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히틀러, 사랑도 스토커처럼
[홍성광의 독일 작가 사랑이야기] 히틀러의 독단적이고 억압적인 사랑 짝사랑 앞에 나서지 못한 채 ‘집착’만 비극으로 끝난 조카와의 금지된 사랑 에바 브라운, 변덕과 폭력, 통제의 사랑 브라운과 결혼식 다음날 동반자살
극우 전체주의 나치즘의 화신,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그의 포악한 정치적 이미지 만큼 여인과의 사랑에서도 복잡하고 비극을 연출했다. 그의 연애사는 인간관계에서도 권력, 통제, 그리고 비극적 결말을 암시했다. 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연인으로는 ‘첫사랑’ 슈테파니 이자크, ‘금지된 사랑’ 겔리 라우발, ‘비공식적인 연인’ 에바 브라운이 그들이다.
첫사랑, 슈테파니 이자크

독재자 히틀러의 첫사랑 상대는 슈테파니 이자크(Stefanie Isak, 1887∼1975)라는 두살 위 소녀였다. 그녀는 히틀러의 청소년기 일방적인 짝사랑 상대로,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여성이다. 그녀의 성 ‘이자크’ 때문에 유대인 혈통 의혹을 받았으나, 사실이 아니다.
1905~1907년 린츠 시절, 10대 히틀러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4년 동안 멀리서만 바라보며 상상 속 사랑을 키웠다. 그는 강렬하면서도 일방적 관심을 갖고 그녀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녔으나, 직접 말을 걸거나 접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히틀러는 슈테파니의 정보를 수집하고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보는 식이었고, 교류 없이 일방적인 동경과 집착에 빠져있었지만, “그녀를 사랑했다”고 믿었다. 슈테파니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적인 태도는 그 사랑이 단순한 첫사랑의 열병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망상과 통제 욕구의 초기 형태로 해석될만한 것이었다.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던 히틀러
슈테파니는 히틀러의 사랑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히틀러의 짝사랑도 종지부를 찍었다. 그녀는 1950년대가 되어서야, 히틀러가 자살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는 “익명의 연애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확인했는데, 그 편지의 발신자는 자신이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공부할 예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편지를 히틀러와 연결 지은 적이 없으며, 나치가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다.
히틀러는 슈테파니가 어머니와 함께 매일 오후 오스트리아 린츠의 란트슈트라세(Landstraße)를 산책한다는 것을 알고, 친구 쿠비첵(Kubizek)과 함께 길목에서 그녀를 몰래 지켜보았다. 하지만 직접 말을 걸지 않자, 친구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히틀러는 “내일 하겠다”며 미루거나, “아직 적절한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나설 용기조차 없었던 일방적 짝사랑이었다.
망상 속의 사랑
히틀러는 슈테파니를 자신의 미래의 아내로 상상하며, 그녀를 위한 르네상스 양식의 저택 설계도까지 구상했다고 한다. 또 자신과 첫 대면을 하면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녀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고, 그녀가 젊은 장교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질투심과 분노를 느꼈다. 그녀를 유괴하거나 동반 자살할 극단적 상상을 키우기도 했다.
이 일화는 히틀러의 대인관계, 특히 여성에 대한 복잡한 태도를 분석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청년기 히틀러의 내면적 고립과 낭만적 환상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 짝사랑 이야기는 히틀러의 사회적 고립과 현실 도피 성향을 반영하는 사례로서, 그의 성격 형성과 권력적 욕망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열쇠로 간주된다.
2. 금지된 사랑, 겔리 라우발

