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회장이 이끈 한국 아마복싱 전성기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15년간 복싱협회 이끌며 한국복싱 중흥시켜 올림픽 3개등 국제대회 209개 금메달 일궈 정식 예산지원과 각종 포상금 100억원이상 창업주-김 회장-차남으로 이어진 복싱 인연
지난 8월 7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인 서영민 여사가 암 투병중 향년 61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정과 함께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대표를 비롯 김 회장의 세 아들 사진이 인터넷상에 올라왔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현 한화생명 김동원 부사장의 얼굴이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미국 예일대에 유학 중인 2005년 8월 잠시 귀국해 대한복싱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한화 이경재 사장과 함께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입관원서를 쓰며 등록해 체육관 관원이 됐다. 필자가 기억하는 약관 20세의 김동원은 평범하고 해맑은 대학생이었다. 그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이번 주 <더 칼럼니스트> 연재 글은 그의 부친이자 전 대한복싱협회 회장을 역임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이야기다.

김승연 회장과 복싱 인연
김 회장은 1952년 2월 7일 천안에서 태어났고 1964년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생 중에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와 현대중공업그룹 정몽준 고문, 그리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 장녀 김예리 씨도 있었다. 명문(?) 장충초등학교와 비견되는 초등학교로는 1921년 5월 개교한 경남 진주의 지수초등학교가 있다. 지수초등학교는 제1기 졸업생으로 LG 창업자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자 조홍제 회장,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을 배출한 명문이다. 김승연 회장이 졸업한 경기고 66회 동창생 중엔 1978년 9월 30일 태국의 보라싱을 3회 KO로 잡고 세계정상에 오른 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김성준의 친형인 김봉준(1951년생)씨가 있었다. 김 회장은 친구의 동생인 김성준이 벌인 5차례 세계타이틀전을 시청하면서 한층 더 복싱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김 회장과 복싱의 인연은 선대까지 올라간다. 김 회장은 1981년 8월 한국화약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29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화약을 이끌었다. 선친인 김종희 회장도 1978년 천안 출신의 프로복싱 동양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정순현을 빙그레 유업에 취직시켰다. 당시 월 50만 원의 급료를 지급하면서 정순현이 복싱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복서로 최초로 3회 연속 세계타이틀전을 펼칠 수 있도록 발판이 되어주었다.
1982년은 한국에 프로야구가 탄생한 해다. 그해 3월 12일 만 30세의 나이에 제12대 대한복싱협회 회장에 취임한 김승연 회장은 임기가 종료된 1997년 4월까지 67개 체육 단체장 중 최장기간인 15년동안 회장직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올림픽 금메달 3개 포함,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209개를 일궈냈는데, 지원금액은 정식예산 75억 원 외에 행사비와 포상금까지 합쳐 족히 100억원은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막강한 지원과 국제대회 유치 활동
김 회장은 취임 3개월이던 그해 6월, 17년만에 제10회 아시아 복싱선수권 대회를 서울에 전격적으로 유치하는 성과를 냈다. 이 대회에서 군산체육관 소속의 라이트 미들급 김의진과 슈퍼 헤비급의 김현호 등 7체급을 석권, 종합우승을 차지하면서 김 복싱협회장은 임기의 화려한 서막을 장식한다. 17년 전인 1965년 제2회 대회를 서울에 처음 유치했던 한국은 당시 라이트 플라이급 서상영, 밴텀급 황영일, 라이트 웰터급 박구일 등 군산체육관 소속 선수들이 3체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9체급 중 8체급에서 우승을 차지, 종합우승했다.
한국 아마복싱은 1982년 그해 개최된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도 7체급을 석권, 종합우승을 차지한다. 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거침없이 질주한 한국 아마복싱은 1983년 로마월드컵대회에서 라이트 플라이급 김광선과 미들급의 신준섭이 금메달을 획득한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웰터급의 김동길이 미국의 제리 페이지에게 8강전에서 석연찮은 판정에 고배를 마시자, 김 회장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선수단 철수를 검토한다고 말할 정도로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복싱에 대한 열정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올림픽이 끝난 후 김 회장은 김동길의 선전을 높이 평가해 격려금과 함께 올림픽 동장 연금을 지급하며 위로해주기도 했다.
당시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WBC의 슐레이만 회장은 “믿을 수도, 승복할 수도 없는 도깨비 장난질”이라고 말하며 “양심이 행방불명된 심판진”이라고 비난했다. 이 대회에서는 사실 아프리카가 최대의 희생양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120명의 아마추어 복싱 선수가 출전했는데 단 2명만 4강에 오르자, 아프리카 지역 복싱협회 회장인 튀니지의 호우치 회장은 “만만한 아프리카 선수만 나오면 무조건 탈락시키는 상황”이라면 “AIBA(국제복싱연맹)가 주관한 행사에 더이상 참가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대회였다.
