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스타’ 박노준과 챔프 김태식의 짠한 인연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박노준, ‘의형제’ 김태식 KO패 보며 꺼익꺼익 울었다는데

세계 타이틀전 조인식에서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태식 선수(왼쪽)와 당시 WBC 플라이급 챔피언 아벨라.
세계 타이틀전 조인식에서 기념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태식 선수(왼쪽)와 당시 WBC 플라이급 챔피언 아벨라.

지난해 12월 27일 대한체육회 이사회가 열렸던 서울 잠실 롯데호텔 로비에서 필자는 박노준 안양대학교 11대 총장과 반갑게 인사했다. 박노준 총장은 그야말로 광풍이 몰아치던 80년대 고교야구의 이견이 없는 최고스타였다. 프로스포츠 출신 최초로 대학 총장에 임명된 박 총장과의 만남이 반가운 이유는, 그가 프로복싱 WBA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식, 축구 국가대표 정해원과 함께 1981년 3월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가깝게 지낸 관계임을 필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와 박노준 안양대학교 총장(오른쪽).
필자와 박노준 안양대학교 총장(오른쪽).

‘아이돌 스타’ 박노준, 대학교 총장이 되어

필자가 박 총장을 처음 본 것은 1991년 12월 어느날, 영등포의 한 체육관에서였다. 그때 김태식 챔프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박 총장과 필자는 스쳐가듯 첫 만남을 가졌고 이번이 2번째였다. 처음 만났던 1991년은 그가 쌍방울 소속의 프로야구 선수로 <페넌트 레이스>에서 선동열(해태)을 상대로 역사적인(?) 홈런을 때렸던 해로 기억된다.

당시 김태식은 자신의 친동생인 김태규가 라이트웰터(LW)급에서 MBC 신인왕전 결승에 오른 덕에 동생의 스파링 연습을 위해 체육관을 방문했었다. 김태규는 앞서 11월 23일 준결승에서 나중에 ‘동양의 파바로티’라 불리며 세계적인 성악가로 변신한 조용갑(코리아체)에 3회 KO승을 거두고 결승에 선착한 박원(청담체)과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필자가 기억하는 고교 시절 박노준의 경기는 1980년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에서 광주일고 선동렬을 상대로 2점 홈런을 때리며 5 대 3으로 선린상고를 승리로 이끈 경기와, 1981년 8월 26일 봉황대기 고교야구 경북고와의 결승에서 1회말 홈에 뛰어들다 발목이 돌아가는 전치 6주의 골절상을 입고 실려 나가면서 팀이 6 대 4로 역전패 한 두 경기다. 당시 그의 부상은 KBS 9시 뉴스에 주요뉴스로 방송되었고, 수많은 여고생들이 병원에 몰려들어 지금의 아이돌의 인기를 뛰어넘는 ‘박노준 신드롬’을 연출했다.

선린상고 재학시절의 투수 박노준. 사진=구글
선린상고 재학시절의 투수 박노준. 사진=구글

운명의 1981년 8월 30일 멕시코의 아벨라와 WBC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를 앞둔 김태식은 박노준이 누워 있는 그 병실을 찾아 격려했다. 이틀뒤인 28일에는 조인식을 끝내고 곧바로 다시 병원에 들려 챔피언 벨트를 선물로 주겠다고 굳은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김태식의 경기를 병원에서 TV로 지켜본 박노준은 김태식이 2회 KO패 당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설움에 복받쳐 20분간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박노준은 고려대를 거쳐 프로에 입단(OB베어스) 통산 2할6푼2리의 평범한 타율을 기록했지만, 피안타율 1할7푼3리를 기록한 극강의 선동열에겐 유독 강해 59타수 17안타 2할8푼8리를 기록했다. 당시 타격 천재라던 장효조가 선동열에게 41타수 6안타 1할4푼6리를, 홈런왕 장종훈이 62타수8안타 1할2푼9리의 기록을 낸 것을 유추해보면 박노준의 기록은 더욱 빛난다.

가리봉동을 평정한 ‘스트리트 파이터’ 김태식

30년만에 박 총장과 인사하고 헤어진 후 필자는 김 챔프에게 전화를 걸어 박 총장과 만남을 전하자, 안타깝게도 두사람은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챙이 짧은 모자와 무표정한 모습의 박 총장은 현역시절 별명이 ‘독일병정’ 이였는데 김태식의 닉네임도 ‘독일병정’이었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한 김 챔프는 “박노준이 자신을 낮출 줄 아는 매우 겸손한 후배”라고 회고하면서 조만간 수소문해 연락을 취할 것이라며 반가와했다.

1980년 2월 화끈한 KO승으로 WBA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던 김태식.
1980년 2월 화끈한 KO승으로 WBA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던 김태식.

