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우애’를 다짐하라

[어느 프랑스 공화정 연구자의 목소리] 독일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레지스탕스 희생자들을 추모한 뜨거운 ‘우애의 다짐’ “대일 굴욕외교” 주장도 식민지 잔재 아닐까 우리의 ‘불굴의 우애’ 다짐은 어디에 있는가

1945년 12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조국 독립을 맞아 환국했다.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다. 1, 2진으로 나눠 귀국했는데 이 사진은 2진으로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다. 첫째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둘째줄 왼쪽부터 류진동,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붕준, 유동열, 김원봉, 최동오.
1945년 12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조국 독립을 맞아 환국했다. 미 군정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다. 1, 2진으로 나눠 귀국했는데 이 사진은 2진으로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다. 첫째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둘째줄 왼쪽부터 류진동,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붕준, 유동열, 김원봉, 최동오.

어느 레지스탕스의 죽음

피에르 브로솔레트(Pierre Brossolette 1905-1944)의 이름을 아시는지? 그가 파리의 나치 게슈타포 건물 4층에서 손이 뒤로 묶인 채 창문을 열고 투신하여 죽은 것을 들으셨는지.

때는 나치의 프랑스 점령이 최종 국면에 접어든 1944년 3월이었다. 나치 친위대(SS) 소속 첩보부의 심문과 고문 중에도 그는 점심시간이라 간수가 잠깐 쉬는 틈을 타 죽음으로 정보의 유출을 막았다. 고문은 인간 의지를 얼마든지 비웃고 유린하기에 이 상황에 대처할 방법은 죽음뿐이었던 이 장한 고등사범(ENS) 지식인, 사회주의자, 대독항쟁의 지도자. 그가 죽은 3월 22일은 앞으로 석 달 후면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고 다시 두 달 지나 8월에는 파리 해방의 날이 찾아 올 것이지만, 미래는 현재를 살리지 못한다. 현재는 보이지 않는 빛을 따라 묵묵히 종군할 뿐이라 브로솔레트 그는 그 고문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이름 하나 밖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1940년 말 초기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후 프랑스 국내의 흩어진 항쟁을 드골 휘하로 수렴하기 위해 런던에서 프랑스로 잠입했고 다시 남쪽 나르본에서 런던으로 떠났던, 그의 뇌리에 박힌 정보는 나치에 필수적이었다.

브로솔레트를 그렇게 보내고 프랑스는 그를 잊지 않았다. 그가 런던을 향해 비밀리에 출항한 나로본 해안에 명패를 세웠다. 파리 자택이 있던 그르넬 거리, 파리 외곽 아지트였던 고서점 거리, 그의 출생지인 미셀앙주 거리, 라디오 회관, 소세 거리의 내무부 안에 있는 명예의 정원, 또 팡테옹 바닥에 그의 명패를 놓았다.

2015년 5월 15일에는 유해의 팡테옹 이장이 그의 가족과 나르본 재향군인들의 도열 아래 이뤄졌다. 19세 여학생으로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드골의 사촌 주느비에브 드골, 나치 수용소에서 생존한 여성 인류학자 제르멘 티용, 인민전선(Front Populaire)의 교육부장관 장 제의 유해와 함께. 레지스탕스 추모는 이 같은 공식 행사 아니라도 소리 없이 표시되어, 파리 거리 모퉁이들에는 ‘여기서 레지스탕스 대원이 살해되다’라는 작은 팻말이 보인다. 윌름 거리 고등사범학교의 낡은 강의실에도 ‘레지스탕스’는 걸려 있다.

1944년 8월 프랑스 퀼레뵈프 마을에 도착한 영국군을 현지 프랑스 레지스탕스 전사들이 총을 머리 위로 흔들며 환영하고 있다. 사진출처=위키커먼스
1944년 8월 프랑스 퀼레뵈프 마을에 도착한 영국군을 현지 프랑스 레지스탕스 전사들이 총을 머리 위로 흔들며 환영하고 있다. 사진출처=위키커먼스

앙드레 말로의 ‘장 물랭’ 추모사

스페인 내전의 『희망』을 쓰고 중국 혁명을 『인간의 조건』에 그린 프랑스의 대작가 앙드레 말로는 1964년 12월 19일 파리 길거리에 섰다. 팡테옹 바로 앞이었고 장문의 추도사를 낭독하기 위해서였다. 레지스탕스의 거장 장 물랭(Jean Moulin 1899-1943)에게 보내는 추도사였지만 전율하는 말로의 목소리는 살아 있는 파리인들, 소르본 학생들이 듣고 있었다.

