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은 심장으로 싸우는 거야!” 김춘석 관장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25살 이른 나이에 지도자 길로 들어서 최용수와 운명적 만남...강인한 챔피언 박종팔, 김득구, 주윤상, 정영길 등 길러 “나는 이기는 법을 안다” 출간..철학 담아

1976년 동아체육관 사범 시절의 김춘석 관장과 박종팔(앞줄 왼쪽)
1976년 동아체육관 사범 시절의 김춘석 관장과 박종팔(앞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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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한국의 복서들

지난 주말 1980~90년대 이영래, 권재우, 김진길 관장과 함께 프로복싱 지도자로 4대 천왕을 형성한 김춘석 관장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양천구에 있는 극동 서부체육관을 찾았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그가 배출한 제자들 사진이 일제히 눈에 들어왔다.

WBA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 최용수를 비롯, 동양챔피언 정영길, 박봉춘, 김종길, 한국챔피언을 지낸 김우천, 이재희, 최규운 김봉철, 그리고 아마추어로 눈을 돌리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페더급)에 출전한 국가대표 박흥민을 비롯, 라이트 플라이급 국가대표 박상현, 미들급 국가대표 장형욱 등 반세기에 걸쳐 김 관장이 배출한 명 복서들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진은 따로 있었다. 주인공은 바로 김춘석 관장의 스승 홍순만 선생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면서 김 관장이 현역시절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숙연해졌다.

홍순만 선생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 김충배, 라이트급 금메달 김현치를 배출한 지도자다. 1971년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테헤란)에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되어 참관한 홍 선생은 이후 전학수, 박대천, 박일천, 이만덕, 이재훈 이필구 등 명복서들을 발굴했다. 고생근, 정영근, 이석운을 배출한 중산체육관 채용석 관장과 함께 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젊은 권투 지도자, 영웅들을 키우다

그의 제자 김춘석 관장은 1949년생으로 경기도 안성 출신이다. 김 관장은 1967년 영등포체육관에 입관해 1969년 3월 제5회 서울 신인대회와 10월 제3회 전국 신인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유망주였다. 그리고 1973년 제54회 전국체전에 서울 대표(웰터급)로 출전해 동메달을 획득한 후 경기에서 얻은 어깨부상으로 43전 37승(18KO) 6패의 전적으로 현역생활을 마감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 일찍 선수 생활을 접은 그는 1974년 용초 체육관 사범으로 변신한다.

용초 체육관은 동양 챔피언 김현치가 선수 생활 말년에 선수 겸 관장으로 설립한 체육관이다. 이곳에서 4년간 사범 생활을 하던 중 그는 1976년 서울 신인대회과 전국 신인대회(미들급)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박종팔, 1977년 서울 신인대회(라이트 웰터급) 우승자 김득구를 탄생시켰다. 1978년 서울 신인대회에서 밴텀급의 오민근, 페더급의 이일복, 라이트급 성낙석, 미들급의 송치근 등 4체급을 용초 체육관이 석권하자, 이들을 지도한 김춘석 사범은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7전 전승(4KO)을 기록한 페더급의 이일복 선수에겐 최우수선수상이 수여됐다.

지도력을 검증받자 여세를 몰아 김춘석 관장은 1978년 서울 사당동에 풍성 체육관을 개관해 본격적인 제자 발굴에 나섰다. 1983년 한미일 3개국 국가대항전 우승과 1984년 제7회 핀란드 템머 국제대회 결승에서 불가리아의 블라고예프를 2회 RSC 승을 거두고 최우수상(MVP)을 받은 국가대표 주윤상을 발탁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이듬해 양천구 신월동에 극동 서부체육관을 열고, 수많은 명복서들을 배출했다. 그는 1998년 8월 자신의 인생을 담은 책 『나는 이기는 법을 안다』란 책도 출판했다.

수제자 최용수와의 운명적인 만남

김춘석의 역작중 역작은 국내 최초로 WBA 주니어 라이트급을 정복한 최용수였다. 한국 프로복싱은 유명우, 문성길, 김용강, 이열우, 백인철, 박영균 등 한때 세계챔피언 6명을 동시에 보유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0년대를 마감하고 있었다. 이어 1990년대에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에 깜짝 스타로 등장한 복서가 최용수였다.

1972년생으로 충남 당진 출신인 최용수는 1989년 봄 훌쩍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연고라고는 신월동에서 개인사업을 하던 큰형(최민수) 뿐이었다. 마침 신월동에 위치한 극동 서부체육관에 입관한 최용수는 “김춘석 관장과의 만남은 자기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필자에게 회고했다. 그렇다. 인생은 만남이다. 물도 바위 절벽을 만나야 아름다운 폭포가 되고 석양도 구름을 만나야 붉은 노을이 곱게 빛나보이듯, 최용수도 명장 김춘석 관장을 만나 위대한 복싱 인생을 불태우게 된다.

