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 ‘서울의 봄’이 불편한가

[헌법학자가 본 ‘서울의 봄’] ‘공권력 사유화’ 비판이 불편한가? 군사반란과 쿠데타의 악순환을 원하나? 진영을 넘어 정당성을 공존의 토대로 삼아야

1996년 8월 전두환과 노태우는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받았고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8개월뒤 1997년 12월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합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1996년 8월 전두환과 노태우는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받았고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8개월뒤 1997년 12월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합의해 전두환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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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을 불온시하는 비뚤어진 시각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1000만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정도로 세간의 화제가 되니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평가와 분석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토록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낸 영화의 힘에 대해 숙고할 가치는 충분하니까.

그런데 “좌편향 역사 왜곡 영화”로 단정하고 학생들의 단체관람 반대운동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심박수가 급상승하는 걸 체감한다. 민주주의 역사 교육의 소재로 흥행하고 있는 영화를 관람하는게 문제라면 도대체 무슨 자료로 시민교육을 할 수 있을까? 평소 민주시민교육을 불온시해온 편협한 관점에서 ‘서울의 봄’의 흥행성공이 어떤 불편함을 주었을까? 어쩌면 우리나라의 주류를 자처하는 보수의 진면목을 ‘서울의 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공한 군사반란을 다루면서도 민주화의 서곡을 상징했던 ‘서울의 봄’이라는 역설적 제목을 단 영화가 이렇게 성공한 것을 보면 많은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뭔가가 있을 것으로 쉽게 추정된다. 이를 뒤집어 보면 국민들의 통찰력이나 감수성을 무시하면서 오만하게 정치편향영화로 낙인찍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지점이지 않을까.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현재를 연상시키는 공권력의 사유화 문제

우선,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통해 가장 위계질서가 존중되어야 할 조직인 군대가 적나라한 하극상의 진면모를 보여준, 실재했던 역사 앞에서 공(公)과 사(私)가 뒤섞인 카르텔 사회의 위험성을 대부분 공유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헌법에 의해 부여받아 살상무기를 비롯한 가장 강한 강제력을 활용할 수 있는 국가조직이 오히려 국가권력 찬탈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공분하지 않을 국민은 드물 것이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공분을 불편해한다는 건 정의에 대한 기본 이해와 감수성이 부족한 편협한 정치관의 증표가 아닐까?

스스로 움직이기보다 누군가 이끌어주기를 강렬히 원하는 군중심리를 들어 반란을 정당화하는 전두광의 강변이나, 반란의 승기를 잡고서는 똘마니들에게 권력찬탈의 떡고물을 마음껏 나누어주리라 다짐하며 웃어제끼는 전두광에게 신성한 헌법상 의무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욕망의 화신인 전두광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가 남성용 변기들이 대오를 갖추어 자리 잡은 화장실인 것이 나름 은유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군이나 국가권력은 공공선을 위한 의무수행의 장식물에 불과하고 그 실질은 오로지 남을 짓밟고 자신의 배를 불리면서 악취가 진동하는 배설물을 쏟아내는 장소가 상징하는 적나라한 사사로움에 있다. 전두광의 화장실은 12.12로부터 40년을 훌쩍 넘기고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 어디엔가 존재할지 모른다.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공직의 무게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공권력을 ‘그들만의 리그’를 보위하는 사유물로 전락시키는 사조직의 화장실. 조폭처럼 공권력을 오용하는 무리들의 화장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불편함을 왜 민주공화국의 미래세대가 공유해야 하는가?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선택적 관람이 아니라 의무적 관람이라도 주장해야 하는게 아닌가?

영화 '서울의 봄'ㅇ[서 이태신 수경사령관이 반란군 제압을 위한 작전을 짜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ㅇ[서 이태신 수경사령관이 반란군 제압을 위한 작전을 짜고 있다.

보수에게 안보는 명분일 뿐인가?

한편으론, 반란군의 무모함과 후안무치함을 제동해야만하고 또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졌던 고위공직자와 “똥별들”의 무능과 비겁함에 대한 분노나 허탈감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수방사령관 이태신이나 헌병감 김준엽이 전두광 패거리의 대척점에서 군의 신성한 사명과 원칙을 상징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나 진실은 오히려 더 진부하고 불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저 자리에 있었다고 할 때 과연 이태신이나 김준엽일 수 있을까, 아니면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하다 못해 분노가 치미는 국방장관, 육군참모차장, 그리고 대통령처럼 처신하지 않을까라는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다. 황금만능주의를 씨줄로, 무한경쟁을 날줄로 하는 각자도생의 사회구조에서 공정과 상식마저 카르텔에 도용당한 한국 사회의 현실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정도의 성찰로 갈등과 혐오가 갈수록 커져만 가는 한국 사회를 살아갈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을 기회를 가지는 게 그렇게 불편한 일인가? 원래 충실한 자기성찰을 덕목으로 삼는 보수의 이념과 가치는 어디로 갔는가?