장 물랭은 1943년 1월 21일 항독대원 회의를 위해 갔던 리옹 교외에서 어느 내부자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파리로 이송되고 게슈타포에게 심문받고 이미 거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보내라는 나치의 지시에 열차에 실려 가던 중 동부 메스 부근에서 완전히 숨졌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장 물랭의 행적에 의문도 제기하지만 프랑스 밖에서는 드골, 프랑스 안에서는 장 물랭이 대독 항쟁을 이끌었던 것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말로가 헌정하는 추도사의 한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독일 기관총의 위협 속에서 농민들이 주검을 지고 묘지에 닿으면 산 저 위에서 아래까지 꼼짝 않고 이 주검을 지켜보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인들은 (레지스탕스의) 산악 전투원들을 죽였고 이 마키들의 시신을 새벽녘에 비밀리에 매장하도록 시청에 명령했습니다. 코레즈 이 고장에서는 마을에 장례가 있게 되면 여자는 모두 산에 올라 자신의 가족 묘지에 기립하여 참례하는 관습이 내려왔습니다. 알자스인이었던 이 주검들을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바다처럼 드리운 밤은 상복 입은 여인들을 나타나게 했고 침묵 속 여인들은 모두 자기 가족 묘지에 서서 프랑스의 주검이 매장되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전설적인 우애의 감정 없이는 레지스탕스는 결코 존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아마도 그 불굴의 우애의 다짐일 뿐입니다.”

겨울 추위가 매섭던 1964년 12월19일 팡테옹 신전 앞에서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장 물랭을 향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AFP
겨울 추위가 매섭던 1964년 12월19일 팡테옹 신전 앞에서 앙드레 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장 물랭을 향한 추도사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AFP

내일을 향해 나아가다

이탈리아, 유고, 유럽 일대의 레지스탕스와 비교하면 프랑스는 세지 않았다고 말하는 프랑스 역사가는 차분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랬듯이 프랑스에도 어리고 젊은 나이의 저항대원들이 많았다. 16세, 18세, 21세. 수감되고 심문 받았다. 처형 선고를 받는 재판정에서는 웃었다. 감옥에서는 시를 썼다. 편지도 남겼다(이용우, 『총살된 프랑스, 남겨진 편지』). 이런 대독항쟁을 겪고 파리 해방 전에 시작된 부역자에 대한 응징과 보복의 감정적 분출이 법정과 재판으로 모두 진정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일이 중요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난관 속에서도 새 관계의 이정표를 세워갔다. 프랑스-독일만이 아니라 유럽의 이름으로. 다시 말해 지금의 유럽연합(EU)의 기초에는 ‘유럽연맹’이 있고 이 기구의 발족은 2차 대전이 끝나자 모색되어 1951년에 성립된 ‘석탄과 철 유럽공동체’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전쟁의 발발에 곧 추진된 서독 재무장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대가 컸지만 프랑스의 로베르 슈만, 장 모네와 독일의 아데나워, 할슈타인은 유럽의 이름으로 양국 새 관계 구축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에서는 조용히 다음 세대를 위한 역사 작업에 부심했다. 적대감 속에서도 독일-프랑스 두 나라 역사 교사와 학자들은 긴 시간 여러 차례 협의하여 반감과 경계의 지속으로 갈등을 타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 사실 1870년 9월 2일 ‘스당의 항복’ 그날 승자 비스마르크와 패자 나폴레옹 3세는 전투지에서 한 자리에 앉았다. 더구나 거대한 파괴를 부른 2차 대전은 사람들을 가르쳤고 돌이킬 수 없는 유럽의 형세를 보게 했다.

