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 출신 김성준 챔프, 검사와의 약속 지키다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김성준 화려한 뒷골목의 주인공, 우연히 복싱에 “세계챔프” 집념으로 검사와의 약속지켜 3차방어 첫 성공했지만 36년 짧은 생 마감
“끝까지 버티라”하던 챔피언
지난 2월 3일은 전(前)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김성준이 타계한지 36주년을 맞이한 날이었다. 또 6월 3일은 그가 살아있었다면 71살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때 전 국민의 환호를 받았던 복싱챔피언 김성준에 관해 언론에서 단 한 줄의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국내 프로복싱 1백년사에 43명의 챔피언이 탄생했지만, 이중에서 김성준만큼 영욕과 파란이 점철된 챔피언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직도 가슴이 저린다.
필자와 김성준 챔프와는 짧은 인연이 있었다. 1983년 10월 어느 날, 필자는 프로선수로 전향하기 위해 88프로모션(회장 심영자)에 입성했다. 그 88체육관에서 필자는 심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김성준과 그의 친형 김봉준을 만났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김성준 챔프와는 달리 친형 김봉준은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동기동창이었다. 그날 필자는 심 회장의 주선으로 예정에도 없는 김성준과 3분 4회 스파링을 펼쳤다.
1982년 7월 배석철과의 대결을 끝으로 링을 떠난 김성준은 친누님 같은 심 회장의 요청에 순순히 스파링에 응해줬다. 20살 혈기넘치던 필자의 거친 공세에 열살 많은 김성준은 인내심 있게 4회 12분을 버텨주었다. 그는 스파링이 끝나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라. 그래야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다”라는 덕담을 던져주었다. 그의 지난날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에 이어 프로복싱 5번째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김성준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인의 손가락질을 갈채로 전환시킨 인생 곡예사였다.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사각의 링을 통해 반전시키면서 일약 세계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은 불행이었다.
인생의 전환의 계기가 된 복싱
김성준은 1953년 6월 3일 부산태생이었다. 제법 유복한 가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채 14살의 나이에 무작정 가출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잡다한 일을 하면서 무허가 하숙집을 전전하다, 우연한 계기로 소매치기 세계에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험난한 ‘하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요즘은 소매치기라는 범죄 자체가 드물어졌지만, 과거엔 경찰서에 전담반이 있을 정도로 골치아픈 범죄였다. 김성준은 1969년 10월부터 남대문 일대에서 소매치기를 시작해 그 암흑세계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탄복한 동료들이 ‘신의 손’, ‘다이아몬드손’이라 부를 정도였다.
우연도 이렇게 다가올 수는 없었다. 소매치기 김성준이 훑고다니던 남대문 일대에서 주먹세계를 장악한 사람이 바로 심영자 회장의 둘째 오빠였다. 그의 휘하에서 행동대장을 담당했던 이들이 후에 대원체육관을 설립하고 김철호, 유명우, 지인진 등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김진길 관장이었다. 그 당시 심 회장 오빠의 레이더 망에 포착된 김성준은 그렇게 심 회장과 연결되고, 그녀는 또 김성준, 김철호를 발탁해 정상에 설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게 된다.
운동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김성준은 1971년 9월 마포에 있는 이양재 관장이 운영하는 한흥체육관으로 달려갔다. 4개월동안 복싱을 수련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은 김성준은 1972년 프로에 데뷔했다. 그리고 10전 6승(3KO)1무 3패를 기록한 뒤 1975년 8월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문명안을 판정으로 꺾고 한국 주니어 플라이급 정상에 올랐다.

김진세 검사와의 극적인 만남
이기형과 리틀박을 꺾고 2차 방어에 성공할 때까지는 좋았다. 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소매치기 조직에서 손을 뗀 김성준은 그러나 검찰의 수배를 받던 같은파의 치기배인 최모 씨를 집에 숨겨두고 있는 사실이 발각되어 전격 검거됐다. 프로복싱 한국챔피언이 소매치기 일당과 함께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일로 김성준은 어두운 과거를 털어내고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때 그의 수사를 맡았던 김진세 검사와의 만남이 인생에 큰 전기가 됐다. 1942년 강원도 울진 태생의 김 검사는 춘천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7년 제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촉망받는 검사였다. 그는 심재륜 등과 함께 검찰에 지원, 서울지검을 거쳐 1970년대 소매치기 전문검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김 검사는 수사과정에서 만난 김성준이 유망한 복서임을 감지하고, 그에게 “과거와 깨끗이 단절하고 복싱에 전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성준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계챔피언이 되고 싶습니다. 복싱만 할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며 간절함이 묻어난 그 한마디에 김 검사는 직권을 걸고 집행유예를 끌어내 구속 두달 만에 그를 석방시킨다. 석방과 함께 김성준 후원회를 결성, 훈련에 전념할 수 있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후원회 멤버 중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가수 최헌도 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8년 1월, 김성준은 동양 타이틀에 도전, 챔피언을 12회 판정승을 거두며 성원에 보답했다.

