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스포츠계 부끄럽게 만든 ‘동양의 진주’ 김동길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국제대회 최다 9개 금메달에 빛나는 김동길 LA올림픽 편파판정에 미국에 금메달 뺏겨 외신들 일제히 ‘어글리 아메리칸’ 비웃어 김승연 회장 “선수단 철수” 폭탄선언 불사

이탈리아의 강타자 브루노 루시아노(왼쪽)에게 다운을 빼앗은 김동길 선수
이탈리아의 강타자 브루노 루시아노(왼쪽)에게 다운을 빼앗은 김동길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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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최고의 아마 복서

얼마 전, 필자는 대전 복싱협회 한정훈 회장의 초청을 받고 대전대학교로 향했다. 서울 상계동 백병원 이해정 팀장이 동행했다. 대전대학 복싱부 감독을 겸하고 있는 한회장은 1979년 60회 전국체전 코크급 결승에서 경기대표 김종옥을 판정으로 잡고 금메달을 획득한 경력을 가진 복서 출신이다.

한국체대를 졸업한 한 회장은 이후 지도자로 변신, 1997년 세계선수권 동메달리스트 신은철, 서울컵 2연패를 달성한 고지수 선수를 비롯,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한 명장이다. 1963년 충남 대천에서 태어난 이해정 팀장은 서울체고, 한국체대를 거치면서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를 달성한 관록의 복서출신이다.

그날 필자는 이들과 담화를 나누면서 ‘1980년대 아마복싱 최고의 복서는 누구냐’를 놓고 문답을 나눴는데, 두 사람은 주저없이 딱 한 사람을 꼽았다. 김동길!

그는 한국체대 유종만 교수가 필자에게 “지금까지 배출한 수많은 후학 중 자기 관리가 철저한 최고의 복서”라고 일전에 회고한 적도 있었다. 오늘 칼럼의 주인공은 바로 김동길이다.

김동길은 1961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인구 4만 5천명의 담양은 고산 윤선도와 함께 가사 문학의 쌍벽을 이룬 송강 정철이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성산별곡이란 작품을 지은 고장이다. 그런데 담양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복싱 메카라 할 수 있다.

WBA 페더급 챔피언 박영균,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주, IBF 주니어밴텀급 챔피언 장태일 등 3명의 세계챔피언이 탄생한 고장이다. 아마추어 복싱으로 눈을 돌리면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대표 고영삼, 1989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인 정동환, 1991년 호주 세계선수권 대표 김석현이 이곳 출신이기도 하다.

‘아마최강’ 쿠바도 놀란 한국인

1977년 4월 광주체육관에 이재인 선생 문하에서 복싱을 수학한 김동길은 광주 제일중 졸업반인 1978년 6월 제2회 김명복 박사배 페더급 결승에서 김종훈을 1회 RSC승을 거두고 최우수선수상(MVP)을 차지한다. 1979년 전남체고에 진학해 학원 무대를 평정한 김동길은 1980년 1월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 라이트급 결승에서 황정한을 꺾고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김인창에 판정패하는 바람에 출전이 좌절된 그는 그해 11월 미국 LA시장배 대회에 라이트웰터급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무대에 신고식을 마친다. 1981년 1월 한일 국가대항전 금메달 4월 킹스컵(태국) 금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5월에는 필리핀 마르코스배 대회 4강에서 이태리의 세계적인 복서 브루노 루시아노를 꺾는다. 여세를 몰아 결승에서 복싱 강국 케냐 선수에게 RSC승을 거두며 3관왕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해 11월 제2회 캐나다 몬트리올 월드컵 준결승에서 홈링의 앤더슨과 난타전을 벌였지만 텃세에 밀려 안타깝게 동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상대 앤더슨은 그해 1월 뉴질랜드 국제대회에서 김동길에게 2차례 다운을 당하고 완패한 선수였다.

1982년은 김동길에게 복싱의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한 해다. 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대한복싱협회 회장에 전격 취임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용기백배한 그는 1월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그해 5월 서독 뮌헨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선수권대회에 당당히 출전한다.

이 대회 준결승전에 한국은 라이트플라이급의 허영모와 라이트웰터급의 김동길 두 선수가 진출했으나 허 선수는 불가리아의 무스타 포프에게 판정패를 당해 탈락했다. 반면 김동길은 스웨덴의 흑인 복서 오디암모에 판정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미국, 소련, 유고, 루마니아 복서를 차례로 꺾고 올라온 쿠바의 강호 카를로스 가르치아 선수였다. 이 대결에서 김동길은 초접전을 펼쳤지만 근소한 차로 판정패를 당한다. 비록 패했지만 쿠바 선수와 벌였던 결승전은 이 대회 최고의 명승부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 경기를 유심히 지켜본 프로모터가 한명 있었다. ‘세기 프로모션’의 서순종 회장이었다. 공수주 3박자를 완비한 왼손잡이 복서 김동길을 프로에 최적화된 복서로 낙점하고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귀국한 김동길은 그해 6월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획득한데 이어 그해 12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기염을 토했다. 2개 대회에서 한국이 따낸 금메달은 모두 14개. 김승연 회장의 집중투자와 지도자들의 피땀이 결합해 탄생한 열매였다.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훈련중인 김동길.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훈련중인 김동길.