1990년 11월 프로 복싱에 데뷔한 최용수는 전국신인왕전(주니어 페더급)에 출전했지만 2회전에서 오병철에 판정패를 당하고, 8전째에는 장성관에 2회 KO패를 당하는 등 극심한 성장통을 경험한다. 이때 김춘석 관장은 최용수에게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정신자세를 가르쳐 정신적으로 성숙시켰다.

하나의 예로 1992년 10월 최용수는 김상문과 경기를 앞두고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얼굴이 찢기는 등 전치 3주의 부상은 경기를 치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경기에 출전, 7회 KO승을 거두는 강인한 정신력을 과시했다. ‘복싱은 주먹으로 싸우는 운동이 아니라 심장으로 싸운다’는 김 관장의 복싱 철칙을 그대로실행한 경기였다. 발동이 걸린 최용수는 거침없이 승전보를 울리면서 한국과 동양을 차례로 석권하고 세계랭킹에 진입했다.

1995년 10월 21일 동급 2위 최용수는 WBA 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 결정전을 치르기 위해 지구의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1965년 12월 서강일의 첫 세계타이틀전이 펼쳐진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 프로복싱에서 주니어 라이트급의 마(魔)의 체급이었다.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장정구, 유명우 등 수많은 세계챔피언을 배출했지만 유독 최용수가 도전하는 주니어 라이트급은 서강일을 비롯 김현치, 김태호, 오영호, 최충일, 문태진 등 그동안 한국복서 6명이 7차례에 걸쳐 도전을 시도했지만 참패를 거듭했었다.

세계챔피언 최용수와 김춘석 관장(오른쪽)
세계챔피언 최용수와 김춘석 관장(오른쪽)

이번에 결정전의 상대는 동급 1위 아르헨티나의 빅토르 우고 파스였다. 그는 60전 58승(21KO) 1무 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장성관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절치부심한 후 12연승(8KO)으로 주먹에 물이 오른 최용수는 원정경기 핸디캡도 이겨냈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상대를 압박, 두 차례 다운을 빼앗은 끝에 10회 KO승을 거두면서 세계정상에 올랐다.

이 타이틀은 홍수환으로 시작해 유제두, 홍수환, 김철호, 박찬영, 유명우, 이형철에 이어 8번째로 적지에서 뺏은 타이틀이었고 8번째 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에 도전한 끝에 이룩한 성과였다. 전설적인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챔피언은 체육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한 열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최용수도 “모든 승부는 자신의 믿음에 달려있다”며 “자신감은 승패의 절반을 잠식한 상태에서 진격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 과정에서 김춘석 관장은 묵묵히 자신의 수제자인 최용수의 성장을 도왔고 지켜봤다.

안타까운 순간들 지켜봐야했던 지도자

최용수는 1996년 1차방어전에서부터 5차방어전까지 이어갔다. 6차방어전은 일본 원정이었는데 도전자는 20연승(16KO)을 기록한 하다께야마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차례 경기후 8차 방어전은 그와의 리턴매치였다. 이 경기도 일본 원정이었는데,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텃세에 밀려 판정으로 타이틀을 잃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세계타이틀 15연패의 사슬을 끊어낸 천금 같은 승리였다. 김춘석 관장은 최용수의 타이틀 상실을 두고 “빼앗아간 것은 도전자 하다께야마가 아니라 IMF 한파였다”고 안타까워했다.

IMF 환란은 극심한 경기침체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프로복싱 경기를 주최할 스폰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최용수가 일본 원정을 두번이나 나선 것도 고육지책이었다. 김춘석 관장은 원정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만일 최용수가 국내에서 순조롭게 방어전을 펼쳤다면 15차 방어전은 무난히 성공할 수 있는 페이스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명조련사인 극동 서부체육관의 김춘석 관장.
명조련사인 극동 서부체육관의 김춘석 관장.

김 관장은 가장 안타까운 비운의 복서로 동양챔피언을 지낸 정영길을 꼽았다. 1963년생으로 전남 고흥 출신인 정영길은 학창시절 배구선수 출신답게 민첩성과 순발력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피지컬을 보유했다. 36승 (28KO)7패 2무를 기록한 정영길은 1988년 7월 미국 원정경기에서 WBC 웰터급 챔피언인 로이드 허니간에게 도전했다. 그는 5회에 벨트라인 아래를 가격당하는 반칙타를 맞았지만, 반칙승 대신 그때까지 채점에 의해 어이없이 판정패를 당하고 말았다. 김 관장은 그때의 경기가 가장 아쉬웠다고 회고했다.

동양챔피언 정영길과 김춘석 관장(오른쪽)
동양챔피언 정영길과 김춘석 관장(오른쪽)

1992년 한국 권투위원회 우수지도자상, 1996년 서울시 아마추어 복싱연맹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한 복싱계 명장 김춘석 관장이 남은 여생동안 한국복싱 부활에 중심축 활동을 변함없이 해주시길 기대한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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