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라 불리던 지략의 복서 홍성식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잘 나가다 고비마다 꺾이는 실력 김승미 감독 조련 끝에 제갈량으로 변신 강한 체력과 재능이 지능적 플레이 익혀 올림픽 선전하다 델라 호야와 맞대결 석패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오스카 델라 호야와 격돌하는 홍성식(왼쪽)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오스카 델라 호야와 격돌하는 홍성식(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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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식, 채성배, 최기수의 시대

지난 주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1990년대 아마복싱을 대표하던 홍성식이었다. 국가대표 시절 은사인 김승미 감독, 그리고 동료 복서 최기수, 채성배와 함께 신촌역 근처에서 회식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오는 5월 18일 김승미 선생의 팔순 잔치를 위한 장소 및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3명의 복서가 이곳에 모인 것이다.

한국 아마복싱 1990년대를 대표하는 홍성식, 채성배, 최기수 등 3명의 복서는 1991년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제6회 세계선수권대회, 1992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회 서울컵, 그리고 그해 스페인에서 열린 제26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모두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해 국위를 선양한 복서들이다. 특히 바로셀로나 올림픽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따낸 홍성식은 최근 의미있는 행사를 가졌다. 지난 3월 전북체육회에 올림픽 당시 준결승전에서 미국의 오스카 델라 호야와 대결할 때 착용했던 의상과 동메달, 1992년 세계군인선수권대회 금메달과 마우스 피스등 소장품 5점을 전북체육회에 기증한 것이다.

전북체육회에 소장품을 기증한 홍성식 교사.
전북체육회에 소장품을 기증한 홍성식 교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신준섭 키즈

1967년 11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왼손잡이 복서 홍성식은 1984년 고창고 1학년 때 벌어진 LA올림픽에서 신준섭(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경기에 매료되어 복싱에 입문한다. 다음해인 1985년 2월 처녀 출전한 대회에서는 결승까지 올랐다. 전국 학생 신인대회 밴텀급 결승에서 김이성에게 판정패를 당했지만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러나 그해 5월에 개최된 제6회 회장배 대회에서도 정양식에게 3회 RSC 패, 8월에 개최된 제66회 전국 체전 선발전에서 탈락, 졸업반인 1986년 전국학생선수권대회에서 홍성식은 8강에서 서울체고 김석현에 판정패를 당한다. 고비마다 꺾이는 아픔을 겪은 것. 그리고 고교생으로 마지막 대회인 제67회 전국 체전에서 전북 대표로 출전해 극적으로 동메달을 획득하고 한국체대, 동국대에 연달아 입학 요청을 보내며 대학진학을 갈망 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에 풀이 죽어버렸다.

허탈한 심정으로 복싱을 접고 군입대를 결심한 10월 어느 날, 때마침 청주사대에서 연락이 왔다. 전재환 교수였다. 김승미 당시 상비군 감독이 전재완 교수에게 홍성식을 적극 추천했던 것. 그는 천우신조( 天佑神助)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홍성식은 각종 선발전에서 이재권, 박윤섭에 연패를 당했다. 88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주축선수들이 대거 현역에서 은퇴한 1989년, 홍성식은 비로소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선수촌에 입단했다.

서울컵 2연패를 달성할 당시의 홍성식.
서울컵 2연패를 달성할 당시의 홍성식.

김승미 감독을 만나다

그때 대표팀 감독이 ‘복싱계 히딩크’라 불리는 김승미 감독이었다. 그해 7월 북경에서 벌어진 제1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김승미 감독의 한국대표팀은 12체급에 출전해 9체급에서 결승에 올랐다. 조동범, 한광형, 황경섭, 이훈, 유창현, 정동환, 박세종, 채성배 등 8체급을 석권하고 대회 6연패 위업을 달성했지만, 안타깝게 홍성식은 금메달 명단에 없었다. 은메달에 머물렀던 것.

경기가 끝나고 숙소에서 당시 유현준 대한복싱협회 회장 대행은 무기력한 경기력을 보인 홍성식을 불러 심하게 질타했다. 홍성식은 절치부심하며 재도약을 준비했다. 1990년 대학교 4학년이 된 홍성식은 그해 제1회 서울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아이레에서 개최된 제6회 복싱 월드컵대회 4강전에서 지난 대회 챔피언 쿠바의 홀리오 곤잘레스에게 1회 RSC를 당하면서 높은 벽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김승미 감독은 대회가 끝난 후 심리적으로 위축된 홍성식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세기가 부족한 그의 단점보다는 ‘적토마’라 불릴 정도로 체력이 우월한 그의 장점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동물의 세계에서 뿔이 있는 소는 날카로운 이빨이 없고, 이빨이 날카로운 호랑이는 뿔이 없다. 복싱 선수들에게도 이런 점을 강조하며, 각자의 장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강하게 지도하는 김 감독의 가르침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잘 융합한 선수가 바로 홍성식이다.

