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연 챔프 키워낸 ‘전설의 명조련사’ 이영록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뿔이 없다면 이빨을 날카롭게’ 선수 장점에 맞춘 조련 철학 빛나 이경연, 이재권, 강철, 김기창 키워내

이영록 사범의 첫제자 최정인 선수.
이영록 사범의 첫제자 최정인 선수.

다산의 훈육철학을 지녔던 분

필자는 1983년 10월 88체육관(관장 김철호) 창단 멤버로 입단, 1994년 5월 폐관할 때까지 선수 생활과 지도자 생활을 한곳에서 활동한 ‘원클럽맨’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숱한 지도자들이 혜성처럼 나타나 유성처럼 사라지는 장면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지도자 한 명을 꼽으라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영록 사범을 첫손에 꼽고 싶다.

1937년 5월 1일 울산에서 태어난 이영록은 1957년과 1959년 전국체전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정교한 테크니션이었다. 1960년 육군 헌병대에 입대, 중사로 복무하면서 국군선수권대회도 제패한 복서였다. 1964년 9월 아마추어 전적 78전 71승(22KO) 7패를 뒤로 하고 프로로 전향, 1년 7개월사이에 강희수, 김수봉, 진상일, 김창수 등 국내 강자들과 맞대결을 펼쳤다. 통산 21전 16승 1무(5KO) 4패의 준수한 전적을 기록한 후에 링을 떠난 그는 울산으로 낙향해 후학을 지도하며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지도자로서 그의 첫 작품은 1973년 영남선수권 우승과 54회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낸 최정인(현 WBR 세계권투연구회 회장)이었다. 이후 쉼 없이 선수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1983년과 1984년 제2회, 3회 소년체전에서 그가 발탁해 조련한 이재권(밴텀급)이 대회 2연패를 달성하자, 지도자로서 주목받는다.

우월한 피지컬(physical)에 비해 성실성과 정신력 부족으로 성장에 의구심이 많았던 이재권은 가열차게 담금질을 한 이영록 사범의 지도편달 덕에 큰 결실을 거두게 된다. 필자가 이영록 사범의 지도 철학을 현장에서 지켜봤는데, 그는 마치 조선 정조 때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과 흡사한 면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다산을 찾아온 황상이란 제자가 “저는 첫째, 머리가 둔하고 둘째, 앞뒤가 막혀 답답하고 셋째, 어리석어서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에 다산은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세 가지 큰 문제가 있어서, 첫째 머리가 좋아 잘 외우면 공부를 소홀히 하고, 둘째 글재주가 좋으면 속도는 빠르지만 글이 부실하고, 셋째 이해가 빠르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나 너는 이 세 가지 문제가 전혀 없으니 오직 부지런만 하여라”라고 했다. 훗날 다산은 자신의 제자중 시를 가장 잘 쓰는 사람은 단연 황상이라 말했다 한다. 이런 심오한 지도 철학을 이영록 사범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울산 학성고에 진학한 16세 소년 이재권은 이 사범의 지도를 받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1985년 월드컵 선발전에서 전년도 전국체전 페더급 금메달리스트 김재휴를 3회 2분 21초 만에 RSC로 꺾는다. 돌풍이 아닌 태풍을 일으킨 것이다. 이재권은 1987년 제4회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 준결승에서 난적 이재혁을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려 다시 한번 복싱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상대 선수인 이재혁은 1988년 서울올림픽 페더급 8강전에서 1991년 제6회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불가리아의 키르코르프를 꺾고 동메달을 획득한 전도양양한 복서였다.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재권(뒷줄 왼쪽 2번째).
북경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재권(뒷줄 왼쪽 2번째).

