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강의 주먹 ‘동양의 호랑이’ 박종팔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동양타이틀 15연속 KO승에 빛나는 기록 IBF이어 WBA 슈퍼미들급 챔프에 등극 천적 오벨 메이야스에 두번이나 ‘분루’ 은퇴후 사업실패 고전...안정된 삶 되찾아

전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박종팔.
전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박종팔.

지난 4월 6년만에 부활한 제39회 MBC 전국 신인왕전이 펼쳐진 서울 중구 구민회관에서 필자는 1970년대 한국 중량급의 대표적인 복서 유제두 챔프와 1980년대 중량급을 풍미한 박종팔 챔프, 이들 두 레전드(legend)를 만났다. 두 복서를 한 장소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이들 레전드를 마주하며 필자는 벅찬 감동과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찌감치 유제두의 후계자로

박종팔은 유제두 챔프가 1975년 적지에서 와지마 고이치(일본)를 꺾고 WBA 주니어(JR)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장면에 감동받아 그 다음해 겨울 복싱에 입문했다. 1977년 11월 신인왕전으로 프로에 데뷔, 라이트플라이급에서 최우수신인왕에 오른 김태식에 이어 우수신인왕에 선정됐다. 이때부터 일찌감치 유제두 챔프 후계자로 주목을 받았다.

유제두 챔프는 1978년 12월 강흥원을 상대로 동양 미들급 21차 방어전을 치른 뒤 11년간의 현역생활을 접고 타이틀을 반납했다. 이 타이틀을 놓고 박종팔은 1979년 8월 22일 C. 나이또(일본)와 결정전을 치렀고, 2회에 KO승으로 유제두에 이어 동양 타이틀 정상에 올랐다.

1958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박종팔은 세계적인 복싱전문지 <링(Ring)>지가 1994년 5월호에서 세계 최고의 슈퍼미들급 선수로 선정했던 한국 중량급의 대들보였다. 하지만 그의 복싱인생에서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중량급 최강의 주먹을 뽑냈지만

1977년 3월 아마추어 서울 신인 미들급 결승에서 이효필에 판정패했던 박종팔은 그해 6월에 벌어진 제30회 전국 신인대회 결승에서 또다시 이효필에 판정패, 거푸 고개를 숙였다. 그해 11월 신인왕전에서 우수신인왕으로 선정되며 프로에 입성했지만, 다음해인 1978년 6월 4전 3승(2KO) 1무의 약관 20세 박종팔은 챔피언 강흥원이 보유한 한국 미들급 타이틀에 도전했다가 호되게 당한다.

20전 13승(7KO) 6패 1무를 기록중이던 29세의 노장 강흥원 챔피언은 겁 없이 덤비는 하룻강아지 박종팔에 1회 종료직전 회심의 라이트를 터트려 기세를 꺾어버린다. 절치부심한 박종팔은 1978년 12월 최창백에 3회 KO승을 거두며 재기했다. 어린 나이였던 만큼 패배의 충격도 빨리 이겨낸 것. 이어 1979년 8월 22일 C. 나이또에 2회 KO승을 거두며 국내와 동양 복싱무대를 평정한 후 1981년 4월 14전 전승 (8KO)를 기록중이던 시자 사사끼(일본)를 상대로 6회 KO승을 거두기까지 8차 방어전을 전부 KO승으로 장식한다.

드디어 WBA 미들급 랭킹 1위에 오르며 지명 도전권을 확보한 박종팔과 양대기구(WBA. WBC) 통합챔피언 마빈 헤글러와의 대결 기회가 가시화됐다. 하지만 그해 6월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WBA(세계권투협회) 집행위원회는 ‘복싱은 흥행이 중요하다’란 명분을 내세워 헤글러와 박종팔간 대결을 무기 연기시켰다. 17연속 KO승을 기록한 동양 최강의 주먹도 미국시장에서 ‘우물안 개구리’ 취급을 받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1981년 11월 8일 세계무대진출 시험대로 베네주엘라로 날아갔다. 상대는 WBA 2위로 31전 30승(28KO) 1패를 기록하며 ‘암살자’라는 닉네임을 보유한 오벨 메히야스 였다. 이 대결의 승자는 다음해 1월 미들급 통합챔피언 마빈 헤글러에 도전하는 자격을 갖는 매우 중요한 경기였다. 그렇지만 시합 무대가 고지대인데다 시차 적응에 실패하는 등 컨디션 난조를 보인 박종팔은 8회 2분 47초 만에 백기를 들었다. 19연속 KO 행진에 마침표를 찍었고 세계 타이틀 도전의 기회도 무산됐다.

