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둥이 괴테, 74세에 청혼한 ‘마지막 연인’
[홍성광의 독일 작가들의 사랑 이야기] 55살 어린 19세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청혼 은근한 사랑 나눴지만, 울리케 어머니가 거절 울리케 “어머니가 받아들였으면 허락했을 것” 크게 낙심한 괴테, ‘마리엔바트의 비가’ 남겨
괴테의 여성 편력
지난 회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데리케의 사랑 이야기를 한 데 이어 이번에는 울리케 폰 레베초(Ulrike von Levetzow, 1804~1900)와의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괴테는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의 사랑에 실패하고 각지를 떠돌던 중 문필가 조피 폰 라 로슈(Sophie von La Roche, 1731~1807)의 딸 막시밀리아네에게 연정을 느꼈지만 그녀가 상인 브렌타노와 약혼하고 이듬해 결혼하자 심적 타격을 받는다. 그러다가 릴리 쇠네만을 만나 사랑하고 약혼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듯했으나 귀족인 그녀와의 신분 차이로 파혼하고 만다.
바이마르에 가서는 7세 연상의 샤를로테 폰 슈타인(Charlotte von Stein, 1742~1827) 부인과 플라토닉 러브를 했으나 괴테가 말없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조화공(造花工)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Christiane Vulpius, 1765~1816)를 만나 18년 동안 동거하다가 마침내 결혼했다. 1814년에는 마리안네 빌레머와 사귀면서 그 결과물로 『서동시집』을 내놓았다. 이 시집에서 괴테는 마리안네를 줄라이카로, 자신을 하템으로 호칭했다.
그리고 괴테의 마지막 사랑은 울리케 폰 레베초와의 사랑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자그마치 55세였다.
괴테는 이처럼 많은 여성들과의 사랑에서 무한한 영감을 얻어 많은 작품을 썼다. 주변에 좋은 여성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괴테의 그 많은 작품들은 창조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 『파우스트』 2부 끝에 나오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말은 괴테가 여성과 여성적인 것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었느냐를 짐작하게 한다.

레베초가(家)와의 인연
괴테가 레베초 집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괴테는 온천지 카를스바트에서 옛날 라이프치히 대학생 시절에 알았던 남작 폰 브뢰지케의 딸 아말리에 폰 레베초(Amalie von Levetzow, 1788~1868)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폰 레베초와 갓 결혼해 두 살짜리 딸을 둔 유부녀였다. 괴테는 그녀에게 ‘판도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같이 산책하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괴테는 산책하던 중 자신의 시와 실러의 시 중 누구 것이 더 좋은지 난처한 질문을 했다. 아말리에는 두 사람의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실러의 시에서 약간 느낌을 받는다고 답했다. 괴테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그녀를 우호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아말리에와의 만남은 실러의 죽음으로 인한 허탈감, 프랑스의 침공으로 인한 고통, 동거녀 크리스티네에 대한 권태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1810년 아말리에는 어린 세 딸을 데리고 테플리츠에 나타나 괴테와 반갑게 해후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3세에 불과했지만 이미 이혼을 한 뒤 전 남편의 사촌과 재혼한 상태였다. 그 후 재혼한 남편은 1815년 나폴레옹을 격파한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그녀는 미망인이 되었다.
울리케와의 첫 번째 만남
11년이 지난 1821년 7월 29일 괴테는 새로운 온천지로 각광받고 있던 보헤미아의 휴양지 마리엔바트(Marienbad)에서 아말리에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혼과 재혼, 사별을 통해 조금 굴곡진 삶을 살았지만 특유의 밝은 표정과 사교성은 잃지 않았다. 괴테가 어느 백작의 초대로 손님으로 오게 된 집에 아말리에 가족이 살고 있었다.
괴테는 아말리에의 세 딸 중 맏딸 울리케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때 그녀는 17세에 불과했다. 그녀는 스트라스부르에서 기숙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괴테가 프리데리케를 사귈 때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던 터라 둘에게는 공통 화제가 있었다. 그녀는 젊었기에 아름다웠을 뿐 낭만적이지도 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않았다. 괴테는 그녀를 산책길에 데려가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장시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괴테는 그녀에게 문학과 예술 이야기를 해주면서 초콜릿과 꽃 같은 것을 선물하며 자신의 신간을 건네주기도 했다. 울리케는 괴테가 대단한 학자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를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를 신뢰했다. 괴테는 울리케를 통해 다시 한 번 청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불탄다. 메피스토가 조제한 회춘약을 먹고 다시 젊음으로 돌아간 파우스트처럼.
울리케와의 두 번째 만남
다음 해인 1822년 6월 19일 괴테는 레베초 가족과 같은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괴테는 외적으로는 광물 수집 등 자연현상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울리케는 이제 10대 후반의 청순한 여성으로 괴테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괴테는 선뜻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한다.
그는 시와 음악 그리고 예술에 대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은근히 표현했다. 울리케는 그에게 점차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지체 높은 사람’에게 존경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괴테는 그녀의 어머니 아말리에에게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싶다는 말도 했고, 또 “나는 울리케에게 커다란 부성애적 사랑을 갖고 있소. 아주 내 스타일로 그 애를 교육시키겠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짓는 시를 쓴다.

괴테를 존경하는 울리케
그리고 다음 해인 1823년 7월 2일 괴테는 다시 마리엔바트로 가서 울리케를 만났다. 이때 한층 성숙해진 울리케는 19세였고 괴테는 74세였다. 그녀는 얼굴이 갸름하고 키가 컸으며, 푸른 눈에 오뚝한 콧날을 가진 금발 미녀였다. 괴테는 스트라스부르 시절의 프리데리케를 회상하며 그녀에게 젊은이들과 똑같은 열정을 보였다.
