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도살자’ 백인철, 너무 늦었던 세계 챔프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백인철 이야기

1989년 5월 WBA 슈퍼미들급 세계타이틀전에서 오벨 메이야스에게 펀치를 뻗고 있는 백인철(왼쪽).
1989년 5월 WBA 슈퍼미들급 세계타이틀전에서 오벨 메이야스에게 펀치를 뻗고 있는 백인철(왼쪽).

‘더 칼럼니스트’에 첫 글을 게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1973년 제54회 전국체전 복싱 충북대표로 ‘페더급’에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한 후 가수로 활동했던 이동기 형이었다. 1983년 발라드 고고 리듬의 ‘논개’를 불러 KBS 가요톱10에서 3주 연속 톱으로 올라갈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그 여파로 그해 KBS 신인 가수상까지 받았던 형이다. 당시 허영란의 ‘날개’, 이태원의 ‘솔개’와 함께 히트곡 반열에 올라 1983년 그 해는 노래 제목 끝에 ‘개’가 들어간 곡이 유난히 히트를 친 해로 기억된다.

1973년 전국체전 복싱 페더급에서 은메달을 땄던 이동기.
1973년 전국체전 복싱 페더급에서 은메달을 땄던 이동기.

필자는 이동기라는 가수가 복서출신이란 사실을 1992년 88체육관에서 사범생활 때 인연을 맺었던 배우 최재성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후 작년 행사장에서 가수 김상배 선배를 통해 동기 형의 연락처를 알게되면서 소통이 시작했다. 그가 살고 있는 분당에 찾아가 뵙고 싶다는 필자의 요청을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조만간 취재해서 ‘더 칼럼니스트’에 올릴 예정이다.

‘침묵의 도살자’ 백인철의 등장

이번 복싱 칼럼의 주인공은 데뷔부터 26연속 KO승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등재된 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 백인철이다. 그는 용인대 유도선수 출신으로 현재 한국체육대학에서 골프강사로 재직하고 있는 강성범 동천전력 회장과 한달에 한 두 번씩 필자의 체육관을 찾는다. 그가 후배 강성범을 특별히 아끼는 이유는 선수생활을 접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 방향전환, 사업가로 변신해 성공적인 입지를 구축한 것이 대견스러워서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또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닫힌문만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문이 열리는 것을 보지못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백인철은 항상 후배들에게 폭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한다고 조언하는 선배다.

1960년 1월 21일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백인철은 1978년 2월 고흥농고를 졸업한 후 상경했다. 여러 체육관을 옮겨다니다가 중산체육관 최용석 관장에게 ‘스트레이트’를, 동아체육관 김현치 관장에게 ‘훅’을, 유덕체육관 유제두 관장에게 ‘어퍼컷’을 사사한 후 1979년 어느날 극동체육관에 정착, 떠돌이복서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 체육관에서 만난 권재우 관장은 완제품이던 백인철을 잘 닦아 더욱 빛나는 보석으로 재탄생시켰다. 백인철은 훗날 ‘침묵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하루는 그곳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하기 위해 훈련하고 있는데, 건장한 청년이 스파링을 위해 찾아왔다. 예전 유덕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한번 치러 백인철을 일방적으로 때려눕힌 적이 있는 극강의 이효필이었다. 이효필은 1977년 서울 신인대회와 전국 신인대회 미들급 결승에서 박종팔(동아체육관)을 꺾고 우승한 강타자였다. 그러나 일취월장한 백인철은 이효필을 상대로 회심의 어퍼컷으로 마무리했고, 그후 경기장에서 이효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는 고흥농고 재학시절부터 축구, 레슬링, 육상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할 만큼 운동신경이 좋았다. 천부적으로 복싱에 필요한 4S(Speed, Strategy, SkilL, Sense)를 다 갖췄고 바둑은 물론 당구도 고수로 불릴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백인철은 1980년 5월 프로 데뷔이후 파죽의 14연속 KO승을 거두고 1981년 12월27일 ‘독사’ 이상호와 동양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놓고 명승부를 벌인다. 이상호는 통산 11승(8KO)3무5패를 기록한 잡초복서로, 박종팔에 9회 KO패 당한 후 5개월만에 나선 경기였다.

왼쪽부터 박종팔, 장정구, 백인철.
왼쪽부터 박종팔, 장정구, 백인철.

‘강펀치’를 숨기지 못했던 경기

이 경기는 백인철에게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다. 당시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슈거 레이 레너드의 타이틀 반납으로 공석이 된 챔피언 자리를 놓고 1981년 11월7일 미국의 랠프 프라토와 타이틀 결정전을 치러 판정승으로 챔피언이 된 미하라 다다시(일본)가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미하라는 백인철을 차기 도전자로 내정해둔 상태에서 느긋하게 전력을 탐색했다.

백인철은 이상호를 맞아 초반부터 일방적으로 난타, 12회 KO승을 거둬 도전자로서 강력한 인상을 주는데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자 미하라 측은 ‘넘사벽’ 백인철의 이름을 도전자 목록에서 삭제해 버리고 WBA 동급 10위에 랭크된 8전 8승(5KO)의 애송이 데비 무어(미국)를 차기도전자로 낙점한다. 그렇지만 미하라는 1982년 2월 1차방어전에서 데비 무어에게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며 6회 KO패로 타이틀을 빼앗기고 만다. 만일 이때 백인철이 미하라의 도전상대가 되어 세계정상에 올랐다면 그의 복싱인생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백인철은 그 경기 후 무려 7년5개월을 돌고 돌아 1989년 5월 28일날 서른살이 되어서야 첫 세계 정상에 올랐으니 말이다.