세계 복싱과의 격차를 실감한 그는 다음해인 1982년 동양 타이틀전에서 KO승을 거두는 등 15차방어전을 전부 KO승으로 장식하며 화풀이를 했다. 그리고 1983년 5월 맞이한 16차 방어 상대는 나경민이었다.

나경민과 운명의 대결에서

1955년 9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나경민은 국가대표로 참가한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웰터급)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아마추어 간판 복서출신이었다. 그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조용래에 판정패해 출전이 좌절되자 1981년 5월 프로로 전향해 11전 11KO승을 기록한 무서운 강타자였다.

나경민과의 시합에서 아침 계체량 측정 중 한차례 체중조절에 실패하고 간신히 링에 오른 박종팔은 몸이 무거워 보였다. 결국 초반부터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7회 48초 만에 KO패를 당한다. 나경민과 경기를 통해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뼈저리게 실감한 박종팔은 그해 9월 4일 다시 붙어 빚을 갚는다.

나경민과 재대결에서 일격을 가하는 박종팔 챔프(오른쪽).
나경민과 재대결에서 일격을 가하는 박종팔 챔프(오른쪽).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체육관이었지만 이날은 3천 7백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양 선수의 인기를 증명했다. 이 경기에서 박종팔은 위력적인 함포사격으로 4회에 나경민을 3차례 다운시킨 끝에 4회 1분 32초만에 자동 KO승을 거두며 설욕에 성공한다. 나경민은 아마프로통산 최초의 다운에 이어 생애 첫 KO패를 당했다. 적어도 동양권에선 박종팔에 필적할 만한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세계 무대로...화려한 불꽃을 태우며

다시 시야를 넓혀 세계 타이틀 사냥에 나서야 했다. 미들급 통합챔피언 헤글러는 난공불락의 챔피언이었다. 1984년 마침 국제복싱연맹(IBF)이라는 새로운 복싱기구가 신설됐다. 박종팔은 슈퍼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그리고 1984년 7월 22일 장충체육관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IBF 슈퍼미들급 초대 챔피언 머레이 서덜랜드와 일전을 치렀다. 서덜랜드는 토마스 헌스, 마이클 스핑크스 등 동급 최강의 복서들과의 대결에서도 판정까지 끌고 간 강인한 복서였다.

머레이 서덜렌드에 레프트 일격을 가하는 박종팔(왼쪽).
머레이 서덜렌드에 레프트 일격을 가하는 박종팔(왼쪽).

이 경기에서 두 선수는 3차례 다운을 주고받는 난타전을 벌였고, 결국 11회에 박종팔이 특유의 몸통 공격으로 KO승을 거두며 정상에 올랐다. 17개 프로복싱 체급중 박종팔이 속한 슈퍼미들급(76. 2Kg) 위에는 3개 체급만 있을 뿐이었다. 박종팔은 이후 3년 동안 8차례에 걸쳐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특히 1986년 4월 12일 벌어진 미국원정 3차방어전에서 도전자인 비니 커토에 15회 KO승을 거둔 경기는 한국복싱의 미국 원정 24연패 사슬을 끊는 매우 상징적인 경기였다. 한국복싱은 지난 1967년 9월 15일 WBA 주니어(JR) 라이트급 세계 4위 서강일이 LA에서 챔피언 라파엘 로하스에 도전, 15회 판정패를 당한 후 19년간 24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이후 2연패를 추가해 한국복싱은 미국원정에서 통산 1승 26패를 기록했다. 지난 2001년 지인진은 WBC 페더급 챔피언 에릭 모랄레스와 잘 싸우고도 판정패하는 바람에 26번째 패한 선수로 기록됐다.

