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타임의 반란..갈라진 미국의 노래
[정규수의 스포츠 깊게 바라보기] “영어 없는 슈퍼볼”… 배드 버니가 흔든 미국의 심장
- [1분 핵심 요약]
- 사건의 발단 2026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푸에르토리코 출신 가수 배드 버니가 전 곡을 ‘스페인어’로 열창,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이민 정책을 정면 비판함.
- 정치적 격돌 트럼프 대통령의 즉각적인 비난과 함께, 보수 진영은 맞불 작전으로 ‘올 어메리칸 하프타임 쇼’를 별도 송출하며 시청층이 정치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양분됨.
- 한인 사회의 딜레마 ‘법치’를 이유로 이민 규제를 지지하던 한인들이 조지아 현대차 공장 단속을 겪으며 ‘우리도 타자(Other)일 뿐’이라는 현실에 직면, 세대 간 시각차도 뚜렷해짐.
- 결론 한국계 스타 클로이 김의 호소를 통해, 혐오와 단절 대신 ‘사랑과 연민’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의 회복을 촉구함.
- [The Insight- 행간의 재구성]
- 언어가 곧 새로운 ‘벽(Wall)’ 과거의 갈등이 물리적 국경 장벽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영어라는 언어적 순혈주의’가 보수 진영의 핵심 가치가 됨. 스페인어 공연을 ‘정치적 침입’으로 규정하는 대중의 심리를 엿볼 수 있음.
- ‘모범적 소수자’ 환상의 종말 고학력·고숙련 한인 근로자들조차 이민 단속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트럼프 정부의 원칙론이 ‘유용한 도구’를 넘어 ‘무차별적 배제’로 진화했음을 시사함.
- 오락의 정치적 소비 이제 미국인은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의 가치관에 맞는 하프타임 쇼를 선택해서 봄. 이는 미디어와 플랫폼이 대중의 확증편향을 극대화하는 ‘정치적 필터버블’이 스포츠 영역까지 장악했음을 의미함.
1억 2천만명이 시청하는 ‘슈퍼볼’
매년 2월 둘째 주 일요일 저녁에 열리는 미식축구 챔피언 결승전, 그 경기가 바로 슈퍼볼(Super Bowl)이다. 슈퍼볼은 미국인들에게 스포츠 경기 그 이상의 의미, 즉 ‘국민 축제’다.
슈퍼볼로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건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이다. 올해 슈퍼볼을 주관한 샌프란시스코 Bay Area Host Committee는 이번 대회가 최대 9,200억 원의 지역 경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사기관 닐슨은 미국에서만 1억 2,490만 명이 경기를 시청했고, 해외에서도 6,250만 명이 중계를 봤다고 발표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즐기는 지구촌 축제가 바로 슈퍼볼인 것이다.
‘슈퍼볼 플루(Super Bowl Flu)’라는 표현만 봐도 미국인들이 슈퍼볼에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 수 있다. 번역하자면 슈퍼볼 독감인데 슈퍼볼이 열린 다음 날인 월요일에 병가를 내거나 아예 휴가를 잡아 쉰다는 미국 문화 현상을 말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1,3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월요일 휴가를 신청했고, 2,620만 명은 월요일에 직장을 빠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길어야 4시간인 스포츠 이벤트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까지 바꿔 놓는 것이다.
출연료 안받고 하프타임 공연
슈퍼볼을 보면서 하프타임 쇼를 빼놓는 건 ‘팥 없는 붕어빵’과 같다. 미국인들 중에는 정작 게임은 안 보더라도 하프타임 쇼는 꼭 챙겨 보기도 한다. 닐슨 조사에 따르면 이번 하프타임 쇼 시청자는 평균 1억 2,820만 명으로, 경기 자체 시청자 수보다 높게 나타났다. 즉, 하프타임 쇼는 단순한 경기 중간 공연이 아니라 슈퍼볼의 ‘메인 이벤트’인 것이다.
해마다 슈퍼볼을 3~4개월 앞두고 하프타임 쇼 공연자를 발표하는데, 어떤 가수가 어떤 노래를 부를지, 무대 장치는 어떻게 꾸며질지 등은 미국 밥상 머리 단골 주제이다. 전통적으로 공연자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는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자신의 음악과 공연을 선보인다는 상징적 가치와 영향력은 돈으로 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가수의 재탄생 순간인 것이다.
