어로는 내셔널 어셈블리(National Assembly), 국민의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로 내셔널 어셈블리라면 1948년 제헌의회 그때 국민의회라고 못 박지 왜 국회라고만 했을까 싶지만 이 문제는 서양사 연구자로서는 알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