선배 홍수환의 한을 풀어주며

미국 원정경기의 승리는 또다른 전설적인 챔프 홍수환의 마음까지 위로해줬다. 당시 알레스카에 거주하던 홍수환 챔프는 박종팔의 경기가 펼쳐지는 LA로 득달같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박종팔이 시합전 오후 운동을 할 때에는 자신이 빌린 차량으로 체육관까지 데려다주는 등 조력자 역할을 아끼지 않았다. 박종팔이 타국에서 평상심을 찾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이 경기가 왜 홍수환까지 들뜨게 했을까.

그 이유를 2012년 12월 16일 박종팔 챔프가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체육관 개관식을 가질 때 알게 됐다. 당시 그 자리에 필자는 홍수환, 박종팔 두 챔프와 담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홍 챔프가 그 때 일을 대화주제로 올렸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면서 운을 뗀 홍 챔프는 “당시 종팔이가 승리했을 때 내가 1975년 3월 15일 바로 그곳 LA에서 벌어진 WBA 밴텀급 타이틀전 1차방어전에서 20연속 KO 행진을 펼치던 자모라(멕시코)에게 허망하게 당한 KO패의 상흔(傷痕)이 조금이나마 치유된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후배가 대신 갚아주길 바랐던 것이었다. 두 챔프와 대화하면서 필자는 역시 인생이란 누군가의 말처럼 ‘나’에서 시작해 ‘우리’로 가는 긴 여정이란 생각을 했다.

홍수환 챔프와 박종팔 챔프(오른쪽)
홍수환 챔프와 박종팔 챔프(오른쪽)

박종팔에게 다시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87년 7월 IBF 8차방어전이 끝난 시점에서 절묘한 타이밍으로 WBA에서 슈퍼미들급 타이틀이 신설된 것이다. 3년을 참고 견디며 8차례 IBF 타이틀을 방어한 박종팔은 미련없이 IBF 타이틀을 반납했다. 당시 IBF는 WBA. WBC에 비해 공신력이 떨어지는 국제복싱 기구였다.

보다 큰 흥행시장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박종팔은 1987년 12월 동급 2위인 18승 (17KO) 1패를 기록한 H. 가야르도(멕시코)와 결정전을 치러 2회 KO승으로 WBA 슈퍼미들급 정상에 오른다. 1차방어전에서 파시네론에 5회 KO승을 거둔 박종팔은 그 다음해 5월 2차 방어전에서 ‘천적’ 오벨 메히야스를 만났다. 그러나 상대의 헤드버팅으로 앞니 3개가 부러지는 고전 속에 판정패, 46승(39KO) 5패 2무의 전적을 남기고 박종팔은 사실상 복싱을 접는다.

평탄치 않았던 ‘인생 2막’도 극복하며

사각의 링을 주름잡던 박종팔. 새롭게 펼쳐진 인생 2막의 ‘링’에서 그는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의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선수생활하며 벌었던 수십억 원의 자금은 짧은 순간에 아침이슬처럼 사라졌다. 야구의 선동렬, 축구의 손흥민처럼 현역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부와 명예가 한순간에 날개 없이 추락했다. 링 위에선 호랑이처럼 매서운 펀치를 날리던 그였지만, 링 밖에선 그저 만만한 사냥감이 된 것이다. 아내와도 사별하며 극심한 공황(恐慌) 상태에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깊은 좌절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박종팔 챔프와 새로운 반려자가 된 이정희씨(왼쪽)
박종팔 챔프와 새로운 반려자가 된 이정희씨(왼쪽)

그러던 박종팔은 2008년 어느날 운명처럼 지금의 아내를 만나 기사회생, 인생 3막을 펼치고 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온갖 풍파를 겪었던 그는 이제 인생을 통달한 도인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불암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산기슭에 자리 잡은 자택에서 박종팔은 찾아오는 복서지망생, 선수들에게 자신의 현역시절 경험담과 노하우를 전수하곤 한다. 1980년대 한국 중량급 최고의 빛나는 별 박종팔. 그의 아름다운 황혼의 ‘링 승부’에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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