이재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 선발전에서 홍성식마저 꺾었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준결승에서 오스카 델라 호야와 명승부를 펼쳤던 그 홍성식 말이다. 기염을 토한 이재권은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도 출충한 실력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라이트급 본선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돌아왔다. 오래전 필자가 당시 울산 복싱 연맹 전무를 맡고 있던 이재권을 만나 그의 스승인 이영록 사범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보석처럼 빛나는 영원한 스승”이라면서 “기회가 되면 ‘이영록 복싱배’를 만들어그 분의 은혜에 답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1984년 88체육관에서 ‘전설의 시작’

지도자 이영록은 1984년 88체육관에 사범으로 부임했다. 필자와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했다. 88체육관 사범으로 그의 첫 작품은 경북 봉화에서 상경한 이경연이었다. 경북 영주에서 백낙춘 관장의 조련을 받고 큰 영주공고 2학년 이경연은 1983년 제64회 전국체육대회 코크급 8강에서 청소년대표 신명수를 꺾고 동메달을 획득한 유망주였다. 상대선수였던 신명수는 그해 6월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 4강전에서 훗날 WBA, WBC 양대기구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김용강을 꺾기도 했던 왼손잡이 복서였다.

여담이지만 이 경기에서 패한 김용강은 이후 국내 왼손잡이 최강 3인방인 황경섭, 변정일, 서정수를 꺾었고, 나중에 프로에 전향해서도 WBC 플라이급 챔피언 엘비스 알바레스(콜롬비아), WBA 플라이급 챔피언 레오파드 다마꾸마(일본)등 왼손잡이 챔피언을 거푸 꺾으면서 세계정상에 오른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왼손잡이 킬러였다.

하지만 근성과 체력, 유연성에 비해 파괴력과 순발력이 다소 부족했던 이경연은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졸업반이던 1984년 최점환, 신주섭 등 정상급 복서들에 밀려 좀체 성장하지 못했다. 대학진학마저 포기하고 1985년 프로로 전향하기 위해 88체육관에 입성, 부활의 꿈을 키웠다. 이때 이영록 사범의 지도를 받고 그해 12월 개최된 신인왕전에 라이트 플라이급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같은 체육관에서는 한 체급에 2명만 출전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이경연은 88체육관 소속으로 나서지 못하고 전일체육관 소속으로 출전한다. 당시 88체육관엔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4전 전승(1KO)승의 강정호와 10전 7승 2패 1무를 기록한 한상현 등 걸출한 중견 복서 2명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 12월 4일 개최된 제15회 신인왕 8강전에서 이경연은 6전 전승을 기록중이던 88체육관 강정호와 맞대결, 라이트훅으로 한차례 다운을 뺏은 끝에 판정승으로 3연승(1KO)을 내달렸다. 이어 결승에서는 88체육관 한상현을 꺾고 올라온 테크니션 양동필에게 6회 판정승을 거두며 5전 전승으로 선망의 신인왕에 등극한다. 이영록 사범의 세밀한 지도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세계프로복싱 제 3기구인 국제복싱연맹(IBF)이 태동했다. IBF에서 미니멈급(47.6Kg)이 신설되자 10전 전승 (3KO)를 기록중이던 이경연은 곧바로 세계랭킹에 진입하게 되고, 1987년 6월 드디어 세계타이틀 결정전에 출전한다. 상대는 9전 8승(7KO) 1패를 기록한 IBF 미니멈급 세계 2위 가와카미 마사히로(일본). 이 대결에서 이영록 사범의 집중적인 조련을 받은 이경연은 괄목할 만큼 기량이 급상승했다. 그는 특유의 보디워크와 헤드워크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한편 좌우 연타를 폭발시켜 2회만에 KO승을 거둬 88체육관의 제1호 세계챔피언에 등극한다.

1983년 10월 설립된 88 체육관은 1985년 1월 박광구가 최초로 IBF 주니어밴텀급 챔피언 전주도(극동 체육관)의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체력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5회 KO패를 당해 도전에 실패했다. 1986년 12월 7일 IBF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도디 페날로사가 체급을 올리며 타이틀을 반납하자, 88체육관 소속의 IBF 2위 박조운이 15전 14승(5KO) 1패의 동급 1위 최점환과 타이틀 결정전을 치러 0대 3 판정패를 당해 또 챔프 등극이 물거품이 됐다. 이런 좌절을 88체육관 소속으로 3번째 도전 끝에 이경연이 극복한 것이다.

승리한 IBF미니멈급 챔피언 이경연을 등목 태운 이영록 사범.
승리한 IBF미니멈급 챔피언 이경연을 등목 태운 이영록 사범.

