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차별, 정신질환자의 비자발적 입원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정신질환자의 사법입원, 정당성 있을까 ‘국가의 보호’ 아닌 잠재적 범죄자 대하듯 ‘잠재적 위험성’만으로 ‘신체의 자유’ 제한해 인권침해 가능성 크고 ‘낙인과 차별’일 수도
정신건강의학 치료력은 공개해도 되는 사회
“묻지마 범죄”에 대한 보도에는 대개 범인의 과거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력이 등장한다. 치료력은 보호받아야 하는 개인정보임에도 그렇다. 그런데 기사에 범인의 치과 치료력이 등장하는 경우는 없다. 정신질환 치료력은 비합리적이고 엽기적 범죄와 연관 있으리라는 암묵적인, 어떤 경우에는 명시적인,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범인의 개인정보 공개는 공익을 위해 사회적 위험요인을 알리는 것이 된다.
최근 일련의 ‘묻지마’ 범죄들이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정신의학계는 자발적 입원을 거부하는 일부 환자에게 사법입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정신건강복지법 아래서 비자발적 입원이 적법화되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 직계가족의 동의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진단이 필요하다. 이렇게 입원이 되면 정부기관에 보고되고, 국가는 입원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심사를 하게 된다.
인권을 보호한다는 취지는 훌륭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가족과 연락이 안되어서 긴급한 치료가 필요한 환자의 입원이 지연되는 등의 혼란이 흔히 벌어지고 있으며, 입원이 필요하다고 진단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형사적 책임을 져야 되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런 사태에 대한 해법으로 비자발적 입원을 국가가 결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법입원의 취지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법입원 제도가 실행되고 있다. 비자발적 입원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므로 의료인이나 가족의 판단이 아닌 법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환자의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논리
물론 모든 입원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입원은 치료진과 환자 사이의 계약을 따르는 것이고, 그 계약에는 치료과정에서 자신의 신체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환자가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사법입원은 이런 동의에 의한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 합법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도구다.
그러나 의학적 판단은 환자의 치료 필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비해, 사법적 판단은 환자의 위험성 또는 사회의 안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가능성이 있다.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법적-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1) 위해(危害) 원리: 한 사람의 자율적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위해가 되는 경우 그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형법이 이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2) 공리주의(公理主義): 한 사람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시민사회 전체가 얻는 이익이 그 제한의 비용보다 많이 큰 경우, 한 사람을 제한하는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현하는 길이다. 물론 제한 받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보상이 필요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 적용되었던 원리다. 내가 마스크를 쓰거나 자가 격리하면 다른 사람들이 감염당할 위험이 적어지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마스크와 자가 격리 의무는 윤리적 정당성을 갖게 된다. 외부에서 온 사람을 40일간 격리하던 조치(quarantine)는 오래된 역사적 전통이었다.
(3) 부권주의(父權主義, paternalism): 전통 가족에서 아버지(pater)가 가족을 보호하는 의무를 가지고 가족 전체를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 또는 그 대리인이 아버지가 되어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잘 모르는 자녀(시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결정해 주는 것이다. 부권주의는 ‘강제’와 ‘선의’라는 두 요소를 갖는다. 선의는 부권이 자신이 아닌 자녀의 이익을 위해 판단한다는 점이고, 강제는 부권의 결정대로 자녀가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부권주의를 통상적으로 국가의 온정주의(溫情主義)라고 부르는데, 강제라는 의미가 많이 희석된 용어다.
그러나 부권주의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예컨대 철학자 칸트는 선(善)이라도 그것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떤 가정과 정부도 구성원들에게 부권주의적 조치를 하지 않는 곳은 없을 것이다. 부모는 게임에 빠져 있는 미성년 자녀를 통제하고, 자녀 관련 법적 문서에 대신 서명한다. 국가는 시민들을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시키고, 주류 구입 연령을 통제한다. 의학적 관점에서 정신질환자에 대한 비자발적 입원은 병을 치료함으로써 환자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부권주의적 조치로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법입원은 부권주의보다는 ‘형법적 사고’
의학적 지식은 매우 전문적이기 때문에 환자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잘 모른다. 따라서 의료 문제는 부권주의적 개입이 흔히 적용되는 분야다. 특히 일부 정신질환에서는 병의 증상 때문에 환자가 치료받음으로써 자신의 복지가 증진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경우 비자발적 입원을 하였더라도 치료를 통해 병식(病識)을 회복하면, 부권주의적 조치가 자신에게 최선이었음을 환자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법의 관점은 의학적 관점과 다르다. 또한 법관은 의학적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내릴 전문성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려는 최근 분위기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법입원은 환자의 복지 보다는 사회의 안전을 위해 비자발적 입원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형법에 의거해 범죄자를 수감하는 것과 같은 조치가 정신질환자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주장이 된다. 더구나 실제 행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병력 또는 행위할 위험성 때문에 격리하거나 감시한다는 것은 부권주의는 물론 위해원리와도 윤리적 차원이 다르다.
정신질환자를 감금해온 인류의 역사
인류 역사의 많은 시기, 특정 집단을 격리하는 조치가 이어져 왔다. 유럽사를 보면, 중세에는 한센병(나병) 환자를 격리하였다. 중세말-르네상스를 거쳐서는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마녀재판(witch trial)이 이루어져서 격리를 넘어 이들의 생명까지 빼앗아 왔다. 근대로 넘어온 17-18세기, 정신질환자는 부랑인, 신성모독자 등 다른 사회부적응자와 함께 종합병원(Hôpital Général)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인문학자 미셸 푸꼬는 이 시기에 대해, 정신질환은 질병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함”이라는 도덕적 현상으로 파악하였고 수용소는 치료기관이라기 보다는 부르주아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부도덕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기구였다는 주장을 하였다. 대표적인 수용소 살뻬뜨리에의 원장이었던 유명한 신경의학자 샤르코는 병을 치료하는 역할보다는 수용소의 행정책임자 역할을 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특정 집단을 배제하고 낙인(烙印) 찍는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치는 유태인을 배제하였고, 몇몇 정부가 올림픽 등 국제행사를 앞두고 개최 도시의 부랑인들을 쫓아내거나 수용하는 사례들도 있었으며,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과 혐오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과 배제도 오늘날까지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
음주운전자를 격리하면 안되는 이유처럼
그런데 잠재적 위험성 때문에 비자발적 격리가 정당화 된다면, 정신질환보다 잠재적 위험성이 훨씬 큰 음주운전자에게도 이를 적용시켜야 한다는 논의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 구성원의 다수는 이것을 인권침해라고 볼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질환자의 비자발적 입원만은 인권침해라는 생각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 및 차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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