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의 정치철학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소년은 왜 국가폭력의 현장에 있었나 ‘그래야할 것 같아서’라는 정치참여의식 잔혹함과 폭력에 맞서는 ‘존엄성’의 동기 다시 국가폭력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왜 소년이었을까?
뉴스를 보고 듣는 게 답답하기만 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권내 권력 다툼에다 날마다 새로운 게 터져 나오는 명태균 녹취록은 허탈한 한숨만 쉬게 만든다.(이 글은 윤석열 대통령의 기자간담회 전에 쓴 글입니다.-편집자주) 이런 와중에 들려 온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작가의 소설 몇 편을 들추어 보았다.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소년이 온다』부터 다시 읽었다. 또 한 번 큰 감동을 받았고, 이번에는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도 깊이 고민해 볼 만한 많은 생각거리까지 얻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이 소설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에서 희생당한 한 소년 시민군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 중학생 동호는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이었던 16살 문재학군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나와 동갑이다. 그때 나는 광주의 민주 항쟁을 무슨 폭동이라고만 알고 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항쟁이 끝난 다음 날 아침인가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폭동이 진압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했던 기억마저 있는데, 진실을 알고 난 이후 그 기억은 내 평생의 부끄러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가가 5.18을 소설로 다루면서 어린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나는 두 번이나 이 소설을 읽었지만, 두 번 모두 눈물과 한숨 때문에 몇 번씩 읽기를 중단해야 했다. 다름 아닌, 어린 소년이 주인공이라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지 싶었는데, 이게 작가가 의도한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11살 때 광주의 비극을 담은 사진첩을 보고 충격에 사로잡혔던 이야기를 전하던데, 혹시 그 어린 시절의 깊은 울림 때문에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어쨌든 소설을 읽으며 나는 계속해서 의문에 사로잡혔다. 왜 아무런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던 상황에서 가족과 다른 시민군의 만류에도 끝까지 도청에 남아 있었을까? 이 소년 시민군의 참여 동기가 다른 시민군들과 별달랐으리라는 짐작 때문은 아니다. 다만 어린 소년조차도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의 특별함과 절박함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작가는 소설에서 무슨 명시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다른 시민군의 증언을 인용하는데, 여기에 짙은 암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하지도 않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소설 속 동호도, 실제의 문재학군도, 딱 이런 심정이었을 테다. 울컥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지는 결코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왜 정치에 참여하는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그러던 중 작가가 맨부커상 수상 이후 노르웨이 문학의 집에서 했던 강연의 원고를 접했다. 작가는 여기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읽고 5월 광주와 연결시켰다는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라는 동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화는 죽음 이후의 환상적 세계 속에서 연약한 이들이 연대를 통해 무자비한 독재자와 맞서 싸우고 결국 승리를 쟁취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란다.
작가는 여기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인용한다. 사자왕 형 요나탄이 동생을 안전한 곳에 남겨두고 자기 혼자 독재자와 싸우러 가야한다며 동생을 설득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요나탄은 자기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싸움에 나서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지.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와 다를 게 없으니까.”
한강 작가가 어린 시절 읽으면서 광주의 비극과 연결시켰다는 이 동화의 이런 대목이 나중에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쓸 때 어떻게 반영이 되거나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모종의 연속성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작가가 말한 바, 그건 ‘인간의 잔혹함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그런 싸움은 단지 1980년 5월 광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든 늘 있었고, 소설이나 동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아니 5월 광주의 문재학‘들’처럼, 소년들도 완전히 비켜갈 수 없다. 어쩌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 소설의 영역자 데보라 스미스는 제목을 “Human Acts”라고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정말 특별한 모델 하나를 발견한다. 서구의 정치철학 전통에서는 정치 참여의 의미를 이해하는 두 가지 정도의 모델이 있다.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치적 삶을 그 자체로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공화주의자 필립 페팃처럼 자유를 위한 유용한 도구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작가 한강은 이 소설에서 이들과는 다르게 폭력과 모욕에 맞선 저항이라는 차원에서 정치적 참여의 동기와 의미를 찾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나 참여는 인간을 짓밟고 모욕하는 폭력이나 잔혹함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참여를 꼭 5.18에서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의 행위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회의 폭력과 불의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모욕 행위들에 마주하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은 그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정의를 지켜내고 상처 입은 자들을 어루만지며 자신과 이웃들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또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정치인이나 특별한 영웅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평범한 시민들, 심지어 소년들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 싸움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런 싸움 속에서만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어서다. 정치적 삶과 참여가 가장 인간다운 삶 그 자체라고 말하는 건 시대착오적일 터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우리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유용한 도구라고만 말하면 기본적으로 옳은 것 같아도 어딘가 허전하다. 작가 한강이 확인했다고 믿듯이, 우리는 폭력과 모욕에 맞서 싸우는 그 정치적 활동에서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증명한다. ‘권력정치’와는 다른 ‘시민정치’의 동기와 의미를 이보다 더 잘 보여 줄 수 있을까?