LA올림픽에 모든 것을 쏟고

김동길은 그러나 귀국후 프로로 전향할 것이냐를 놓고 가족회의까지 열었다. 돈과 명예의 갈림길에서 2년후 올림픽에 포커스를 맞추기로 하고 프로행을 과감히 거부한다. 1983년 4월 킹스컵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동길. 이때까지 3년 5개월에 걸쳐 각종 13차례 국제대회에서 금 8개, 은 4개, 동 1개를 수확했다. 연일 강행군과 출전을 거듭한 일정 탓에 피로가 누적돼 그는 제풀에 쓰러지고 만다.

‘바이러스성 간염’이란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결국 뜨거운 링 대신 차가운 병실에 드러누운 채 상실감을 토하고 있었다. 올림픽만을 목표로 달려온 김동길은 ‘나의 복싱 인생도 여기서 끝장이구나’하는 독백을 토해냈다. 사실 그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양궁의 김수녕과 함께 메달이 가장 유력한 선수였다. 그는 정주영 대한체육회장까지 직접 병실을 방문 금일봉을 전달할 정도로 관심이 집중된 복서였다.

그런 그가 1984년 2월, 10개월만에 부상을 훌훌 털어내고 불사조처럼 링에 컴백한다. 그리고 최종선발전에서 당시 최고의 왼손잡이 복서 ‘킬러’ 고희룡에 3대 2승을 거두며 극적으로 올림픽호에 승선한다.

그리고 그의 집념은 그해 8월 LA올림픽에서 활활 타올랐다. 올림픽 본선에서 김동길은 예상대로 8강까지 순항을 거듭한다. 메달권에 들어서자, 미국의 제리 페이지라는 선수를 만난다. 그는 범미주 올림픽이라 불리는 팬 아메리카대회에서 우승한 강타자였다. 아마복싱 최강 쿠바가 출전 10체급 전후로 금메달을 싹슬이하는 이 대회는, 라이트헤비급에서 미국의 에반더 홀리필드와 라이트플라이급의 마이클 카바할도 우승권에서 탈락한 대회였다.

불운하게도 이 경기에서 김동길은 시종일관 경기 주도권을 잡고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1대4라는 엉터리 판정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판정시비와 관련, 미국의 AP, UPI등 세계 통신사들은 일제히 김동길이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김동길이 월등히 우세한 경기를 펼쳤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UPI통신은 1, 2회전은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3회전에서 김동길이 주도권을 잡고 압도했다면서 판정의 부당성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김동길과 동명이인이자 나비넥타이를 매고 신랄한 정치평론을 했던 고(故)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만일 현장에서 직관했다면 특유의 어투로 “신성한 올림픽 경기장에서 이게 뭡니까?”하고 쓴소리를 뱉었을지도 모르는 한심한 판정이었다.

LA올림픽에서 미국의 제리 페이지를 공격하는 한국의 김동길 선수(오른쪽)
LA올림픽에서 미국의 제리 페이지를 공격하는 한국의 김동길 선수(오른쪽)

김승연 협회장의 ‘선수단 철수’ 선언까지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다 당시 30세의 혈기왕성한 김승연 대한복싱협회 회장이 발끈했다. 그는 8월 8일 오전 7시 기자회견을 열고 김동길의 판정에 불복해 AIBA(국제 아마추어 복싱협회)에 정식으로 재심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히고, 오심 판정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없을 경우 한국선수단의 철수까지 고려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에 로이터 통신은 “지금 세계는 ‘어글리 아메리칸(추한 미국인)’을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잘못된 판정을 했다면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있는 아메리칸을 보고자 한다”는 논평까지 냈다. 김동길의 강탈된 금메달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에 벌어진 미들급 결승에서 신준섭이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미국의 버질 힐에 3대 2 판정승을 거두는 성과로 돌아온 것이다. LA올림픽에서 미국은 12체급에 출전, 9개의 금메달과 1개의 은메달(버질 힐), 1개의 동메달(에반더 홀리필드)을 획득하며 독식했다.

왼쪽부터 김동길 선수, 김승연 협회장, 허영모 선수.
왼쪽부터 김동길 선수, 김승연 협회장, 허영모 선수.

올림픽이 끝나자 김승연 협회회장은 귀국 인사에서 “박형옥, 문성길, 허영모등 메달 후보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을 때 살점을 베어내는 듯이 괴로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개최된 ‘복싱인의 밤’ 행사에서 김 회장은 김동길을 불러 위로하면서 88서울올림픽 때까지 동장(銅章)에 해당하는 30만원을 매월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김동길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대회 2연패를 달성했지만, 서울올림픽을 뒤로 한 채 링을 떠난다.

다시 한번 병마를 이겨내길

그는 은퇴 후 1987년 서울체고 복싱강사로 입성해 짧고 간결하면서 집중력을 높이는 독특한 훈련으로 김민기, 정승원, 김성호, 김석현, 윤성일 등을 조련했다. 이들의 기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지도력도 인정받았다. 이후 광주에서 체육 교사로 발령나자 교직 생활을 시작했고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필자는 은퇴한 김동길을 1990년 잠실 체육관에서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연맹 회장배 대회에 용산공고팀을 이끌고 출전한 필자는 두 체급에서 선수들을 결승에 진출시켰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용기를 심어주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떠났다. 두 살 많은 선배이기에 앞서 3체급에서 국가대표로 맹활약한 천하의 김동길이 필자에게 전달한 따스한 감동의 메시지를 지금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광주에서 교직 생활할 당시 김동길.
광주에서 교직 생활할 당시 김동길.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2021년 2월 비인두암이라는 희귀암 진단을 받고 전남대병원에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가 40년 전 ‘바이러스성 간염’이라는 병마를 극복하고 링에 복귀했듯, 슬기롭게 병마를 극복하고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복싱 선후배들과 팬들 앞에 나타나길 기대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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