‘아리랑’의 김산이 지키려던 것은

이제 시선을 돌리면, 님 웨일즈는 일본은 한국인들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단정했다(Nym Wales, “Rebel Korea,” 1942). 기록을 남긴 독립운동가들의 언저리에는 기록 없는 ‘코레즈의 여인들’이 수도 없던 것이다. 해외의 항쟁자도 많았으니 만주 벌판 여성들은 어땠을까. 그 많은 항쟁은 분개심으로 단련되지 않았다. 님 웨일즈가 그린 『아리랑』의 김산은 혁명 중국의 험한 대장정 속에서도 영자 신문, 영문 책을 찾아 읽었다. 이동 도서실이 유랑 장정의 필수 시설이었기 때문에 문건을 구할 수 있었고 독서카드를 비치했기 때문에 이렇게 영문 책을 돌려주고 또 빌려가는 사람이 김산(장지락)이라는 이름의 코리언이라는 것을 님 웨일즈가 알았다.

그렇다면 김산이, 서대문 형무소의 정치범들이, 해외 항쟁군이 남긴 것은 “아픈” 과거가 아니다. 고결한 역사이다. 방송인이든 정치인이든 “아프다”는 말을 연신 되뇌려면 진짜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고통에 내 몸이 아파서, 밤이면 그들의 몰골이 떠올라, 그 감방의 처참한 조건에 잠들지 못해야 한다. 그런가.

정부 정책을 비판할 수 있다. 정말 필요하면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굴욕외교”라는 말은 자기 부정의 마스크이다. 국제관계, 힘의 현실을 사려한 정치철학의 언어가 아니다. 나라를 여기까지 밭갈이한 생산자, 기업인, 지식인, 무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불굴의 우애’를 다짐하지 못한다. 치열함도 격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쉽게 나오는가.

식민주의가 남긴 ‘부정의 유산’ 때문일 것이다. 파농(Frantz Fanon)이 아니라도 식민지 문제를 연구한 모든 이는 알고 있다. 자기 부정, 자기 비하야말로 식민지배가 물러난 지 한참 되었어도 도무지 물러가려 하지 않는 음험한 식민지 잔재라는 것을.

‘불굴의 우애’를 키우리라

많이 망설인 이 글을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15년 가을 시간강사 마지막 학기에 만났던 한 여학생의 말이 잊히지 않아서다. 그 해에 1학년이었던 그는 화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나라는 반공반일만 있지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가 없어요.”

나는 답변하고 싶었다. “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려 했고 만들고 있잖아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사회적인 성분을 섞으면서.”, “이건 이상도 이론도 아니죠. 민주주의는 애초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싸우며 키운 작품이니 국면에 따라 성분의 비율이 다를 뿐이잖아.”

그러나 그런 말이 소리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 젊은이가 그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 진정 어디로 가려는 나라이냐가 그의 질문이자, 실망이자, 모색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 약속하고 또 약속받고 싶은 사항은 한 가지이다.

“아픈 과거”, “친일 반일”, “굴욕외교”의 늪에서 빠져 나와 유관순과 동지들의 작은 동상을 여기저기 세우리라. 식민지 형무소의 조건을 세계의 식민지 감옥들과 비교하여 정확히 파악하리라. 학교와 시민회관 이름에 신채호, 윤봉길, 김좌진, 이동휘, 여운형을 여기저기 붙이리라. 광화문에 단아한 조선어학회 표식을 세우고 그들 한글학자 이름을 사람들이 친구처럼 말하게 하리라. 시베리아와 만주 땅에서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을 외면하지 않고 모두 예우하리라. 해방 후 돌아왔어도 숨죽였던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차근차근 돌아보리라. 안중근 이름을 부산 광주 인천 전주 대구 어디를 가나 거리에 새겨 새 세대의 자부심을 일구리라. 그리고 이 지정학적 조건을, 국제 현실을 무섭게 투시하고 옷깃을 여미며 내일의 세대에게 냉정과 이성의 실적을 물려주리라. 외교의 실력이 아직 많이 미흡하면, 그래서 불안하고 두려우면 경제와 도덕과 지성의 사회적 역량을 키워가며 기나긴, 허물어지지 않는 성벽을 쌓으리라.

글쓴이

노서경 프랑스 정치사학자 칼럼니스트

노서경은 서울대 인문대 서양사학과에서 1999년에 프랑스 하원의원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장 조레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했다. 이 논문이 발판이 되어 2022년 <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를 간행했다. 그에 앞서 2017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해방전쟁(1954-1962)을 소재로 <알제리전쟁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을 출간했다. 1969년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일보 외신부에서 6년간 기자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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