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전쟁② 민족의 독립이 무슨 의미냐고
[어느 프랑스 공화정 연구자의 목소리] 식민체제에서 독립 쟁취한 FLN과 영웅들 카스바 전투에 끝까지 저항한 여성 전사 사르트르 등 프 지식인들 지원도 큰 힘 독립군이 염원한 ‘민주적·평등의 나라’
흥미진진했던 ①에 이어서
알제리전쟁의 역사적 결과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민족군 병사, 지휘관, 수뇌부, 그리고 병영 밖의 정치지도자들이었다. 민족군은 스스로 엄했다. 1954년 11월 전쟁 선포 후 1955년 내내, 1956년까지도 이 전쟁을 테러리스트의 준동으로 넘기지 않고 피식민인의 항쟁으로 끌고 간 것은 산악의 농민군이었다. 여기에 정치사상이 경직되지 않았다. 그 때 수감 중이라 ‘역사적 6인’에 들지 못했지만 곧 이 전쟁의 두뇌가 되는 아반 람단(1920~1957)은 원대하고 전략적·현실적이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의 영웅들
아반은 이 전쟁은 혁명의 전쟁이며 혁명은 온 인민이 함께 한다고 선언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프랑스 감옥을 전전하며 감옥 도서관에서 아일랜드의 대영 투쟁, 호치민의 민족주의, 쿠바의 혁명사를 섭렵한 그는, 초기에는 알제리인도 반신반의하는 이 전쟁에 온 인민을 끌어들였다. 식민치하 알제리의 가난하고 ‘무식’한 (1945년 알제리 남성의 85%가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여성의 무학은 더 많았다) 인민을 믿었다. 그리고 1930년대 내내 이슬람 부활로 알제리 민중의 정신을 깨운 이슬람 지도자의 감화력을, 또 소수 지식인의 무기인 ‘펜’의 힘을 믿었다.
마르티니크 출신의 프란츠 파농(1925~1961)을 이 전쟁에 부른 사람도 아반 람단이었다. 파리 하원에 나간 페르하트 압바스와 알제 시내에서 비밀리에 회동했다. FLN은 많이 망설였으나 여성도 전쟁에 편입했다. 영화 〈알제리전투〉는 미로 같은 알제 언덕 카스바에서 프랑스 군인들의 검문을 뚫고 유유히 시내로 잠입하는 테러리스트 여성들, 카스바 최후의 전투에서 항복하지 않는 FLN 여성 대원 ‘하시바’를 보여준다.
1956년 8월 13일, 민족군의 지휘관이 총집합하는 숨맘대회가 열렸다. 아반 람단, 라르비 벤미히디(1923~1957)가 기획하고 군인들이 엄호하며 카빌의 산속 너른 민가에서 1주일간 진행된 FLN 대회였다. 여느 평상적인 국가라면 연단도 차리고 화환과 깃발로 사방을 장식한 사진도 남았겠지만 숨맘대회의 흔적은 없다. 비밀이 생명이었다. 다만 대회장 옆방에서 보안 속에 강령과 결의안, 주요한 발언은 타자기로 쳤다.

‘독립’ 알제리의 두가지 원칙
숨맘대회는 군사적 편제도 확정하고 군사와 정치의 의결 기구도 정했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하나는 ‘정치가 군사보다 우위’라는 것, 하나는 ‘국내가 국외보다 우위’라는 원칙이었다. 국가의 근간이 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이집트 같은 국외의 세력이 개입했고, 전쟁이니 군사가 최우선인 판에 이 원칙이 지켜질 수 있었을까. 에비앙 협정 조인 후 알제리에 밀려들어오는 군대는 국내군이 아니라 동부에서 오는 신식부대(이집트의 지원을는 부대)였다.
전쟁 동안 민족군이 관할해야 할 땅덩이는 넓었다. 알제리의 면적은 세계 10위,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크고 이슬람권에서도 그렇다. 민족군 수뇌부는 전쟁 구역을 6개로 나누었다. 윌라야로 불렸다. 제1과 제2 윌라야는 삼림이 깊은 동북부, 제3은 카빌, 중앙의 알제는 제4 윌라야, 오랑과 틀렘센의 서부가 제5 윌라야, 그리고 남부 사막 전체가 제6 윌라야였다. 그런데 제7 윌라야가 필요했다. 어디였을까? 프랑스였다.
