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복서 킬러 고희룡, 제주를 빛내다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현해남이 시작한 제주 복싱계보 이은 고희룡 최고복서 김동길과 명승부...’졌잘싸’ 경기 24세에 은퇴후 제주 복싱 지도자로 변신 이신우라는 제주 천재복서 키워내기까지

제주 복싱의 선구자 현해남 선생.
제주 복싱의 선구자 현해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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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복싱의 역사는 현해남 선생부터

새해 시작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월이 마지막 주를 앞둔 어느날 서재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번 주 칼럼의 주인공으로 제주 출신의 아마복싱 국가대표 고희룡을 선택했다. 그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그가 나고 자란 한반도 남단의 섬 제주 복싱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1930년대 암울했던 일제 시절 일본 복싱계를 주름잡던 대표적인 복서 현해남 선생이 바로 이 고장 출신이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정착하면서 이름을 현해남으로 바꾼 그는 1934년 16세에 프로에 데뷔, 1936년 1월 일본 페더급 챔피언에 오르면서 일본 복싱계를 평정한다. 1937년 복싱의 본고장 미국으로 무대를 옮긴 현해남은 3체급을 석권한 헨리 암스토롱과 빅 이벤트를 추진할 정도로 세계 강호대열에 우뚝 선다.

1939년 일본에 돌아온 현해남은 그해 6월 29일 일본 복싱의 ‘권성(‘拳聖) 이라 불리며 63승 1패 6무를 기록한 피스톤 호리구치와 빅 매치를 펼친다. 이 대결은 관객의 혼을 빼앗아 무아지경에 이르게 할 정도로 대단한 타격전이었다. 결국 현해남은 12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복싱 명인’이란 찬사를 듣는다. 초창기 한국 복싱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제주 출신의 명복서 현해남 선생을 추억해봤다.

늦은 입문, 짧고 화려했던 선수생활

현해남, 김성은, 고생근으로 이어진 제주 복싱의 맥을 연결한 고희룡은 1961년 8월 제주에서 태어났다. 고희룡은 고3 때인 1979년 1월 뒤늦게 복싱에 입문했다. 그해 9월 세계 청소년대표 선발전(페더급)에 출전, 4강전에서 전북체고 조규남에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그해 11월 고희룡은 전국 우승권 대회에서 파죽의 5연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다. 1981년 부산 동명공전에 진학한 고희룡은 대통령배와 김명복 박사배 결승에 오를만큼 재능을 뽑냈다. 그러나 제6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최우수복서에(MVP)로 선정된 진행범, 제1회 세계 선수권(청소년)대회 우승자 박기철 같은 강자에게 근소한 차로 판정패하며, 은메달로 아픔을 달랬다.

그는 1982년 제6회 김명복 박사배 대회에서는 라이트급에 출전, 파죽의 4연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해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 준결승에서 국제대회 3관왕을 차지한 ‘강자’ 이현주와 맞대결했다. 이 경기에서 고희룡은 판정승을 거두는 대이변을 연출한다.

LA올림픽 최종선발전전에서 최고의 복서 김동길과 대결하는 고희룡(오른쪽)
LA올림픽 최종선발전전에서 최고의 복서 김동길과 대결하는 고희룡(오른쪽)

1983년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해 김창석 감독의 열정적인 지도를 받으며 고희룡은 복싱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그해 8월 로마 월드컵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와 킹스컵(태국)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1984년 LA 올림픽 선발전에서 고희룡은 라이트 웰터급으로 출전하며 최종선발전 결승까지 오른다. 상대는 국제대회에서 9개의 금메달을 쟁취한 천하의 김동길. 이 대결에서 고희룡은 김동길에게 3대2 판정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훗날 동갑내기 친구 김동길은 제주도 신혼 여행길에 옛 동료인 고희룡을 찾아 그 경기는 자신이 패한 경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고희룡은 그렇게 강했다. 그의 스승인 김창석 감독은 필자에게 “고희룡은 월드컵과 아시안게임 금메달 김기택, 아시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송경섭, 제9회 킹스컵 국가대표 이봉래 등과 7차례 맞대결에서 전승을 거둔 당대 최고의 ‘사우스포(왼손잡이) 킬러’”라면서 “사우스포 김동길과 대결도 내용상 이긴 경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실력을 보유한 고희룡도 ‘저팔계’라 불린 전칠성에겐 3연패를 당했다. 1983년 로마월드컵, 1984년 LA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전칠성이 특유의 저돌적인 돌진을 할 때마다 고희룡은 전전긍긍하면서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재밌는 사실은 고희룡에 3연패를 당한 왼손잡이 복서 김기택은 ‘저팔계’ 전칠성과 3차례 맞대결해서 전승을 기록 했다는 점이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 선발전 라이트 웰터급 결승에서 돌진하는 전칠성에게 회심의 카운터를 날리자 총 맞은 멧돼지처럼 전칠성이 그대로 링바닥에 고꾸라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렇게 전칠성, 김기택, 고희룡 3명의 복서는 물고 물리며 복싱계의 대표적인 먹이사슬 관계를 형성했다.

빠른 은퇴, 그리고 빠른 지도자 생활

그해 7월 고희룡은 핀란드에서 개최된 제5회 템머 국제복싱대회에 출전한다. 주먹에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고희룡은 준결승에서 유럽 대표 마틴 파넨에 2회 RSC승을, 결승에선 미국대표인 헨리 아나야에 판정으로 승리하면서 4번째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김동길에 석패한 아쉬움을 달랬다. 수년 전 필자는 고희룡과 오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그에게 “제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에 1982년 수석 입학한 원희룡 제주 도지사가 운전면허시험을 3차례 시도만에 간신히 합격했는데, 형님도 4수 만에 국제대회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멘트를 날렸고, 그가 박장대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참고로 고희룡의 친형(고성룡)은 원 전지사의 서울대 2년 선배이다.

