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녀의 세계’ 전설적 여성 프로모터 심영자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김성준, 장정구, 문성길, 최요삼 키운 ‘대모’ 강한 승부욕, 폭넓은 인맥, 과감한 베팅 장정구와는 애증의 관계를 보이기도
이순(耳順)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절실하게 깨닫는 사실 하나는 인생은 사주팔자에 의해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향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1983년 나는 아마복서로 활약하며 대학진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8월 고(故) 심영자 88프로모션 회장을 만나면서부터 잔잔하던 인생의 물줄기가 요동치면서 프로행으로 급선회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꽃피우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느낀다.
한국 프로복싱계의 전설이 된 여성 프로모터 심영자. 프로복싱 선수들의 경기를 매치시키고, 경기비용을 마련하고 흥행까지 이끌어내는 사업인 프로모션 사업에서 심 회장은 독보적인 여성 프로모터였다.
여성의 몸으로 복싱 사업에 뛰어들기까지
심 회장은 1943년 5월 17일 전북 군산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군산 풍문초, 중앙여중을 거쳐 대전 호수돈여고 재학시절 무용을 전공했다. 발레리나로 꿈을 키워 나가던 여고 시절의 어느날,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인 세째 오빠 심준섭 씨와 친분이 있던 한 영화감독과의 인연으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에 <죽도록 사랑했노라>에 명배우인 신성일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것을 비롯, <쌍칼>, <이대 왕검>, <홍도야 우지마라>등 모두 1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심 회장은 KBS 방송국 소속으로 ‘고수미’라는 예명으로 활동, 사미자, 김형자, 박주아(본명은 박경자) 등과 자매처럼 지냈다. 당시 잘 나가던 배우 심영자는 1966년 서울 상대를 졸업한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을 만나 결혼과 함께 은막을 떠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오빠 덕에 복싱과 인연을 맺는다. 둘째 오빠는 남대문에서 한 주먹 했던 풍운아였다. 그의 영역에 있던 무명 복서 김성준이 눈에 띄었다. 복싱을 하면서 남대문에서 소매치기로 명성(?)을 날리던 김성준을 심 회장이 알게 됐다. 심 회장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개과천선한 그는 1978년 9월 태국의 보라싱을 어퍼컷 한방으로 3회 침몰시키면서 WBC 라이트 플라이급 정상에 오른다. 둘째 오빠 휘하에서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던 복서가 또 한 명 있었다. 그는 훗날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대원체육관’을 설립, 김철호, 유명우, 지인진 등 세계챔피언을 배출한 김진길 관장이다.
그와의 인연으로 심 회장은 1978년 신인왕인 양일, 김철호 두 복서를 자신의 자택인 워커힐 아파트에 입성시켜 본격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양일 선수는 1978년 서울 신인전, 전국 신인전, MBC 신인왕전(페더급)에서 3관왕을 달성한 기대주였다. 그는 3개 대회에서 모두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를 무기로 최우수선수상 (MVP)을 거머쥔 발군의 복서였다. 1961년 동갑내기로 천호상전 선후배 관계인 이들은 심 회장의 베이스캠프에서 발판을 구축한다.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을 보유한 양일은 ‘봉천동의 밤안개’라 불릴 정도로 밤이 화려한 복서였다. 결국 양일은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탈출(?)을 감행, 얼마 후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반면 곰처럼 우직한 양일의 천호상전 1년 후배 김철호는 끈기와 인내로 버텼다. 그리고 1980년 1월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라파엘 오로노를 상대로 9회 KO승을 거두면서 세계정상에 올랐다.
세계 챔프 장정구의 합류와 결별
이 무렵에 극동체육관의 장정구와 이일복이 심영자 사단에 합류했다. 1983년 3월 장정구는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사파타에 3회 KO승을 거두면서 정상에 등극한다. 그해 6월 장정구는 대구에서 일본의 이나미 마사하루를 상대로 1차방어전을 벌였다. 이때 가수 김수희 씨가 애국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다. 김수희는 장정구와 동향으로 일전에 한차례 대담을 한 적이 있는 불원불근(不遠不近)의 사이였다. 그러나 심 회장이 장 챔프와 가수 김수희와의 관계를 확대 해석,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김수희는 경기장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고 링사이드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장 챔프가 미나미를 상대로 2회 KO승을 거두면서 게임을 끝내자 김수희는 링 위에 올라 장 챔프에게 축하의 퍼포먼스를 연출한 후 내려갔다.

그리고 6월 27일 12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장정구는 12대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예방했다. 전 대통령, 이순자 여사와 오찬을 함께 한 장 챔프는 그날 오후 숙소인 워커힐 아파트에 들려 심 회장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 후 짐을 챙겨 퇴촌했다. 장 챔프가 떠나자 심영자 회장은 독자적으로 프로모션을 설립할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82년 11월 28일 WBC 슈퍼플라이급 6차방어전에서 라파엘 오로노에 6회 KO패를 당한 후 사실상 복싱을 접은 김철호와 함께 유망 복서들을 스카웃하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내 손으로 세계 챔프를” 필생의 집념
이렇게 심 회장은 우연한 계기로 극동 프로모션 후원회장을 하면서 세계챔피언이 하나씩 탄생하자 프로복싱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복싱 일선에 나서면서 극동프로모션의 전호연 회장을 앞서가는 프로모션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김철호와 투톱을 이루며 전면에 나선 것이다. 슬하에 딸과 아들이 있었지만, 합숙소에선 자녀들보다 선수들에게 고기 한 쪽이라도 더 챙겨주는 사랑과 관심을 쏟는 프로모터가 됐다.