제갈량 같은 지략을 무장하다

도광양회(韜光養晦)란 말이 있다. 실력을 기르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가 스스로를 낮추어 조조의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경계심을 약화시키고 때를 기다렸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처럼 홍성식도 취약한 기술을 보완하기 위해 상대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변형시키는 지능적인 복서로 변신을 시도했고 빛을 발할 때를 기다렸다. 1992년 제2회 서울컵 대회에 홍성식은 체력과 기량, 지능을 갖추고 출전했다. 그리고 결승에서 모로코의 마조안 카멜에 8대0 완승으로 끝냈다. ‘제갈량이 울고 가겠다’란 극찬을 들을 정도로 그는 고도의 기교와 지략을 링 위에서 펼쳤다.

홍성식은 어느덧 AIBA(국제 아마복싱연맹) 라이트급 6위에 올라서면서 금맥(金脈)을 향한 다크호스로 주목을 받게 됐다. 이어 바르셀로나 올림픽. 1회전 상대는 북한의 윤영철이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지역 1차 선발전에서 한국의 김정현을 8강전에서 꺾은 강자였다. 16년 만에 펼쳐진 올림픽 복싱 남북대결에서 홍성식은 특유의 송곳같은 날카로운 잽과 예리한 왼손 카운터를 거푸 성공시키면서 11대 2 판정승을 거뒀다. 이어 16강전. 상대인 1991년 호주 세계선수권 준우승자인 러시아의 그리고리안이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홍성식의 정교한 복싱에 휘말린 그는 홍성식에게 승리를 안겨줄 뿐이었다. 8강전에서는 아시아 선수권자 필리핀의 로날드 차베스는 홍성식의 함포사격에 1회 2분 25초만에 침몰했다. 그리고 준결승전. 상대는 20살의 혈기왕성한 미국의 오스카 델라 호야.

‘골든 보이’ 델라 호야와의 대결

4년 전 88서울 올림픽에서 12체급에서 금메달 3 은메달 3 동메달 2개를 획득 종합우승을 차지한 미국 복싱팀은 이번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쿠바의 강력한 태풍에 밀려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엇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홍성식과 호야는 링에 올랐다. 이 대결은 한마디로 난형난제의 대접전이었다. 2회에 파울을 당하면서 4대 8로 뒤지던 홍성식은 3회에 필사적으로 반격을 시도해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다. 섬광처럼 터지는 스트레이트를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덤으로 파울 하나를 얻으면서 마지막 공이 울렸을 때 승리는 홍성식에게 넘어간 듯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종점수는 11대 10 한점 차의 판정패였다. 안타깝고 분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결승에 오른 델라 호야는 독일의 루돌프 선수에 7대 2 판정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호야의 금메달은 그대회 미국 복싱팀이 거둔 유일한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페더급 선수로 활약한 멕시칸인 할아버지 빈센트 델라 호야의 영향으로 델라 호야는 6세에 복싱에 입문했다. 1989년 골든 글러브, 1990년 전미선수권을 제패하는 등 아마추어에서 전적 223승 5패를 기록한 대선수였다. 올림픽이 끝난 후 프로모터 넬슨과 1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계약금으로 사인해 화제를 뿌렸다. 프로 데뷔전에서 그는 15만달러를 받았는데, 당시 슈거레이 레너드가 데뷔 전에서 받은 4만달러와 비교될 정도였다. 특히 1996년 6월 97승(78KO) 1무 1패를 기록한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의 1백번째 경기이자 마지막 은퇴경기. 그가 보유한 WBC 슈퍼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한 호야는 4회 KO승으로 6체급 석권의 서막을 열며 ‘골든 보이’로 등극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트리오 최기수, 채성배, 홍성식(왼쪽부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트리오 최기수, 채성배, 홍성식(왼쪽부터)

프로 데뷔 대신 교사의 길을 택하다

한편 홍성식은 그해 9월 제41회 세계군인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프랑스의 브루노 웨텔르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3년 동아시아대회에서도 홍성식은 북한의 이영호를 2회 KO로 잡았다. 이로써 한국 복싱 1백년사에 유일하게 북한 선수를 2번 이긴 선수로 등재됐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가 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을 준비 중이었다. 출전 보름을 앞두고 운명처럼 지금의 아내 장정현 여사를 만났다. 방심한 사이 홍성식은 1회전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그는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맞바꾼 소중한 선물이 바로 지금의 아내라고 말하면서 반색하였다. 그해 겨울 필자는 홍성식을 만났다. 당시 문성길, 김용강 쌍두마차가 떠난 공백을 채우기 위해 88 프로모션 심영자 회장이 홍성식을 프로로 전향시키기 위해 필자를 밀사로 파견했다.

접촉했지만 그는 프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홍성식은 고향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영선중고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올곧은 성품으로 건실하게 봉직하고 있는 홍성식 교사의 건승을 바란다.

제갈량으로 불렸던 홍성식, 그의 은사 김승미 감독, 그의 아내 장정현 여사(왼쪽부터)
제갈량으로 불렸던 홍성식, 그의 은사 김승미 감독, 그의 아내 장정현 여사(왼쪽부터)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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