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복서 꺾고, 첫 올림픽 금메달 꿈꿨던 황철순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리라공고 명장 황철순의 선수 시절 뛰어난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으로 최초 쿠바 복서 제압...올림픽 제패 눈앞에 한 번은 방심으로, 또 한번은 외풍으로 좌절 지도자 변신후 위대한 복싱팀 일궈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은 복싱맨
필자가 27살에 복싱 지도자로 첫 발을 내딛은 지 어느덧 3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단 한 명의 복싱인을 꼽으라면, 난 주저 없이 ‘황철순’이란 인물을 선택할 것이다. 필자가 용산공고와 서울체고에 복싱강사로 11년 재직할 당시, 백마고지 전투처럼 링 위에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면서 전우애가 묻은 스승 같은 존재. 바로 리라공고에 계셨던 황철순 감독이다. 그는 언제나 솔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1954년 7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969년 서울 배명중 재학시절 이광은과 함께 야구선수로 활약하다 그만두고 복싱으로 전환한다. 1970년 서울 신인대회에 일반부로 출전했지만 2회전에서 탈락한 무명이었다. 1971년 남산 공전에 입학한 그는 신현옥 선생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중앙무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스승인 신현옥은 1972년 뮌헨 올림픽(웰터급)에 선발된 국가대표 출신 지도자였다.
승승장구하며 ‘최고의 복서’ 반열에
황철순은 곧바로 두각을 나타났다. 1972년 53회 전국체전 F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다음해 5월 벌어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3년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플라이급)인 김충배를 잡는 대이변을 연출하며 고교생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그해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구영조(북한) 에 패해 은메달을 획득하며 각광을 받았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뜻밖의 소중한 인연을 맺는다. 배구 국가대표선수였던 정순옥과 평생 반려자가 되는 첫 인연이었다. 당시 여자배구팀도 결승에서 일본에 패해 은메달을 따는데 그쳤다. 이듬해 밴텀급으로 올라선 황철순은 킹스컵 선발전에서 박인규에게, 아시아선수권 선발전에서는 임병진에게 판정패를 당하는 등 성장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선발전에서 숙적 박인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재도약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 황철순의 부친이 올림픽 출전을 위한 병적 확인서를 발급받으러 병무청으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된다.
빈소에서 흐느끼면서 울고 있는 그에게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김 회장은 “이제부터 내가 너의 아버지 몫을 대신할 테니, 잡념 없이 올림픽에 최선을 다해라”라고 위로를 했다. 1926년 김해 태생의 김 회장은 1970년대 한국복싱발전의 주역중 한 분이셨다.

쿠바 최고의 복서를 꺾고 금메달 꿈꿨는데
1976년 7월 대망의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이 열렸다. 황철순은 16강전에서 쿠바의 오르난도 마르티네스와 격돌한다. 그는 전년도 올림픽 결승에서 훗날 WBA 밴텀급 정상에 오르는 멕시코의 알폰소 자모라를 꺾고 우승했던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황철순은 이날 대결에서 송곳 같은 스트레이트를 거푸 성공시키면서 3대 2 판정승을 거뒀다. 한국 복싱선수로 올림픽 출전사상 최초로 쿠바 복서를 꺾는 신기원을 창출한 것. 이날이 7월 25일이었다.
황철순의 복싱경기가 열리기 전, 연인 정순옥을 비롯 조혜정, 유경하, 변경자 등이 활약한 한국 여자배구팀이 2시간 20분간의 대접전 끝에 난적 쿠바를 3대 2로 꺾은 날이기도 했다. 이날 경기장에 응원나온 교민들은 ‘쿠바를 격파한 날’이라고 한껏 축하했다.
여담이지만 복싱 선수가 내뻗는 스트레이트 펀치는 초속 8m로 추산된다. 1m 내외의 접근전에서 내뻗는 상대의 펀치를 어떻게 잘 피하느냐에 따라 승패의 향방이 갈린다. 황철순은 천부적으로 동체시력(動體視力)이 뛰어나고 동물적인 감각의 반사신경을 보유한 복서였다. 그날 금메달을 향한 8부 능선을 넘은 그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가 나고 자란 고성 생가에는 수많은 방송사 기자들이 운집해 열띤 취재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만일 황철순이 금메달을 획득한다면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이라는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3일 후인 7월 28일 그는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미국의 찰스 무니와 8강전을 벌인다.