정의로운 전쟁이 가능한가?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런 이해는, 작가가 마주했듯이, 우리에게 정말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많은 인문학적 접근법들이 인간의 도덕적 고귀함에 관해 이야기해 왔지만, 그 고귀함을 처참하게 짓밟는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함을 함께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다른 인간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놓치지 않는 접근법이 없지는 않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데서 드러나고 확인되는 인간다움의 숭고함을 함께 포착하지는 못한다. 사실 작가도 단지 물음으로서만 던진 인간의 이런 불편한 양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야 할지는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인문학적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누구보다도 앞장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옹호해 왔던 올해 아흔 여섯 살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작년 말, 자신의 제자이자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라이너 포르스트와 함께,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이 ‘원칙적으로 정당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성명서는 연대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하마스의 무자비한 테러를 비판하고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옹호했다. 나의 학문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하버마스를 필두로 한 이 ‘비판이론’ 그룹의 성명서를 보며 나는 경악과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거의 제노사이드(인종청소)라고 해야 할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가자 공격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명분을 들어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성명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하마스의 잔혹한 테러에 자극받았고,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성찰을 국가 정체성의 일부로 여기는 독일에서 새롭게 일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흐름에 경종을 울리는데 일차적인 초점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강조한 성명서에는 가공할 폭력 앞에서 절규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도 없었다. 왜 연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앞에서는 멈추고 마는지, 왜 보편적 인간 존엄성의 가치는 가족도 학교도 병원도 잃어버린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은 보듬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진보를 지향한다는 철학의 이런 일탈과 무능이 그저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언급해 둘만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몇몇 ‘진보’ 인사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전쟁 행위를 옹호하는 발언들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니아에 대한 침공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 질서에 대한 저항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서, 거의 푸틴이 했을 법한 어조로 우크라이나의 일방적인 친미, 친서방 노선이 문제라고 러시아를 두둔한다.
물론 그들의 초점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맞서 살상 무기를 제공한다느니 북한군에 대해 폭격을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한반도로 끌어 오려는 정부 여당의 움직임에 반대하려는 데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수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물론 자국민들을 죽게 한 러시아의 가공할 전쟁 폭력을 진보의 이름으로 옹호한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반미가 평화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인지, 그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존엄한 삶의 가능성을 박탈당해야만 하는 극단적 비극 상황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지난 대선 때도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치 젤렌스키의 무능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데, 이런 일이 반복될까 걱정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고도 가자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언급하며 축하 행사를 거부한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초래하는 잔혹한 폭력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절대적 반명제다. 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여기서 예외여야 하는가? ‘정당한 전쟁’ 또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게 정말 있을 수 있을까? 그 어떤 가치나 명분이 숱한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황망하게 세상을 등져야 하는 상황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스라엘을 수호하겠다는 네탄야후의 명분 뒤에 부패 혐의를 덮고 집권을 연장하겠다는 정치적 야욕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치화된 우크라이나의 해방이라는 푸틴의 깃발 뒤에 범슬라브주의라는 허깨비 같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음도 안다. 지금 정치적으로 극한적인 궁지에 몰린 윤석열 정권의 위정자들이 그런 종류의 야욕이나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정말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야욕과 망상에 맞서 싸우지 않고는 우리의 인간적 존엄성은 언제든 부서지고 상처 입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싸움의 시간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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