50여 년 전인 1770년에 괴테는 18세의 프리데리케를 만나 감성적인 접근을 했고, 1823년의 괴테는 울리케에게 이성적인 차분함으로 접근했다. 세월이 흘러 격정적인 사랑 방식이 원숙한 사랑으로 변했다. 한편 35세의 원숙한 여인 아말리에는 괴테에게 흠모의 정을 품고 있었다. 괴테는 낮에는 문학 작품을 완성하고 광물을 수집하면서 보내고, 저녁에는 무도회에 참석한다.
그해 7월 11일 이후 괴테는 울리케와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면서 7월 중순까지는 울리케를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딸처럼 생각하며 며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괴테는 시를 읽어주며 그녀를 교양 있는 여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울리케는 여전히 괴테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존경하고 있었다.
괴테와 울리케의 은근한 사랑
그런 뒤 사람들은 괴테와 울리케가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니는 것을, 저녁에는 단둘이서 몇 시간씩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괴테는 귀한 초콜릿과 함께 사랑을 갈구하는 헌시를 울리케에게 전하기도 했다. 괴테는 꿈과 환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애를 태운다. 울리케는 점차 괴테의 관심을 이해하고 이를 다정하게 받아들인다. 괴테와 울리케의 사랑은 이렇게 은근히 시작됐다.
괴테는 울리케에게 시 「들장미」와 「발견」, 그리고 뮐러의 「보리수」를 낭송해주곤 했다. 괴테에 대한 그녀의 존경심이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려면 아직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무도회가 있을 때, 괴테는 그녀와 오래도록 춤을 추곤 했다. 울리케는 몇십 년이 흐른 후 괴테가 자신의 지식과 교양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했는데, “성희가 없지도 않았다”고 술회했다.
노시인의 청혼
바이마르에서는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장성한 아들 아우구스트와 며느리 오틸리에는 열아홉 살짜리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1823년 8월 8일 대공 아우구스트가 괴테의 청을 받아들여 울리케의 어머니에게 청혼의 뜻을 전달했다. 대공은 처음엔 울리케와 결혼하고 싶다는 괴테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아내 크리스티아네가 죽은 지도 7년이 지난 때라 괴테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66세의 아우구스트 공은 프록코트 정장에 번쩍이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타나, 괴테와 울리케가 결혼하면 그녀의 어머니에게 궁정에 일급의 일자리와 1만 탈러의 연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경험 많고 분별 있는 여성 아말리에는 자기 딸이 아직 결혼할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말로 완곡하게 이를 거절했다. 울리케는 괴테를 사랑했으나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괴테의 집에서 그의 아들 부부와 함께 사는 것도 부담이었다. 괴테의 집에 들어가게 되면 그 가정을 깨뜨릴 것 같았다. 그러나 울리케는 수십 년이 지난 후 “어머니가 원하기만 했다면 나로서는 결혼을 허락했을 것”라고 말했다. 울리케 쪽의 거절로 괴테는 심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울리케 가족이 카를스바트로 거처를 옮기자 괴테도 뒤따라가 같은 집에 기식했다. 8월 28일 괴테 생일에는 아침 식탁에 담쟁이덩굴이 장식된 찻잔이 놓여있었다. 울리케 어머니의 선물이었다. 괴테와 그들 가족은 마차 드라이브를 했고, 점심 식탁에는 세 자매의 이름이 새겨진 보헤미아산 유리잔이 선물로 놓여있었다. 괴테는 그곳에 8일 더 머물렀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작별
9월 5일, 괴테는 레베초 가족과 작별했다. 마지막 키스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마차는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다시 만나지 못할 이별이었다. 이때 괴테의 머리에 시구의 첫 행이 떠오르기 시작해서 바이마르에 도착했을 때 시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울리케와 헤어진 후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 시집 『마리엔바트의 비가』(1823)다. 이 시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다 천국에서 추방된 한 인간이 느끼는 고뇌와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천국에서 추방된 인간은 바로 괴테 자신이었다. 울리케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쓸쓸히 떠나야 하는 괴테에게는 오직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고통과 고뇌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너로부터 떠나기 위한 손짓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토록 높은 지혜를 배우는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되는가!”
그렇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는 높은 학식도 소용없었다. 괴테는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쓰면서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서 침묵할 때, 신이 나로 하여금 그 고뇌를 말하도록 했다’는 자신의 희곡 《토르콰토 타소》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렇게 그는 이루지 못한 절절한 사랑의 아픔을 노래했다.
1832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랍 속에는 담쟁이 무늬가 있는 찻잔과 유리잔, 그리고 ‘카를스바트 1823’이라는 쪽지가 든 여성용 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수녀로 산 울리케
그 후 울리케는 총 13명의 남자들에게서 구혼을 받았지만 결혼하지 않았고 결국 수녀가 되었다. 그렇다고 괴테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1899년 11월 13일 95세의 나이로 트리플리츠 성에서 사망했다. 16년 동안 울리케를 모셨던 몸종은 사망 전날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보고했다.
“죽음을 예감한 울리케 폰 레베초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편지 꾸러미를 은쟁반 위에 올려놓고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타고 남은 재는 작은 은상자에 넣어 봉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더없이 소중한 이 물건을 관 속에 함께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편지 꾸러미는 괴테로부터받은 것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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