평범한 선수도, 2류 복서도 그의 손을 거치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이 시기 세계챔프 이경연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아쉬운 점은 이 소중한 타이틀을 단 한 차례의 방어전도 치루지 못한 채 반납하고 1988년 1월 31일 신설된 WBC 미니멈급 초대챔피언 이오카 히로키(일본)가 보유한 타이틀을 따기 위해 원정경기에 나섰던 점이다. 이 경기는 적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을 잡은 도전자 이경연이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마지막 12회에 이오카의 일격에 침몰해 국내 최초로 2개 기구 정상에 등극하는데 실패한다.

만일 챔피언 이오카를 국내로 불러들여 경기를 치렀다면 무난하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복싱 스킬(skill)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경연이었기에 아쉬움은 두배로 컸다. 당시 9전 전승(5KO) 을 기록중이던 이오카는 후에 WBA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와 타이틀전에서 1승 1패를 기록하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영록 사범은 이경연 챔프 이외에도 흙 속의 원석(原石)인 강철과 김기창이란 두 복서를 조련해 모두 동양 챔피언에 등극시키며 다시 한번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62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1980년 11월 프로에 데뷔해 1984년 9월까지 14전 6승 4무 4패(2KO)를 기록한 키(174Cm)만 껑충한 평범한 복서였다 그러나 1985년 2월 88체육관 이영록 사범의 지도를 받으면서 무딘 스트레이트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할 만큼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그해 6월 김기창은 신종호를 5회 KO로 잡고 국내 주니어밴텀급 챔피언에 오른다.

김기창(왼쪽)이 신종호와 경기하는 모습.
김기창(왼쪽)이 신종호와 경기하는 모습.

상승세를 탄 그는 1986년 5월 1일 한국선수들에게는 ‘죽음의 링’으로 불리던 태국 원정길에 나서 동양 주니어밴텀급 챔피언 추바타나를 9회 KO로 잡으면서 정상에 올랐다. 마침 이 날은 이영록 사범의 50번째 생일이었다. 태국 원정경기에서 승리한 한국복서는 김기수, 홍수환, 정희연, 황충재에 이어 5번째였다. 이영록 사범과 호흡을 맞춘 그는 1988년 6월까지 12전을 싸워 11승(10KO) 1패를 기록할 만큼 승률이 높았다.

1961년 전남에서 태어난 강철 선수도 이영록 사범을 만나기전까진 평범한 선수였다. 인천체고를 졸업한 그는 1978년 4월 프로에 데뷔해 1981년 10월까지 6연패를 포함, 9전 1승 8패(2KO패)로 패전 일색의 2류 복서였던 것. 펀치력에 비해 세기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군 복무 관계로 잠정은퇴를 했다가 4년의 세월이 흐른 1985년 8월 컴백한 그는 이영록 사범과 손발을 맞추면서 완전히 다른 복서로 재탄생한다. 1988년 3월까지 2년 7개월 동안 8전 전승 (6KO)을 기록할 정도였다.

임홍규와 타격전을 펼치는 강철(왼쪽).
임홍규와 타격전을 펼치는 강철(왼쪽).

강철은 1987년 6월 ‘인간 방파제’라 불리던 35전 19승 3무 13패(10KO)를 기록하던 국내 챔피언 우동구에 3회 KO승을 거두면서 주목을 받은데 이어 1988년 3월 이상호가 세계타이틀전 도전 관계로 반납한 동양 주니어 웰터급 타이틀 결정전에 나서 동양 챔피언에 오른다. 상대는 임홍규. 1978년 제15회 킹스컵대회 선발전(라이트급)에서 한국체대 박종도를 꺾고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본선에 출전했던 선수로, 당시 30전 24승(16KO) 2무 3패를 기록하고 있던 강자였는데, 강철은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타격전 끝에 5회 KO승을 거뒀다.

아마, 프로 포함 100전에 육박하는 풍부한 선수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선수들의 잠재력을 개화시킨 명 트레이너 이영록 사범. 뿔이 없는 동물은 이빨이 날카롭고 이빨이 무딘 동물은 뿔이 날카롭다는 동물의 세계에서의 진리를 복싱에 응용한 분. 13년전 72세의 일기로 고향 울산에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 필자와는 짧은 인연이었지만, 지난날을 추억하며 영면하시길 바란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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