백인철은 그 경기를 포함해 26게임 연속 KO퍼레이드를 펼치며 ‘침묵의 도살자’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그는 야구선수로 말하면 장효조, 이종범 처럼 컨택이 뛰어난 선수였다.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을 장착해 상대 얼굴, 복부의 급소를 정확히 가격하며 서서히 침몰시키는 스타일이었다. 장종훈, 박병호 같은 슬러거 스타일의 박종팔과 대비됐다. 19연속 KO승이라는 대기록의 소유자 박종팔의 별명은 ‘다이너마이트’ 였다.

잘 나가던 백인철은 1983년 5월 미국진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치러진 통산 15승(8KO)2패의 신 매니언(미국)에게 판정패, 연승에 첫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어 1987년 1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펼쳐진 통산 61전 55승(49KO)6패의 줄리안 잭슨과의 WBA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3회에 터진 잭슨의 한방에 무너졌다. 그 때 자신의 역부족을 인정한 흑역사(黑歷史)도 있지만 박종팔, 황준석, 이상호, 유제형, 노창환, 정상도, 김종호, 정영실, 김재욱 등 국내 라이벌들과 18차례 진검승부를 펼쳐 전승에 16KO승을 거둘 정도로 출중했다.

라이벌 황준석과 대결을 벌이고 있는 백인철(왼쪽)
라이벌 황준석과 대결을 벌이고 있는 백인철(왼쪽)

‘술과 함께’ 운동을...그의 약점은 ‘백인, 철’

숨겨진 재밌는 여담도 있다. 백인철은 애주가로 유명했다. 그는 경기일정이 잡히면 상대의 강약(强弱)에 따라 술을 조절해 마시며 훈련하는 ‘지략가’였다. 예를 들면 1985년 4월20일 벌어진 통산 27전24승(21KO)3패의 유제형, 1986년 10월18일 벌어진 통산 36전 34승(23KO)2패의 황준석과 벌인 두 라이벌전에선 바짝 긴장하고 절주(節酒)한 채 준비했다. 다소 만만한 상대와 대결할 땐 숙소를 무단이탈해 권재우 관장에게 검거(?)될 때까지 폭음에 폭음을 해가면서 경기를 치루기도 했다.

또 1988년 12월에 벌어진 박종팔과의 경기에서는 체중이 라이트 헤비급 한계체중 79.38Kg을 오버하는 80Kg으로 경기가 결정되자 주위에서는 우려가 많았다. 왜냐하면 백인철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니어 미들급 선수로 69.850kg 한계체중으로 경기를 치렀고, 5개월 전인 그해 7월30일 벌인 김재욱과의 동양미들급 1차 방어전때도 72.5Kg으로 치렀다. 체중을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는 백인철로선 큰 핸디캡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술’로 돌파구를 찾는다.

부족한 체중을 맞추기 위해 경기 5일전까지 후배 복서 전주도를 술자리 파트너로 불러내 안주와 술을 섞어마시며 경기 당일 80Kg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9회 KO승으로 반전을 이뤘다. ‘목수는 연장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증해 보인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89년 5월28일 백인철은 박종팔을 2차례 제압한 오벨 메이야스를 안방으로 불러 극적인 11회 KO승을 올리며 숙원이던 WBA 슈퍼미들급 세계정상에 오른다.

이 타이틀도 1990년 3월30일 크리스토퍼 티오조(프랑스)와 원정 2차 방어전이 마지막이었다. 극동체육관의 매니저 전호연과 파이트머니 문제로 난항에 부딪치자 백인철은 합숙훈련도중 돌연 증발하는 등 철저히 사보타지(Sabotage)전략으로 대응하다, 막상 시합에서는 6회 KO패로 물러났다. 이 경기후 토마스 헌스와 파이트머니 150만달러 경기가 예약되어 있던 그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 전호연 입장에선 그가 운영하던 극동 프로모션이 종말의 서곡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WBA. WBC 챔피언 8명과 IBF챔피언까지 무려 21명의 챔피언을 탄생시켰던 전호연 회장은 일본 가와카와대를 졸업하고 영어, 일어, 스페인어에도 능통한 인텔리였다. 20년간 ‘극동 신화’를 창조, 링의 대부로 불려왔지만 백인철 경기 이후 강순중, 이열우 등이 연달아 타이틀전에서 패하자 의욕을 상실한 그는 1994년 9월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백인철에게도 약점이라면 약점이라 할 수 있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재앙이 된 듯 ‘백인’들에겐 ‘철’저히 약했다. 27전 만에 첫 패배한 신 매니언을 비롯 동양미들급 4차 타이틀전에서 판정승한 트로이 워터스(호주), 다운을 주고받으며 간신히 판정승한 폴 제임스(호주), 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티오조까지 백인들을 상대로 4전2승2패(1KO패)를 기록했다.

필자의 체육관을 한달에 한두번씩 방문하는 백인철 챔프(왼쪽)과 강성범 동천전력 회장.
필자의 체육관을 한달에 한두번씩 방문하는 백인철 챔프(왼쪽)과 강성범 동천전력 회장.

1985년 수경사를 제대한 백인철은 덕성여대 의상학과를 졸업한 강나영씨와 결혼했다. 지금은 경희대를 졸업한 아들과 덕성여대를 졸업한 딸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은퇴후 체육관, 경비업체를 운영하다가 큰 재미를 못봤고 지금은 건설사업을 추진하며 인생 3막을 즐기고 있다. 그는 행복의 문을 두번 열었고, 다시 새로운 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라이벌이자 2년 선배인 박종팔을 깍듯이 모시고 지낸다. 그의 평온한 가정에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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