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냐 혁명이냐’ 발터 벤야민의 비극
[홍성광의 독일 작가의 사랑이야기] 20세기 최고 지성의 비극적 사랑 연인 라치스, “혁명적 미학”에 눈뜨게 해 벤야민은 사랑을, 연인은 혁명을 바라봐 최고 지성 “사랑은 사회변혁의 원동력”
20세기 인류 지성사에서 최고의 지성 중 하나로 꼽히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 그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 번역가로 문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독립적인 사상가로서 테오도르 W. 아도르노(1903~1969)와의 우정을 바탕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와의 우정과 협력, 연인 아샤 라치스(Asja Lācis, 1891∼1979)와의 만남은 그의 사상과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연인 라치스와의 관계 역시 비극이었다. 둘의 사랑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한 ‘운명적 만남’으로 자주 언급된다. 사랑과 혁명. 둘의 이야기는 지적 동반자, 혁명적 열정, 그리고 비극적 어긋남이 얽힌 복합적인 이야기 그 자체다.
여성 혁명가와의 운명적 만남
1924년 5월, 20대 후반이던 벤야민은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연극 연출가 아샤 라치스를 만난다. 그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연극과 프롤레타리아 교육극 운동의 선구자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몰라 견과류 상점에서 버벅대고 있는 라치스에게 통역을 해주겠다며 젊은 벤야민은 다가갔다. 그렇게 첫 만남이 이뤄졌다. 벤야민은 지적인 여인 라치스에게 끌려 곧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에게 라치스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역사의 현현(顯現) 같은 존재로 느꼈다. 그는 편지에서 그녀를 ‘운명적 여인’, ‘나의 별자리’, ‘혁명적 마돈나’라고 열렬히 환호했다.
소비에트 출신인 그녀 덕분에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에 본격적으로 눈뜨게 됐다. 후일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연결고리도 마련했다. 그녀의 연극적 실천, 특히 ‘거리극’과 아동극 실험은 벤야민의 예술·정치 이론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그는 라치스를 통해 사랑은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역사와 혁명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체험했다.
그녀와의 만남은 벤야민의 삶에 지적·정서적 전환점이 됐다. 이후 그는 점점 좌파적·물질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갔다. 하이네적 낭만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문화 비평가로 변모해갔다.
사랑과 지적 교류, 그리고 혁명
아샤 라치스는 1891년 라트비아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러시아 혁명후 볼셰비키 문화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연극을 연출하며 아동극과 노동자 교육극에 힘썼다. 그녀는 예술을 혁명 교육의 수단으로 보았다.
벤야민은 라치스에게 강한 사랑을 느낀 반면, 혁명적 동지로서의 유대에 더 집중한 그녀는 그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벤야민은 편지에서 라치스에 대해 ‘러시아 별, 나를 혁명으로 인도한 여자’로 묘사한다. 그녀는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적 실천에 몰두했고, 벤야민은 유대 지식인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점점 매혹되면서도 완전히 ‘혁명가’로 변모할 수는 없었다. 벤야민의 연구는 그녀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사랑과 혁명의 교차점
첫 만남 후 2년 뒤 벤야민은 라치스를 만나기 위해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모스크바 일기』(1926∼27)의 배경이다. 라치스와 함께 한 모스크바 체류 경험의 기록인 『모스크바 일기』는 라치스에 대한 열정과 동시에 혁명 이후의 소련 사회를 탐색한 철학적 기록이다.
여기서 벤야민에게 사랑은 단순한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도시를 읽고, 역사를 탐색하고, 예술과 정치의 긴장을 인식하는 렌즈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은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렇지만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그녀와 함께 살지도, 완전히 헤어지지도 못하는 모호한 관계였다. 왜냐하면 라치스는 한 남자의 애인으로 살기엔 야심만만하면서도 ‘요부’ 같은 여성이었다. 그곳에서 벤야민은 당시 라치스의 동거인이었다가 후에 남편이 된 연출가 베른하르트 라이히(Bernhard Reich) 사이에 어색하고 애매한 삼각관계에 엮인다. 붉은 군대의 장군 일료샤마저 그녀를 연모했다.