겔리 라우발(Geli Raubal, 1908∼1931)은 히틀러의 조카로 9살이나 어렸다. 그녀는 히틀러의 이복누이였던 앙겔라 히틀러의 딸로, 어린 시절부터 외삼촌인 히틀러와 함께 살았다. 라우발의 아버지는 그녀가 두 살 때 사망했는데, 나중에 히틀러가 그녀의 후견인이 됐다. 그녀는 1927년 뮌헨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히틀러는 별 재능도 야심도 없는 어린 조카를 유명한 음악 선생들에게 보내 바그너 오페라 여주인공으로 만들려 했다.
1925년 겔리가 히틀러의 집으로 이사한 후,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이 때부터 깊은 애정을 느꼈던 히틀러는 그녀의 사생활을 제한하는 등 극도로 통제했다. 이로 인해 겔리는 심리적 압박을 느꼈다고 한다.
1927년 히틀러의 운전사였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 SS 공동 창립자)가 겔리 라우발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히틀러는 격노했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하고, 다음해에 모리스는 해고해버렸다. 당시 겔리는 미성년자였기에 후견인인 히틀러의 동의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1928년 이른 여름에 모리스는 겔리의 방에 있다가 들키자, 히틀러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모리스를 위협했고, 그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간신히 도망쳤다고 한다.
겔리 라우발의 비극적인 죽음
1931년 9월 18일, 23세의 겔리 라우발은 히틀러의 권총으로 자살하며 비극적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은 히틀러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고, 그의 정치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다. 몇 주 동안 그는 신경 발작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며, 몇 번이나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 심지어 목숨을 끊겠다는 암시를 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겔리를 애지중지하며 보호했다고 하지만, 그녀가 히틀러에게 옭아매였고, 자유롭지 못한 생활에 고통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겔리의 자살 원인이 연인이었던 히틀러와의 관계에서 오는 정신적인 압박감 탓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는 연인의 모든 행동을 철저히 통제하며, 그녀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금지했다. 현대판 스토커처럼, 히틀러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경찰 조사에서 집안의 하녀들은 그날 오전 히틀러와 겔리가 심하게 다퉜다고 증언했다. 동생인 레오 라우발은 겔리가 우울증을 앓거나 자살할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고, 연인이었던 에밀 모리스는 그녀가 ‘황금 새장’에서 갇힌 생활을 하며 힘들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히틀러는 겔리가 성악가로 데뷔하려 했으나 심적 부담을 견디지 못했다며 자신과의 연관설을 부인했다. 변태적인 히틀러 탓에 겔리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자살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히틀러는 훗날 그녀와의 관계가 ‘세대 차이’로 인해 실패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는 젊은이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는데, 이는 히틀러 유겐트(나치 독일의 당 및 관영 청소년 조직. 독재자 우상화 교육을 담당했던 기관-편집자주)의 조직 원칙으로 이어졌다.
3. 비공식적인 연인 에바 브라운 (Eva Braun, 1912∼1945)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의 가장 오랜 동반자이자 비공식적인 연인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23살이나 어렸던 그녀는 1932년경부터 1945년 동반 자살할 때까지 히틀러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녀와의 연인관계는 공개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대중 앞에 내세우는 것조차 피했다. 그녀와 함께 별장에 거주하며 비공식적인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
1945년 4월 29일 나치치하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히틀러와 에바는 총통 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다음날 동반 자살했다. 그는 파면이나 항복을 수치로 여겨 이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당시 베를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독일 국방군은 무조건 항복을 앞둔 상태였다.
수차례 자살 시도
에바 브라운은 수도원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뮌헨의 사진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29년 17세의 나이에 그곳에서 23살 연상의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 이후 히틀러는 에바를 자주 저녁 식사, 음료 모임, 영화 관람 등에 초대하며 가까운 관계로 발전시켜나갔다. 조카 겔리 라우발이 자살한 후, 히틀러는 1932년부터 에바와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에바 브라운은 소박한 꿈과 단순한 생각을 가진 아가씨였다. 사랑, 유행, 영화, 수다 떠는 일 등이 주요 관심사였고, 히틀러에게 버림받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러면서도 히틀러의 이기적인 변덕과 폭력적인 행동에 고통받는 여자였다. 규제 욕구가 강했던 그는 그녀에게 일광욕, 춤, 담배 등을 금지시켰다. 그녀는 일기에서 “그는 나를 이토록 괴롭히면서 왜 곧장 끝내지 않는 걸까?”라고 적었다.
에바가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은 1932년 8월의 일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단순한 ‘관심 끌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한다.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1932년 11월 히틀러가 선거운동으로 바쁘자, 홀대를 받는다고 느낀 에바는 다시 권총으로 자살 시도를 했다. 1935년 5월 말에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또 자살을 시도했다. 히틀러는 담당 의사로부터 이 사건이 연극이 아니었음을 확인받고, 그녀에게 뮌헨 부촌 보겐하우젠의 저택을 선물했다.
히틀러는 그녀를 공식석상에 거의 동반하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관계는 극비였다. 히틀러는 1936년부터 그녀와 함께 별장에서 살았지만, 그녀를 단순한 가사 담당자나 개인 비서로 소개할 뿐이었다.
불안정한 관계
반면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인정해주길 원했고, 국가의 공식적인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히틀러에 대해 그녀 또한 “히틀러의 뜻에 절대적으로 따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목격자들은 이들의 관계가 조화롭지 않았으며, 히틀러가 자주 그녀를 무시하거나 모욕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에게 진정한 애정을 가졌는지, 또는 그들의 관계에 성적(性的)요소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지속중이다. 히틀러 전기 작가 요아힘 페스트는 “겔리 라우발과는 달리, 에바 브라운은 단순히 히틀러의 정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지위에서 오는 모든 두려움과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라고 평가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에바 브라운이 히틀러의 독재와 폭력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환상적인 세계’에 갇혀살았다고 평가한다. 그녀는 히틀러 지배하의 전쟁 참상과 국민들의 고통을 무시한 채 별장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전쟁 기간동안에도 에바는 히틀러와 함께 이탈리아로 휴가를 가는 등 사치스러운 여행을 했다. 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그녀는 ‘히틀러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만 염려했다.

독단적이고 억압적인 사랑
독재자였던 히틀러의 연애사는 일반인의 사랑 이야기와는 달리 그의 권력과 통제 욕구, 그리고 심리적 불안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면, 그가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기이하고 독단적이며 억압적이다. 겔리 라우발과의 관계는 특히 더했다.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성격 탓에 9살이나 어린 조카이자 연인이었던 겔리가 겪었을 정신적 압박은 그 관계의 비극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또 에바 브라운과의 관계 역시 히틀러의 권력과 지배욕 등 감정의 복잡한 얽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 독재자는 많은 문제와 의문점을 남기고 역사의 기록으로 사라진다. 히틀러의 연애사는 히틀러의 인간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단순한 개인적 관계를 넘어, 그의 정치적 성향과 인간적 약점을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사랑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정치적·권력적 욕망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관계들은 히틀러라는 인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창이 되어 준다. 우리의 독재자도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될 많은 흔적을 남겨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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