FLN이 프랑스인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한 바는 없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 알제리인과 알제리인이 폭력적으로 대립했다. 왜? FLN 전쟁자금의 출처는 거의 프랑스에 와 있는 알제리인 노동자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알제리인이 한 마음 한 뜻으로 FLN을 돕기만 했을까. 사정은 착잡하여 프랑스에 온 이민노동자들은 본의 아니게 3개 파로 갈렸다. 우선 FLN을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FLN에 반대한 민중당 당수 메살리 하즈(1898~1974)파가 온존했다. 그리고 프랑스 군부대에서 고용한 이른바 하르키(Harki), 즉 프랑스 군부대의 보조군인과 프랑스 경찰의 보조경찰이었다. 많은 경우 동부 산악에서나 파리 13구에서나 알제리인을 검거하고 고문하는 이들은 알제리인이었다.
식민지 민중들은 기품이 있었다
라르비 벤미히디를 먼저 보내고 아반 람단마저 사라졌다. 두 사람 모두 군사가 아니라 정치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신념이 뚜렷했다. 독실한 신앙인이던 벤미히디 역시 전쟁의 히어로는 인민이라고 확신했다. 알제 자치구의 총지휘자 벤미히디는 1957년 1월 알제전투가 개시된 후 2월 23일에 검거되었다.
워낙 거물이 잡혀 기자들이 모였고 조사를 받으러 공수부대 문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살짝 미소 짓는다. 그를 신문한 프랑스 군 장교는 후에 그를 대하고 “우리가 졌다는 것을 알았다”고 토로한다. “나를 우리 동지들과 똑같이 취급하라”는 것이 벤미히디의 요구였다. 그는 3월 5일에서 7일 사이에 약식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미소와 그 기품이 벤미히디만의 것이었을까.
식민지 민중은 기품이 있었다. 1957년 1월 알제리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는 것을 앞두고, 인민은 영웅이라는 벽보가 알제 담벼락에 붙었다. 프랑스 군의 평정화 수용소에 들어간 알제리 여성들은 늙은 부모와 어린 아이들을 챙겼다. FLN의 연락책으로 검거된 여성들은 알제 바르바로사와 프랑스 여러 감옥을 전전하며 식민 세력을 개탄하고 울부짖지 않았다. 침착했다. 도시의 배운 여성들은 산에서 온 무학의 여성들을 만나 책을 같이 읽고 연극을 공연했다. FLN (남성)대원의 처형이 있는 날에는 다같이 소리 높여 ‘알제리’를 외쳤다.
남녀 FLN 수감자들을 도운 것은 많은 경우 프랑스인 변호사들이었다. FLN은 전쟁 이전 민족주의자들의 투옥과 재판 경험으로 전쟁 초기에 알제리인과 프랑스인 (벨기에 변호사도 들어갔다) 공동변호인단을 꾸렸으며 이들은 때로는 암살 위험도 무릅썼다. 프랑스 공산당(PCF) 소속의 젊은 변호사들이 많았고, 지젤 할리미 같은 여성 변호사들도 크게 활동했다.
변호사의 혜택을 볼 수 있던 수감자들은 일부였다. 그러나 프랑스 서부 캉의 자밀라 부파차 법정에서는 프랑스인 판사가 피고가 당한 사건의 진실을 캐내기 위해 6시간을 쉬지 않고 하나하나 질문했다. 변호사들은 항공비, 숙박비, 활동비 모두 한 푼을 아끼고 한 푼을 기록했다. 당이나 변호사들이나 저항적 운동은 돈이 깨끗해야 인정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한편 아무리 대의를 좇아 행동했어도 FLN 대원들은 감옥에서는 외롭고 두려웠다. 알제리인 수감자들이 프랑스인 변호사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진정이었다.