『모스크바 일기』를 보면 라치스는 냉정하고 현실적이며, 혁명 활동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벤야민은 한 소련여인과 사랑에 빠진 서구 지식인으로 묘사된다. 그녀에 대해서는 감정적 거리감과 이념적 단호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으로 나온다. 일기에서 그는 “그녀는 나를 보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일 속에 있고, 나는 그녀의 세계에서 이방인이다”라고 썼다.
벤야민에게 사랑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불가능한 사랑과 혁명의 현실성 사이의 간극이다. 당시 병을 앓고 있던 라치스는 모스크바에서 아동극과 혁명극의 연출에 몰두하고 있었다. 벤야민은 그녀 곁에서 절망적인 심정으로 관찰자의 태도를 유지했다. 그녀는 ‘혁명’을 사랑하고,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했다.
이처럼 그의 사랑은 사유의 심연 속에서 타올랐다. 둘 다 이상을 사랑하지만, 그 이상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 비극적 거리감이 벤야민을 ‘냉철한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으로 밀어넣었다. 하여 그의 사랑은 감정에서 사유로, 욕망에서 인식으로 변해갔다.
이 시기 벤야민은 라치스를 통해 소련의 예술 현실을 관찰하며, 예술의 정치화, 대중의 각성, 혁명의 언어학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갔다. 훗날 아도르노와 브레히트에게 영향을 준 ‘변증법적 미학’의 씨앗이 이 시기에 뿌려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구애와 번민
벤야민은 아샤 라치스의 입술과 살(육체)을 소유하려는 일념에서 모스크바 체류 중 책, 과자, 케이크, 실크 블라우스, 인형 등의 선물 공세를 퍼붓었다. 벤야민이 누구인가? 그가 전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권위 있고 선구적이라 평가받는 ‘물신주의의 비판자’라는 점에서, 이런 선물 공세는 곧 자기모순이라 할 수 있었다.
벤야민이 기민하지 못한 동작으로 어눌하고 소심스럽게 키스해 달라고 요청하면, 라치스는 고양이 같은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그를 밀쳐냈다고 한다. 그녀는 애매하고 유약하게 보인 그의 형이상학을 들이밀며 번번이 그를 닦아세웠다. “그런데 문화의 대가라는 너는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 거야? 네 동생은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너는 왜 그러지 않는 거야?”
라치스는 벤야민이 ‘역사 유물론’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의 영향으로 벤야민은 이후 ‘역사 철학 테제’,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에서 자본주의 비판과 사회 혁명적 시각을 심화시켜갔다. 공산주의의 현실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그녀는 벤야민의 유대 신비주의에 마르크스의 현실적 정치변혁의 맹아를 심어주었다. 벤야민 또한 그녀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에 빠졌을 그 당시, 라치스에게 가는 길이 일방통행로인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로의 길도 벤야민이 걸어가야 할 일방통행로가 되었다.

이별과 여운
하지만 가슴 뛰며 떠났던 모스크바 방문은 절망과 좌절로 끝났다. 그녀는 자신도 벤야민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벤야민의 잘못으로 그러질 못하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벤야민은 자기와 결혼하려던 그녀의 의지 속에 악마가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녀도 이 말에 동의하면서도 병이 나은 지금은 악마가 들어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벤야민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라치스는 말했다. “울지마. 안 그러면 나도 같이 울게 돼. 나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너처럼 금방 그치지 못해.” 둘은 힘껏 껴안았고 벤야민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작별했다.
라치스에 대한 벤야민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않은 채 비극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구원이 지연된 사랑’으로 남았다. 『역사 개념에 대하여』책에서 그는 역사 속의 구원은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순간적 섬광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라치스와의 사랑도 그러한 섬광, 즉 구원적 파편이었다.