찾아온 기회, 지켜진 약속
그해 6월 전 챔피언 정상일과 동양타이틀 2차방어전을 벌였다. 승자는 WBA 동급 챔피언 일본의 구시껜 요꼬에게 도전하는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이 대결에서 김성준은 12회 판정패해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7월말 쾌보가 날아들었다. 매니저 전호연씨가 교섭해 왔던 WBC 동급챔피언 보라싱(태국) 측에서 오는 9월 30일 김성준과 서울에서 대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김성준은 장정구나 박찬희처럼 복싱기술이 뛰어난 복서가 아니었다. 이 점을 포착한 보라싱 측에서 러브콜을 보냈다. 152㎝ 단신의 보라싱은 23전 19승 (15KO)1무 3패가 말해주듯 79%라는 경량급 답지않은 가공할 펀치력을 보유한 왼손잡이 파이터였다. 마침내 김성준과 보라싱의 WBC 주니어 플라이급 세계타이틀전이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졌다. 경기전 애국가는 가수 이은하가 열창했다.

이 경기는 초반부터 보라싱의 독무대였다. 마치 샌드백을 때리듯 김성준을 향해 맹공을 펼쳤다.
운명의 3회. 재방송을 보듯 똑같은 패턴으로 연타를 때리던 보라싱의 공세가 다소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김성준이 로프에서 방향을 급전환하며 상대를 코너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프트훅에 이은 라이트 어퍼컷 한 방을 상대의 명치 깊숙이 가격했다. 그 한 방으로 챔피언 보라싱은 경련을 일으키다가 일순간 링바닥에 뻗어버렸다. 김성준의 극적인 3회 KO승이었다. 김진세 검사와 약속을 실현하는 감격적인 승전보였다.
세계정상에 오른 김성준은 1979년 10월 21일 도미니카의 멜렌데스를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거두고 국내 최초로 3차 방어에 성공하며 복싱 역사를 새롭게 썼다. 그 사이에 WBC 플라이급과 슈퍼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한 박찬희, 김상현 두 복서가 연달아 세계정상에 올라 1979년 한해는 국내 복싱사상 최초로 3명의 챔피언(김성준 박찬희 김상현) 시대를 맞기도 했다.

패배, 좌절, 삶의 마감
1980년 1월 3일 김성준은 일본에서 4차방어전을 펼친다. 노골적으로 헤드 버팅을 하면서 더티한 플레이로 일관한 도전자 나까지마 시게오에게 피범벅이 돼 15회 판정패를 당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끝에 그해 7월 28일 오쿠마 쇼지가 보유한 WBC 플라이급 타이틀에 도전, 재기를 노렸다.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 홍수환에 이은 두번 째로 2체급을 석권하는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 대결에서 슬로우 스타터인 김성준은 초반 실점을 만회하며 9회 이후 일방적으로 챔피언 오쿠마를 두들겨 12회에는 그로키까지 몰고가며 승리를 눈앞에 뒀지만, 홈링의 텃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근소한 차로 판정패를 당했다.

이 경기가 사실상 마지막 경기였다. 1982년 7월 은퇴 이후 김성준은 그동안 받은 파이트머니만 1억원을 상회할 정도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링을 떠난 후 그는 미국이민, 그리고 여러가지 사업 등에 손을 대보지만 사기와 이혼으로 생활고를 겪었다.
링 위에서는 단 한 번도 주저앉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사회생활은 링보다 더 참혹한 곳이었다. 다시 약혼녀와 결별한 후 결국 1989년 2월 3일 세상을 향해 온몸을 던지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세상을 포기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젊은 나이였다.
사실 그의 36년의 짧은 삶은 우리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가 남긴 유서의 끝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나의 마지막 사랑을 나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화장한 유골은 태안 앞바다에 뿌려졌다. 70년대 한 시대를 풍미한 복서 김성준은 48전 28승(13KO) 6무 14패의 전적을 호랑이 가죽처럼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갔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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