고희룡은 1982년 제 3회 핀란드 템머 대회후 김승연 대한복싱협회 회장의 배려를 잊지 못한다. 그는 그 대회 8강에서 탈락했는데, 김 회장의 덕에 국가대표팀은 유럽 전지훈련을 펼쳤다. 고희룡은 스웨덴, 덴마크, 독일과 펼친 국가대항전에서 3차례 모두 판정승을 거두며 주가를 올렸다. 반면 미들급에 출전한 신준섭은 3차례 모두 RSC로 패하는 치욕을 연출했다. 그 경기를 현장에서 직관한 신준섭의 스승 조석인 관장을 비롯, 많은 복싱인들은 신준섭의 복싱 인생이 종지부를 찍었다고 단언했다. 그랬지만 신준섭이 2년 후 LA 올림픽에 출전, 한국 복싱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던 것이다.

1984년 12월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재팬컵 국제대회에 참가한 고희룡은 결승에서 홈링의 다까하시 요시아기를 맞이해 샌드백 두들기 듯 일방적으로 난타하며 완승, 그해 국제대회 2관왕을 차지한다. 그렇지만 1985년 고희룡은 그해 월드컵선발전 최종결승과 전국체전 결승에서 진행범과 장용강에 판정으로 패하자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제1회 제팬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치한 고희룡 선수.
제1회 제팬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치한 고희룡 선수.

복싱 불모지 제주를 빛낸 선수들

이른 나이에 링을 떠난 고희룡을 보면서 투기 종목인 복싱선수들의 은퇴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86년부터 고희룡은 제주도 순회코치로 재직하면서 지도자로 변신했다. 씨앗을 뿌리자마자 곧바로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조급함 대신 그는 10년 후를 내다보고 차분하게 밀알을 뿌렸다. 그렇게 그의 손을 거쳐 김용남, 이창윤, 신진수, 이신우 등 국가대표 선수들이 하나둘씩 탄생한다. 특히 이창윤은 1991년 제41회 중고선수권 동메달, 1992년 대통령배 은메달, 1993년 제43회 중고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어 1994년 용인대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 1996년 대표 선발전 라이트 웰터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고희룡의 ‘만성의 대기’임을 실증한다.

지도자로 변신한 고희룡과 이창윤 선수(왼쪽)
지도자로 변신한 고희룡과 이창윤 선수(왼쪽)

고희룡이 지도한 이창윤은 1997년 동아시아대회에 출전, 동메달을 획득했고 그해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벌어진 퀘어드 에어파잠 국제복싱대회 결승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알카소포를 9대 3 판정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할 정도였다. 또 고희룡의 또 다른 제자 신진수는 2005년 크로아타아에서 개최된 아레나컵 국제복싱대회 라이트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다. 그렇게 10년의 지도자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2017년 소년체전(웰터급)에서 대회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된 복싱 신동이 등장한다. 바로 이창윤 제주도 복싱선수단 단장의 장남 이신우 군으로 고희룡의 마지막 제자다.

아버지와 같은 왼손잡이인 이신우는 2018년 제주 남녕고에 진학하고, 그해 전국체전과 대통령배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탄력을 받은 그는 그해 대만에서 개최된 제8회 국제 유스 복싱대회에 출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9년 69㎏으로 제100회 전국체전 금메달 청소년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한 이신우는 2020년 대통령배 금메달에 이어 2023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81㎏급으로 우승하며 국가대표에 올랐다. 그와 부친은 제주 출신 최초의 복싱 부자 국가대표라는 기록을 썼다.

이창윤 제주 복싱선수단 단장, 이신우 선수, 고희룡 부회장(왼쪽부터)
이창윤 제주 복싱선수단 단장, 이신우 선수, 고희룡 부회장(왼쪽부터)

故 김성은 회장을 추모하는 고희룡

제주에는 그 뒤를 이어 2023년 정주형, 임원희 두 제주 출신 여성복서가 50㎏급, 67㎏급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는 등 복싱 볼모지 제주 복싱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고희룡 고문은 지난 2014년 11월 제주 출신으로 대한복싱협회 회장과 국가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고(故) 김성은 복싱협회회장 흉상 제작을 성사시켜 복싱인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고희룡보다 20년 앞선 김성은 회장은 1943년 남제주군 서귀포 출신으로, 아시안게임 2연패와 아시아선수권 3연패를 달성하는 등 국제대회 금메달 7개를 획득하면서 국위를 선양한 1960년대 간판 복서다. 이후 1982년 국가대표 감독으로 메이져 대회(올림픽, 세계 선수권, 월드컵) 대회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1개를 획득해 지도자로 명성을 날렸다.

제주 복싱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2년전 자연인으로 돌아간 고희룡
제주 복싱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2년전 자연인으로 돌아간 고희룡

이런 화려한 이력을 남긴 그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흉상을 제작하고 제막식 개최에 앞장선 제주복싱협회 고희룡 전무가 필자는 여느 금메달 획득보다 더 자랑스럽다. 제주 복싱협회 전무와 수석 부회장, 대한복싱협회 기술위원을 역임한 고희룡은 2년전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자연으로 돌아가 인생 3막을 즐기고 있다. 35년간 제주복싱협회에 봉직하면서 수많은 후학들을 소리소문없이 길러낸 그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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