두 사람은 점차 멀어졌다. 라치스는 소련으로 돌아가고, 벤야민은 독일에서 지식인 망명자로 살아간다. 이후 라치스는 1930년대 스탈린 정권의 숙청 시기에 체포돼 수용소에 갇혔다. 벤야민은 1940년 9월 27일 독일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망명하려던 중 스페인 국경 지역 마을 포르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르핀 과다복용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최고 극작가 브레히트와의 만남
라치스와 교류가 이어지던 1929년 5월 그녀의 소개로 벤야민은 6살 아래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이리하여 벤야민의 삶에 전적으로 새로운 요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원천적 힘’이 들어오게 된다. 이 무렵 비교적 느슨한 관계에 있던 아도르노와의 관계도 더 분명해졌다. 라치스가 벤야민을 ‘혁명적 미학’으로 이끌었다면, 이후 브레히트는 그의 사유를 ‘사회비판적’ 형식으로 구체화했다.
1929년부터 벤야민의 사상에는 마르크스적 요소가 더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아샤 라치스와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벤야민은 브레히트를 통해 사랑에서 배운 ‘감정의 거리두기’를 ‘예술의 거리두기’로 발전시켰다. 개인적 경험인 사랑의 비극을 정치적 예술의 원리로 전환시킨 셈이다.
사상의 안내자 아샤 라치스
벤야민과 라치스는 직접 함께한 시간보다 편지를 통한 교류가 훨씬 더 길고 깊었다. 그는 긴 편지 속에서 라치스에게 자신의 철학적 단상, 꿈, 불안, 희망을 고백했고, 라치스는 그를 위로하거나 현실적 거리를 두기도 했다. 편지는 단순한 연애의 도구가 아니라, 벤야민에게는 사유의 실험실이었다.
벤야민은 편지에서 사랑을 단순한 개인적 감정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 변혁의 원동력’으로 보아다. “당신과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교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혁명의 불꽃처럼, 기존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힘입니다.”
라치스는 벤야민에게 연인이자 혁명과 예술의 화신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사랑을 개인적 체험에 머물지 않고, 철학·미학·정치적 사유와 결부된 ‘구원의 가능성’으로 옮아가게 했다. 라치스와 헤어졌음에도 벤야민은 죽기 전까지 그녀를 잊지 않았다. 그는 『일방통행로』라는 저작을 아샤 라치스에게 헌정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삶과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이 길은 그 안의 많은 이정표들처럼 한 여성에게 속한다. 그녀는 아샤 라치스이고, 엔지니어로서 저자의 생각의 건축 부지를 열어젖혔다.”
이 문장은 벤야민의 내면에서 사랑과 혁명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구절이다. 이 길, 즉 일방통행로는 자신의 삶의 궤도를 의미하는 은유다. 이정표들은 책 안에 배치된 짧은 단상과 성찰들이었다. 엔지니어라는 표현은 그녀가 그의 삶과 사유에 길을 터주고 구조를 새롭게 바꾸었다는 은유다. 이런 점에서 아샤 라치스는 단순한 연인이라기보다, 벤야민을 새로운 세계, 즉 소련 아방가르드 예술과 혁명적 정치사상으로 인도한 인물이다.

라치스와의 만남을 통해 이후 벤야민은 기존의 낭만주의적·형이상학적 문학비평에서 벗어났다. 대신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역사 철학 테제』와 같은 혁명적·정치적 관점을 담은 저작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아샤 라치스는 벤야민의 삶에 혁명적 여성, 매혹적인 연인, 그리고 사상의 안내자로 남아 있다.
사랑은 벤야민 사유의 원형
벤야민에게 사랑은 사유의 체험적 원형이었다. 단순히 ‘개인적 감정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 인식의 기법’이었다. 그들은 낭만적 연애관계가 아니라 혁명적 열정과 지적 교류 속에서 불완전하게 이어진 특수관계였다. 벤야민은 역사를 ‘폐허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것’으로 보았다. 라치스와의 사랑 역시 현실에서는 폐허로 끝났지만, 그의 철학에서는 영원히 반짝이는 잔광으로 남은 셈이다.
벤야민과 라치스의 사랑은 또한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건이었다. 불가피한 매혹, 파괴 속의 창조, 결핍으로서의 충만, 그림자를 통한 자기 발견, 이 모든 역설이 한 여인의 얼굴 속에서 빛났다. 벤야민은 그 빛을 붙잡으려 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그러나 잡지 못한 그 빛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의 글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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