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은 누가 키워왔나
기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 극복’ 숱한 SK의 위기, 누가 이를 극복해 왔나 한국 오너들, 대부분 일하는 경영자들 오너家 불로소득 나누는 재산분할 아냐 SK성장, 노씨 덕이라 단정키 어려워
2003년 어느 날. 사무실로 남 모씨가 찾아왔다. SK-소버린 사태에서 소버린 펀드 측의 승리를 예상하고 SK(주) 주식에 베팅한 소액주주 모임의 대표 격이었다. 그 자리에는 ‘SK-JP모건 SK증권 이중거래’를 단독 취재, 이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까지 특종한 김 모차장(현재도 대단한 언론인으로 활약중)도 같이 자리했다.
“소버린을 밀어주시면 좋겠다. 이 참에 SK를 확 바꾸자.” 당시 이데일리의 편집간부였던 나와 김 차장은 숙의 끝에 입장을 전했다. “소버린 측을 도와줄 수 없다.” 쉽게 말해 편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소버린 펀드측에서 SK(주) 주식을 매집하고 주주총회에서 자신이 추천한 이사를 선임하고 대신 최태원 회장의 해임을 노리고 있었다. 경영권이 넘어가는 큰 위협이었다.(그때의 SK(주)는 지금 SK이노베이션을 말한다.) 남 모씨를 비롯한 소액주주들은 소버린 측의 요구가 관철되기를 열망했다. 그같은 경영권 분쟁에 주가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고 결정적인 주총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이데일리가 소버린 측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면 소액주주들이 더더욱 소버린측에 편들어 의결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언론사가 특정 입장을 취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 일반 주주들이 SK와 최태원 회장이 경영을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외부 손에 의해 지배구조가 좋아지고 회사가 건실해질 거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회사는 외국인이 경영해선 안되는 회사다. 유공에서 민영화되어 있지만, 여전히 우리 경제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는 회사다. 나중에 외국 경영인이 기름값을 맘대로 올리면 그 피해는 우리나라 기업과 가계 모두에 미치게 된다. 민간회사지만 사실상 국가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 회사가 외국인 손에 좌우되게 할 수 없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기업을 지적하고 비판하더라도 제2의 SK, 제2의 최태원을 계속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넘기거나 포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고쳐써야 하는 것이다. 그에게 그런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에 중요한 기간산업을 그렇게 함부로 넘길 순 없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주총에서 SK가 소버린의 공격을 간신히 이겨냈다. 이후 SK는 주주들에게 약속한 대로 지배구조 개선을 조금씩 이행해 나갔지만 최 회장이나 손길승 회장등 임원들은 크게 다쳤다. 힘겨운 싸움을 하는 동안, 노태우 전 대통령의 후광은 물론, 그림자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
기업의 위기는 누가 극복하는가
기업이 성장하는 데는 ‘경영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기를 이겨내는 것,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 필자는 성공한 기업인의 인터뷰를 소개하는 기사를 볼 때마다 이 기업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보려 한다. 경영인의 능력으로만 성공할 수 없고 운이 필요한 게 자본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SK는 최 회장 본인만도 두 번이나 감옥에 갔을 만큼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었다. ‘SK-JP모건 SK증권 이중거래’ 사건은 파생상품 투자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SK글로벌(옛 (주)선경)의 분식회계 사건으로도 이어졌다. 이데일리의 취재로 드러나면서 최 회장을 비롯해 경영진 몇 명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소버린 펀드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아 힘들게 버텨냈다.
선경에서 SK로 변신하며 성장하는 데에 가장 큰 계기가 됐다고 믿는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 애초에 8년간 준비한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내는 일이었지만, 1992년 8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재임 말기에 결정된 것이라, 사돈기업이라는 특혜가 불거졌다. 선거 악재를 우려한 김영삼 대선후보가 결정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최종현 당시 선경회장은 눈물을 쏟으며 사업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자 한국이동통신(제 1사업자) 민영화와 제2 이동통신 사업권자 입찰이 동시에 진행됐다. 제2 이동통신사업자가 되려면 600억원 정도면 됐지만, 전경련 회장이었던 최종현 회장은 특혜논란을 피하려 제1사업자인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를 위한 입찰에 나섰다. 그리고 4100억원을 써내 주인이 되었다. 당시 포스코, 코오롱 등이 통신사업을 준비했지만 8년간 준비한 선경을 따라가질 못했다. 준비부족이었던 제2사업자인 신세계통신은 2002년 SK텔레콤에 합쳐졌다.