한국이 배출한 역대 세계 챔피언 중 김태식만큼 화끈하고 통렬하게 정상정복을 한 선수는 흔치 않다. 경량급으로 보기드문 강타의 소유자였던 김태식은 비록 단명에 그쳤지만 팬들에게 프로복싱의 진수를 여과없이 표출한 대표적인 복서였다.

1956년 7월 4일 강원도 동해 출신으로 1971년 상경(가리봉동)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임현호 트레이너에 의하면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건달들이 태식이의 한방에 퍽퍽 나가떨어지면서, 그는 일대를 평정한 스트리트 파이터였다. 그 주먹을 믿고 활약하던 1975년 어느날, 김태식은 노량진의 동아체육관 김현치 관장에게 손편지로 스파링을 요청해 일전을 펼쳤지만, 웬걸! 제대로 손 한번 내뻗지 못한 채 요리조리 피하면서 내던지는 상대의 주먹에 묵사발이 되고 만다. 가리봉동의 ‘하리마오(인도네시아어로 호랑이라는 뜻)’ 김태식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긴 스파링 상대는, 훗날 세계 랭커로 활약한 ‘최문진’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와 정통복서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임을 자각한 김태식은 1976년 3월 21살 늦은 나이에 복싱에 입문하고, 1년여인 1977년 9월 프로 데뷔전에서 고기봉에 3회 KO패 당하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제대로 예방주사를 맞았던 그는 그해 출전한 신인왕전에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됐다. 날개를 단 그는 신인왕전 포함 9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쳤고, 1980년 2월 17일 WBA 플라이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에 다이나마이트 뇌관처럼 터지는 폭발력 있는 펀치로 경기시작 4분11초만에 KO승을 거두고 정상에 올랐다. 김태식은 단숨에 ‘국민 영웅’으로 부상했다.

당시 챔피언이던 루이스 이바라를 매트에 눕히고 세계정상에 등극하는 김태식 챔프
당시 챔피언이던 루이스 이바라를 매트에 눕히고 세계정상에 등극하는 김태식 챔프

정상에 오르자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강원도 출신 대기업 총수들의 모임인 ‘금강회(金剛會)’에서 김태식 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서울 강남의 신반포에 33평 아파트를 구입하며 안정을 찾은 그는 곧바로 방어전을 대비한다. 하지만 그해 12월 2차방어전에서 챔피언 벨트를 내주면서 10개월짜리 단명챔피언이라는 오명을 듣게 된다.

왜 그렇게 허무하게 졌을까... ‘비운의 복서’된 사연

1980년 한국프로복싱은 역사상 최악의 한해였다. 그해 1월 3일 김성준이 나카지마(일본)에게, 2월에는 김상현이 사올 맘비(자메이카)에게, 5월에는 박찬희가 오꾸마 쇼지(일본)에게, 12월에는 마지막 잎새 김태식마저 마테블라(남아공)에게 약속이나 한 듯 차례로 챔피언 벨트를 넘겨주면서 무관으로 전락한 한해였다. 전열을 정비한 김태식은 다음해인 1981년 8월 30일 37전 28승(24KO승) 1무 8패를 기록중이던 멕시코의 안토니오 아벨라와 WBC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를 벌였지만, 4분 46초만에 KO패 하면서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고 만다. 한편 1차방어전에서 김태식을 꺾은 아벨라는 장기집권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다음 푸르덴시오 카르도나(콜롬비아)와의 방어전에서 첫 라운드에 한방에 혼절, 벨트를 날렸다.

필자가 회상하는 김태식은 한마디로 ‘비운의 챔프’였다. 천부적으로 기초체력이 탄탄 했지만 유소년 시절 자전거를 타다 전복사고를 일으켜 오른손 엄지에 장애를 갖고 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건물 3층에서 떨어져 머리에 심한 충격을 입었지만 정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프로에 입문했다. 1980년 2월 정상에 올라서는 롱런의 시발점이 될 줄 알았던 1차방어전에서 필리핀 선수 아로살의 헤드 버팅에 턱뼈가 세 조각이나 떨어져 나가는 큰 부상을 당했다. 결국 그 후유증이 2차방어전의 발목을 잡았다. 그에게 악재가 반복된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만일 그런 진통 없이 경기를 펼쳤다면 특화된 전투본능과 줄기차게 뿜어내는 묵직한 펀치로 고메즈, 자라테, 사모라 등과 함께 세계적인 슬러거 복서 반열에 올랐을 거란 생각이다.

20전 17승(13KO승) 3패를 기록한 후 1982년 은퇴한 김태식은 한때 당구장, 커피숍, 식당 등을 경영하다가 링을 떠난지 25년만인 2007년 5월 필자의 주선으로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서 체육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수년 전 이마저 접고, 지금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끝으로 김태식 챔프와 박노준 총장사이에 끊어진 인연의 철도가 필자의 칼럼이 가교(架橋) 역할을 해 두사람간 새롭게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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