이태신과 김준엽이 상징하고 관람객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도 적극적인 비전을 들고 민주나 진보를 위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란군의 무도함에 오로지 군의 이름으로 현상유지라는 수비적 차원에서 대처할 뿐이다. 야비한 전두광 무리의 조폭같은 속성을 꿰뚫고 있기에 이태신은 “니들이 나라 걱정을 해서 군사반란질을 하고 처자빠졌어?”라고 일갈하고, 김준엽은 “또 한 번 군사반란으로 나라가 뒤집어지면, 이건 우리 군의 수치고 치욕”이라며 반란진압에 나선 것이다.

이태신과 김준엽은 ‘서울의 봄’을 상징하는 민주와 진보를 신념화한 투사들이 아니다. 다만 군의 국토방위라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고 군사반란으로 치닫는 하극상을 막아 군의 존재이유를 지키고자 했을 뿐이다. 이들마저 반란군에 가담한 하나회 소속 상관이나 부하들을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대한다. 과연 반란이 성공하지 못하였을 때 이들이 조속한 민정이양을 원하는 학생시위와 시민들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였을지는 역사적 가설에 맡겨져 있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가 공유해야 할 것은 국가 기본법인 헌법에 대한 존중과 군의 정치적 중립이라면 이 영화가 왜 정치편향으로 낙인찍혀야 할까. 아직도 군사반란과 쿠데타에 의한 헌정중단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다른 나라들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면 군의 존재이유를 지켜려했던 역사를 보고 배우는 게 왜 문제가 될까. ‘안보제일주의’를 내세우는 보수의 진면목은 실제로는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건 아닌가.

보수와 진보를 넘어 공유해야할 ‘정당성에의 존중’

다른 한편으론,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 등 항상 해피엔딩을 금과옥조처럼 배워온 우리들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의 냉혹함이나 당혹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의 극화라는 점과 더불어, 정의가 일시적일지언정 패배하는 결말때문에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는 제작진의 토로는 때로는 역설이 난무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우리가 바라보는 지점과 서 있는 지점의 간극이 때로는 너무 큰 것이 인간의 숙명적 조건이라는 점을 깊이 깨우치는 계기가 된다고나 할까.

물론 우리는 안다. 영화는 반란의 성공으로 끝났을지라도 현실에서 그들이 죄과를 감당하는 운명을 맞이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역사의 심판정에서 그들을 복권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걸. 그래서 여전히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은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야할 양심의 근본이라는 걸. 헌법 전문이 선언한 바와 같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과 4.19민주이념을 계승함을 자랑스런 헌법적 사명으로 삼아 ‘서울의 봄’을 기억한다는 걸. 대한민국의 주류를 자처하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국민승리의 소중한 기억을 그리도 두려워하는가?

이런 관점에서 영화 ‘서울의 봄’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아야 할 지점은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반란군의 몸부림이다. 그냥 무력으로 짓밟기에는 중과부적인 열세이므로 대통령의 재가를 얻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있다. 그러나 그 노력의 목표는 권력찬탈의 도구일 뿐이지 실질적인 정당성이 아니다.

대세가 정해진 사후에 대통령 최한규는 어쩔 수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상호 육참총장의 체포를 재가한다. 그리고 그 재가의 시점을 1979.12.13. 05:10분경으로 명기함으로써 역사적 진실 규명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7.4.17.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법리는 참모총장의 체포는 사후 승낙에 불과하며, 사후 승낙에 불과한 대통령의 재가로 인하여 이미 성립한 반란행위에 해당하는 총장의 체포행위나 병력동원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의 막바지 모두를 긴장으로 몰고가는 전두광과 이태신의 광화문 대치는 결국 국방장관 오국상의 이태신에 대한 직위해제로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직위해제로 지휘권을 상실당한 이태신은 더 이상 반란군 진압의 명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실제와는 달리 영화적 완성도를 위해 인위적으로 극화된 이 장면에서도 승패를 가르는 명분에 매달리는 것은 전투의 패배자이다. 전투의 승자인 전두광은 오로지 필요에 따라 명분을 이용할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전투를 넘어 역사의 전쟁에서 전두광은 한낱 반란군의 수괴일 뿐이다. 군사반란죄에 대한 재판에서 총장체포나 병력동원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주장하지만 모두 기각당한다. 그렇다면 정당성과 명분은 오로지 진보의 전유물인가? 보수가 지켜야 할 것은 철저히 사사로운 욕망일 뿐이고, 정당성과 명분은 전두광처럼 허울뿐인 것인가?

전두광과 노태건의 실존인물들이 제5공화국을 자임하는 헌법을 만들고 집권정당으로 ‘민주정의당’을 만들었다. 민주와 정의가 헌법과 시대의 기본정신임을 활용하여 군사반란과 5.18쿠데타로 ‘서울의 봄’을 짓밟은 오명을 가리고 싶었을 것이다. 보수를 자처하면서 ‘서울의 봄’이 불편한 이들이라면 다시금 민주와 정의의 헌법적 가치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진짜 보수가 가야할 길을 ‘서울의 봄’이 열어주고 있지 않은가.

글쓴이

김종철 연세대 법전원 교수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서울대 공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경대(LSE) 대학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공법학회 회장,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부위원장,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민주공화국의 기본정신에 기초한 시민헌법교육과 정치개혁 및 사법개혁에 기여하는 것을 헌법학자로서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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