이렇게 해서 획득한 이동통신사업권이었지만, SK텔레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점해소’라는 정책리스크에 시달리게 됐다. 제2의 이동통신사업자를 인수해야 했고, 다시 1위 사업자의 시장점유율 50% 제한 등 규제에 시달렸다. 지금도 KT와 LG유플러스, 제 4이동통신사가 나서고 있는 상황이지만, SK텔레콤은 줄곧 견제를 받아왔다.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초고속인터넷망을 깐 김대중 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까지 노태우 전대통령의 사돈기업이라고 특혜를 받은 것은 사실상 없었다. 이는 좌파 경제학자들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지금 SK하이닉스는 또 어떤가. 2011년 당시 정부는 주당 125원 밖에 되지 않던 하이닉스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여러차례 유찰되는 중에, 이명박 정부는 LG에도 인수를 요청했다. 예전에 반도체사업을 하다가 현대그룹에게 뺏긴, 어찌보면 옛 주인이었다. 하지만 절대강자인 삼성전자와는 앙숙관계였다. 하이닉스의 생사여탈권이 삼성전자의 손에 있다고 판단해 이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게 LG의 생각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의 갤럭시에 대항해 애플의 아이폰이 한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SK텔레콤은 삼성전자의 갤럭시를 우리 시장에서 지켜줬다. 애플의 아이폰은 국내 도입이 미뤄지다가 KT에 의해 선을 보였다. 그런저런 호의가 쌓이면서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데 삼성전자가 태클을 걸지 않았다. 기술력에서도 워낙 차이가 나, 삼성전자 눈에는 SK가 인수하더라도 큰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마저도 3조 4천여억원에 달하는 인수가격은 SK에게 엄청난 금융비용 리스크를 안겼다. 그러고 지금 SK하이닉스는 날고 있다.
“기업은 국가 대신 공공선을 추구하는 독립체다”
인류의 역사에서 기업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최근에 좋은 책이 하나 있다. 고대 로마부터 21세기 실리콘밸리까지 인류사를 결정지은 기업의 탄생과 진화를 정리했다는 『기업의 세계사』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 텍사스 A&M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회사법을 가르치는 윌리엄 매그너스라는 교수로, 기업들의 이익추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기업의 탄생을 이렇게 주장한다.
“기업은 오로지 이익 추구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영혼 없는 독립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나아가 이익 추구는 당연하고 그것이 기업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틀렸다. 기업은 원래 공공선을 함양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중략) 기업은 공적인 목적을 지닌 공공단체로서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정부의 믿음을 바탕으로 특별한 권한과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공공선을 향상시키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기업이 탄생하고 존재해왔다.”
이 책의 일관된 논리는, 기업의 수익추구는 당연한 게 아니며, 국가를 대신해 공공선을 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생각인데, 어쩌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흔히 SK의 성장에는 공기업 민영화의 혜택이 배경이 되었다고 인식한다. 대한석유공사의 민영화 덕에 SK(주), 즉 현재의 SK이노베이션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입찰에 참여해 SK텔레콤을, 은행관리 기업이던 하이닉스를 인수해 SK하이닉스를 키웠다는 인식이다. 인식을 돌려보자. 이들 기업들은 국가가 계속 갖고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공공선을 위해 민영화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던가. 우리가 민영화를 부정하는 것은 민간소유가 되었을 때 곧 수익추구로 이어지고, 가격 또는 서비스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 때다. 기름값, 통신료, 반도체 가격 모두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공공선 대신 오너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경영자· 임직원의 위기극복 대가는
최태원-노소영 이혼 및 재산분할 소송을 맡았던 서울고법 판사는 기업이 수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독립체라고 봤을 것이다. 또한 오너들이 모든 결정을 하는 것으로 봤을 것이다. 특히 기업은 자금과 위대한 영혼의 후광이 있으면 항상 성공의 길로 접어드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기업은 좀체 성공하지 않는다. 위기를 이겨낸 기업만이 성장하고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위기를 이겨내는 능력은 기업마다 달라서 대부분 위기 앞에 무너진다. 또 이겨내는 과정에서 임직원의 희생도 적지 않다. 지금 SK그룹의 성장은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과 후광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해낸 최 회장과 임직원들에게 힘입은 것이라고 해야하는 게 맞다.
최 회장은 아무 일 안하고 자리를 지킨 유한계급자가 아니라, 우리 기업 대부분의 오너처럼 오너겸 경영자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는 그냥 직장인이어서 가정을 지켜준 아내에게 재산의 절반을 줘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위기가 글로벌 파도처럼 몰아치는 경영환경에서 SK그룹을 지켜온 오너다. 가장이면서 대기업의 경영자였다. 반면 노소영 관장은 SK그룹 성장의 불로소득자가 아닌가. 심지어 세금조차 내지 않는다.
오너의 이혼소송과 기업의 흥망성쇠는 분리되어야 한다. 재산분할 소송이 정의를 재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불편할 뿐이다. 서울고법 판사는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과 후광이 SK의 성장이 아니라, SK의 위기 극복에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 가늠해봤으면 한다. 기업의 성장을 너무 쉽게 판단해 오너의 몫을 정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큰 판결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