이 대회중 선수단이 꼽은 메달후보인 경량급 4인방 김광선, 허영모, 문성길, 박형욱이 연달아 메달권에서 탈락했다. 당시 국제복싱연맹 부회장이던 김 회장은, 대회 상석을 떠나 뒷편 관중석에서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그만큼 선수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선수들은 성적으로 보답...아마복싱 전성기
이 대회에서 미들급 결승에 출전한 신준섭은 결승에서 미국의 버질 힐과 대결해 3대 2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신준섭은 건국 이후 올림픽에서 복싱 종목에서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주인공이 됐다. 당시 채점은 박빙의 2 대 2 동점 상황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부심이 바로 아프리카 튀니지 국적의 아달라 심판이었다. 아달라 부심은 59 대 59 동점을 채점한 후 신준섭 우세로 판정한 것이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이래 한국 복싱은 36년동안 동메달 6개, 은메달 3개를 땄지만 금메달은 신준섭이 처음이었다. 미국팀은 이 대회중 10개 체급에서 결승에 올라 미들급의 버질 힐을 제외한 9개 체급을 석권했다.
김 회장이 1985년 서울 월드컵복싱대회를 국내에 유치하자, 4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 아마복싱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12체급 전 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라이트 헤비급에 출전한 김유현이 11번째 금메달을 따냈을 때 장내 아나운서가 “한국이 금메달 92개로 중공(중국)과 같아졌다”는 멘트가 나오자 체육관은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한국은 이어 라이트급의 권현규가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인 칸탄치오(필리핀)와 접전을 펼쳐 5 대 0 판정으로 이기며 전 체급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앞서 코파아메리카컵 대회에서 11체급을 석권한 쿠바의 기록을 뛰어넘는 진기록이었다. 1987년 유고 월드컵 복싱대회에서는 김광선이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 1983년 로마월드컵대회에 이어 최초로 월드컵 복싱대회 2회 연속 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1988년 3월 제1회 서울컵을 창설했다. 첫 대회에서 무명의 조동범이 1987년 유고 월드컵대회의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인 불가리아의 폴라코프를 꺾고 유망주로 부상했다. 김 회장은 서울컵 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해 이후에 홍성식, 고지수, 이창환, 양석진, 박덕규, 채성배 등 새 얼굴을 발굴하고 한국팀의 전력을 두텁게 끌어올리는데 헌신적인 역할을 했다.
링 난입 불상사...흥분한 김회장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최한 88서울 올림픽대회에서 한국 복싱선수들은 금2, 은1, 동1 등 4개의 메달을 획득해 올림픽대회 출전사상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불상사는 그해 9월 22일 변정일과 흐리스토프(불가리아)간 밴텀급 2회전 대결에서 일어났다. 뉴질랜드의 워커 주심이 2차례 벌점을 주는 바람에 변정일이 패하자, 당시 대표팀 트레이너 이흥수 감독(상무)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링에 올라가 워커 주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자 삽시간에 40 여명이 링 위로 난입,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전날 오광수와 마이클 카바할(미국) 전에 이어 연속해서 불공정 판정이 내려지자 선수를 지도한 스탭과 관중들이 분통을 터트린 것이다. 김 회장도 화가 나 잠실 복싱 경기장 전원 스위치를 내리라고 지시해 2시간동안 경기장을 암흑천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왜 6대륙에서 선발된 심판진이 88올림픽에서 한국선수들에게 유독 불이익을 주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국제복싱연맹(AIBA)의 당시 회장은 파키스탄출신의 초드리회장이었지만 실세는 에밀 제체프 심판장(불가리아)과 칼 하인스 베어 사무총장(동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88올림픽 심판진 41명중 유럽출신이 12명이 돼 유럽이 유리했다. 둘째로 당시 복싱심판들 숙소를 호텔이 아닌 가락동 페밀리 APT로 배정하는 바람에 심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점이다. 레슬링 등 다른 종목 심판진들은 신라호텔, 워커힐호텔 등에 숙소를 배정했는데, 호텔이 아닌 APT를 숙소로 사용하게 하자 복싱심판들의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나왔었다.
지금으로 보면 거짓말 같겠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간접적으로 이같은 설명이 설득력이 있었다. 변정일의 67분간 링 점거 소동이 일어난 날 이후, 대한복싱협회측이 부랴부랴 복싱심판진들의 숙소를 플라자 호텔을 비롯, 청담동 리베라호텔, 프리마호텔로 옮겼고, 저녁마다 연회를 베풀며 예우를 해주자 더 이상 한국 복싱팀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플라이급 결승에서 김광선이 링 주도권을 잡고 안드레아스 테브스(동독)에 일방적인 공세를 펼쳤음에도 5 대 0 판정이 아닌 4 대 1 판정승을 거둔 대목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칼 하인즈 베어 국제복싱 연맹 사무총장의 입김이 막강하다는 것이 확인된 대목이었다. 이 대회에서 김 회장은 김광선, 박시헌, 백현만 등 3명의 복서가 결승에 진출하자 웃옷을 벗은 채 무전기를 들고 링사이드를 돌면서 심판진들을 향해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대한복싱회장직을 그만뒀지만 2008년 북경 올람픽 8강전에서 기관지 파열로 경기를 포기한 백종섭 선수에게 소리소문없이 위로금 3천만원을 전달하는 등 변함없는 복싱 사랑을 보여줬다. 한국 복싱 부활의 서곡은 제2의 김승연 회장 같은 걸출한 리더가 나타나야 울려퍼질 것이다. 과감한 투자로 선수를 발굴하고 국제대회도 유치하는 등 심혈을 기울일 때 과거의 영광이 재현되리라 믿는다. 한국복싱 건승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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