무너진 몬트리올, 이번에는 모스크바다!
찰스 무니는 왼손잡이라는 점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복서였지만, 황철순은 3대 2로 판정패를 당한다. 상대를 만만하게 생각한 탓이었다. 그날은 플라이급의 박찬희, 라이트급의 최충일 모두 메달권에서 패했다. 쿠파를 격파한 날 3일 뒤인 7월 28일은 한국복싱팀 숙소에 곡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정순옥이 활약한 한국여자배구는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절치부심한 황철순은 1년뒤인 1977년 10월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제8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북한의 정조웅을 4대1 판정으로 잡고 우승을 차지했다. 정조웅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라이트급 결승에서 한국의 권현규를 꺾게 되는 바로 그 선수다. 6번째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한 황철순이 귀국하자, 한화그룹 김종회 회장은 금일봉과 함께 모스크바 올림픽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해 겨울 황철순은 대한체육회가 선정하는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승승장구는 당분간 이어졌다. 1978년 8월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김정철마저 판정으로 제압했다. 김정철은 황철순과 함께 1976년 동국대 복싱부 창단 멤버로 입학한 선수였다. 이어 그해 12월 방콕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태국의 프라디트에 3대 2 판정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날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1만 명의 태국 관중들이 의자와 음료수 병을 던지며 난동을 벌이는 바람에 긴급 출동한 경찰이 링 바닥에 기어들어가 있던 심판들을 구출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결승에서 황철순은 버마 선수를 5대 0 판정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덕에 그해 대한체육회 추천으로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체육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수상은 다른 선수에게 넘어갔다. 야구의 이선희 선수다. 전년도 니카라과에서 벌어진 제1회 대륙간 슈퍼 월드컵 야구대회에서 한국팀이 국제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 이듬해 5월 26일 황철순은 오랜 연인 정순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1975년 축구의 김재한 선수와 농구의 조영순 선수 부부에 이어 두 번째 국가대표 출신 부부가 탄생한 것이었다. 1955년 2월 부산 태생의 정순옥은 1974년 멕시코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977년 월드컵 대회에 국가대표로 활약한 선수였다.
신혼의 단꿈도 잠시 접고, 황철순은 그해 10월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 곳에서 열린 제1회 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그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복싱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월드컵, 올림픽,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지독한 텃세 판정에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황철순은 전초전 격인 킹스컵과 아시아선수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를 연달아 석권, 3관왕을 달성했다. 그리고 킹스컵과 인도네시아 대통령 배에서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되면서 양궁의 김진호, 레슬링의 양정모와 함께 한국팀의 유력한 첫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주목받았다.
선수로서 꿈은 접었지만 지도자의 길로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소 냉전으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출전이 무산되면서 그의 복싱 인생에도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목표가 사라지자 곧바로 1980년 6월 서울체고에 재학 중인 권철과 아마복싱 은퇴경기를 펼친다. 이 대결은 이례적으로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이 경기를 승리로 장식한 그는 173승 8패의 화려한 아마 전적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해 7월 프로에 전향해 5연승(1KO)을 기록했지만, 1982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요청으로 한국화약 복싱팀을 맡으면서 지도자로 변신했다. 이어 리라공고, 서울시청을 거치면서 독특한 지도력을 발휘해 안달호, 권채호, 박찬목, 변정일, 조인주, 최석만, 김호철, 박기홍, 이창환, 이훈, 신종훈, 김기석, 한순철 등 대형선수들을 배출해냈다.
필자가 용산공고 복싱부 사령탑을 맡으면서 황철순 사단의 리라공고와 6년간 20차례 맞대결을 펼쳤는데, 전적은 3승 17패였다. 복싱계 ‘마키아벨리’라 칭할 만큼 황철순이 사령탑으로 버티고 있는 리라공고를 꺾는다는 것은, 축구에서 브라질 대표팀을 꺾는 것만큼이나 힘겨웠다. 필자는 그래서 리라공고를 꺾은 3승의 주인공인 용산공고 최요삼과 임계룡, 홍성민이라는 3명의 복서가 더욱더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잎새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우물이 말라봐야 깊은 샘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침체기에 빠진 한국 아마복싱의 참담한 현실을 상기하면, 황철순이란 인물의 강렬한 발자취가 새삼 떠오른다. 이제는 화려한 지난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경기 남양주에서 아내와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황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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