첫 행선지는 1983년 8월 로마 월드컵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이 벌어진 복싱 경기장이었다. 그 대회에서 군산체육관 소속으로 출전한 황동룡과 필자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 인연으로 2개월이 지난 10월 20일 필자는 황동룡, 김강원, 김의진등 동료들과 함께 프로로 전향하기 위해 상경, 워커힐 아파트에 입성했다. 그 날은 프로야구 해태와 MBC 청룡의 한국시리즈 5차전이 벌어진 날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중 군계일학처럼 발군의 활약을 보인 복서는 체력과 스피드, 테크닉을 겸비한 라이트 플라이급의 황동룡이었다. 국가대표 출신의 황동룡은 아마추어 시절 권채오, 서정수, 한정훈, 박제석, 오경묵 등 정상급 복서들을 제압한 복서였다. 프로로 전향해 4전 전승을 기록한 그는 유명우와 스파링을 펼치면서 실력을 검증받는다. 황동룡은 1984년 9월 헤르만 토레스(멕시코)와 세계랭킹전에서 판정승을 거두면서 세계랭킹 6위에 진입하기도 했지만, 그 경기를 끝으로 링을 떠났다. WBA 동급 챔피언 퀴로즈와의 대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토레스와의 경기에서 입은 망막부상으로 도중 하차한 것이다. 결국 WBA 타이틀은 퀴로즈(도미니카). 조이 올리버(미국)를 거쳐 유명우에게 돌아간다.
이후 심영자 사단은 IBF 주니어 밴텀급 타이틀전에서 박광구가 챔피언 전주도에게, IBF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박조운이 챔피언 최점환에게 각각 도전 했지만 연패를 당한다. 1987년에 접어들자 심 회장은 회심의 카드를 뽑아들었다. 1986년 12월 아마 국가대표 문성길을 7천만원에 전격 스카웃한 것이다. 1987년 IBF 미니플라이급에서 88체육관 이경연이 세계정상에 오르자 이를 도화선으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1988년 WBA. WBC 양대기구 플라이급 챔피언 김용강, WBA 밴텀급과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 쌍두마차가 연달아 세계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한 불꽃이 타올랐다. 이후 88프로모션 소속의 김봉준, 정비원, 장태일이 쉼없이 세계정상에 오르면서 극동프로모션의 전호연 회장, 동아의 김현치 회장과 더불어 삼각 트라이앵글을 구축한다.

강한 승부욕과 풍부한 인맥...전설이 되다
여성이었지만 심 회장은 승부욕이 엄청났다. 자기 선수가 경기에서 패하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했다. 1982년 9월 장정구가 세계챔피언 사파타에 첫 도전했다가 판정패를 당해 의기소침해하고 있었다. 그때 심 회장은 “야, 짱구야. 기죽지마. 내가 다시한번 너에게 기회를 줄게”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6개월만에 사파타를 한국으로 불러들였고, 장정구를 챔피언으로 등극시킨 일화는 그녀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수 있는 일화다.
그러나 1993년 11월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이 10차 방어에 실패하면서 균열이 생긴 88프로모션은 설상가상으로 후원하던 모기업마저 경영악화로 흔들리면서 결국 1994년 공중분해됐다. 절치부심한 심 회장은 5년이 지난 1995년 숭민 프로모션을 설립했다. 1999년 10월 최요삼과 백종권이 연달아 세계정상에 등극하면서 심 회장은 ‘복싱계 대모’다운 건재를 과시한다. 그러나 2002년 최요삼이 4차방어전에서 벨트를 풀면서 복싱 일선에서 물러난다.
2005년 심 회장은 마지막 불꽃을 살리기 위해 필자를 포함 김용강, 김재경등과 함께 중국을 2차례 방문, 현지에서 스폰서를 만나 화려한 부활을 노렸지만 예기치 못한 암초에 막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일출(日出)이 있으면 일몰(日沒)이 있듯이 화려했던 20년 복싱 프로모터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복싱사업을 하는 동안 강한 승부욕과 함께 주변에 풍부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강한 승부욕과 과감한 투자, 이것이 맞물려 여성 프로모터로 전설적인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녀의 챔프 장정구와 김성준
이후 남편과 사별한 심 회장은 중곡동 자택에서 2020년 10월 향년 78세로 영면할 때 까지 아들과 함께 산장의 여인처럼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다. 심 회장의 은혜에 결초보은한 대표적 인물은 단연 장정구다. 장 챔프는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의 경남고 1년 후배인 롯데그룹 신준호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3천만원을 지원받아 생활비로 사용 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일복, 가도현, 홍성민, 신정훈, 허준, 고윤배 등의 복서들이 말년의 심영자 회장에게 소리소문없이 도움을 주었다.
타계하기 1년 6개월전, 필자는 심 회장 자택에 최요삼의 용산공고 토목과 1년 후배 홍성민 SM 프로모션 대표와 함께 방문했는데 당시 거동이 불편한 심 회장은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한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심 회장을 위해 2019년 6월 장정구 챔프가 중심이 되어 희수(喜壽)잔치 행사를 치러주었다. 당시 장정구 챔프는 요식업(料食業)을 운영하는 친구 안상우 사장에게 심 회장 행사를 부탁, 수익금 전액인 535만 원을 심영자 회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심 회장은 생전에 자신을 스쳐간 수많은 복서들중 그분 가슴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복서로 김성준을 꼽았다. 그는 1989년 2월 36살의 젊은 나이에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삶을 마감했다. 심 회장은 김성준이 은퇴후 마포에 ‘링’이라는 경양식집을 차릴 때 1500만원을 지원할 정도로 아꼈다. 심 회장은 2020년 10월 23일 숙환으로 자택에서 타계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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