프랑스의 자괴감...”우리가 고문을 하다니”
그러면 이 전쟁을 보는 당시 프랑스의 여론은 어떠했을까? 측정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전쟁 지지가 대세였던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후 이제 겨우 10년. 전쟁 동원이 인기가 없었다. 여기에 식민지 전쟁을 비판하는 세력이 점점 지지를 얻었다. 작가와 출판사와 신문과 주간지 그리고 일부 가톨릭 교회가 식민지 전쟁 반대 입장을 명시했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식민주의는 체계’라고 선언했고 그와 함께 일했던 다른 철학자 프랑시스 장송은 아예 FLN으로 보내는 프랑스 내 알제리 노동자들의 전쟁 자금을 부대에 넣어 샹젤리제 은행에서 송금했다.
장송은 카페에 앉아 말로만 알제리 사태를 규탄하고 자신은 편히 살아가는 지식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터뷰를 하거나 회고담을 쓰거나 한 일이 없다. 자신도 괴로웠던 사건에 침묵을 지켰다. 이 장송의 조직에 가담한 이들은 수 십 년이 지나서도 FLN 요원들의 숙박, 위조 서류, 연락, 이동을 맡았던 자신들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식민지배의 나라 프랑스를 위하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행동이었다. 서로 모르는 인쇄공, 여대생, 음악인, 코미디언 같은 장송의 대원들은 1960년 9월 재판을 받았다. 먼 데 있던 사르트르가 법정으로 편지를 보내 장송을 성원했다.
애초에 프랑스 지식인들을 흔들어 놓은 것은 저기 알제리에서 그 나치가 했던 수법인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차 대전 시기 비시정부의 성격과 전후 처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전후 프랑스에서 하나의 사항에는 누구도 이론이 없었다. 어떤 이유로도 ‘인간은 인간에게 고문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알제리에서 지금 프랑스 군에 의해 고문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쳤다.
프랑스 공수부대에서 고문 받은 앙리 알렉의 증언 기록인 『고문』(La question)이 출간되자 프랑스와 이웃 스위스, 서독, 이탈리아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공수부대에 잡혀 ‘고문으로 사망한’ 젊은 수학자 모리스 오댕의 죽음에 비달-나케 같은 역사가가 나섰고 오댕위원회는 수없이 많은 편지를 전국에 보내 사건을 알렸다. 나중에 알제리는 시내 알제 대학 터널 앞 거리를 모리스 오댕 광장으로 명명한다. 철학자이며 사르트르의 동반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FLN 여성 요원 자밀라 부파차의 사건을 알리기 위해 연단에 섰다.

독립이, 종전이 무슨 의미냐고?
전쟁과 폭력은 무슬림 알제리인들을 겁주지 않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무기는 소진되고 프랑스군의 화력은 상대할 수 없고 민족군 내부의 숙청은 가혹했지만 사람들은 혼란 속에 희망을 보았다. 전쟁 동안 인구도 부쩍 늘었다. 파리와 해외에서 들어오는 신문들이 알제 시내 가판대에 쌓였다. 카빌 시골에도 신문은 어김없이 도착했다. 『르몽드』, 『롭세르바퇴르』, 가톨릭신문이 알제리전쟁을 속속들이 보도하고 미국 『뉴욕타임즈』 같은 신문의 특파원들이 상주하면서 알제는 세계적 도시가 되어 갔다.
전쟁은 오히려 알제리인 부모들에게 자식을 교육시켜야만 한다는 영감을 주었다. 딸들도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유학생들이 전쟁 전보다 늘었다. 프랑스에 유학와 있던 학생들이 총동맹을 결성하고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하체계가 아닌 학생들만이 자부할 수 있는 자주적인 항쟁을 원했다. 학생들은 이 모든 역사를 넘기고 이런 때일수록 원자력, 수력학, 법학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FLN 자금으로 해외 유학도 가능했다. 한편에서는 나라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학위증 하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민족군의 산으로 올라갔다.
파리 학생조직인 총동맹의 핵심에는 놀라운 필치로 창단 정관을 작성했던 법대생 벤야히야가 있었고, 총동맹 이름에 반드시 M자를 넣어 무슬림(Muslim) 알제리의 인격을 복원하고 쇄신하려 했던 사아드 달라브가 있었고 다른 동료에게 3시간짜리 일을 지시하면 자신은 10시간 일을 하던 압드셀람이 있었다. 그들의 염원은 깊었다. 이 전쟁을 끝내면 민주적이고 사회 전체를 생각하고 평등을 잊지 않는 새 나라를 만들리라. 언젠가 이어질 ③편을 기대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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