올해 2월 7일 열린 슈퍼볼에서는 다소 밋밋했던 경기보다도 훨씬 더 많은 논쟁을 하프타임 쇼가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유는 공연자 배드 버니(Bad Bunny)가 무대의 모든 곡을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불렀기 때문이다.
하프타임 정치학, 배드 버니 vs 트럼프
한국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배드 버니는 세계적인 탑 티어 뮤직 아티스트이다. 올해 그래미 최우수 앨범상을 포함해 총 3개의 그래미 상을 휩쓸었고 2021년부터 총 6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쌓아왔다.
미국령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배드 버니는 올해 그래미 수상 수감에서 “ICE Out”을 외치며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 또한 중남미 이민자들의 추방 문제에 항의해 미국 내에서는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미국의 상징적 문화 축제인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모든 노래를 외국어인 스페인어로 불렀던 것이다.
당연히 트럼프 대통령은 반응했다. 그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배드 버니와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 대한 거친 비난을 쏟아냈다. 트럼프의 미식축구 사랑은 유명한데, 2025 슈퍼볼을 직접 관람하면서 슈퍼볼에 참석한 최초의 현역 대통령 기록을 세웠고, 이후에는 정규 시즌 경기까지 직접 관람한 첫 현직 대통령이 되었다.
트럼프에게 프로미식축구 경기는 하나의 정치적 무대인 것이다. 이런 트럼프가 ‘아이스 아웃(ICE Out)’을 외치며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한 배드 버니가 어떤 공연을 펼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던 건 당연했다.

배드 버니의 하프타임 쇼가 공식 발표된 것은 작년 9월 20일이었다. 불과 3주 뒤인 10월 9일 보수 우파 단체인 ‘터닝 포인트 USA’가 맞불 작전으로 같은 시간대에 ‘올 어메리칸 하프타임 쇼(All American Halftime Show)’를 방송하겠다고 발표했다. ‘터닝 포인트 USA’는 작년 9월 총격으로 사망한 미국 보수 우파의 상징이었던 찰리 커크가 설립한 단체이다.
배드 버니의 공연이 확정된 순간부터 트럼프를 포함한 미국 정치계의 양 진영은 공연에 대한 호불호를 드러내며 ‘하프타임 쇼 정치’를 가동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슈퍼볼 하프타임 쇼라는 거대한 무대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서사로 만들기 위한 치열한 빌드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슈퍼볼을 몇 일 앞두고는 트럼프는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올 어메리칸 쇼’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정치성향에 따라 양분된 반응
공신력 있는 시장조사 기관인 YouGov에 따르면, 미국인의 35%는 배드 버니의 쇼에 관심을 보인 반면 28%는 올 어메리칸 쇼에 관심을 나타냈다. 정치 성향에 따른 선호도는 극명하게 갈라졌다.
민주당 지지자의 63%는 배드 버니의 무대를, 공화당 지지자의 55%는 올 어메리칸 쇼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올 어메리칸 쇼는 필자가 거주하는 애틀랜타에서 사전 녹화되었고 같은 시간대에 여러 인터넷 플랫폼을 통해 송출되었다. 터닝 포인트 USA측은 약 2천만 명 정도가 시청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인 월요일 저녁, 필자는 대학원 수업에서 조심스럽게 배드 버니의 하프타임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예상보다 훨씬 뜨겁게, 토론은 무려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대체로 배드 버니 하프 타임쇼의 맥락과 메시지에 많은 학생들이 공감했었다. 특히 공연 내내 전광판에 나왔던 “증오보다 더 강력한 것은 사랑뿐이다(The only thing more powerful than hate is love)”라는 메시지에는 모두가 다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의 반응은 올해 1월에 시행된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 결과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62%가 미국의 국경 정책과 불법 이민자 단속이라는 큰 틀에 관해서는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구체적인 사안으로 들어가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 이민자 단속 방법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학생들의 의견 또한 현재 이민자 단속 방법에 대한 우려가 앞섰고, 약해지는 공동체 의식에 관해 걱정했다.

사바나의 한국 근로자 단속 사태 ‘오버랩’
미국 이민 1세대인 필자는 학생들의 의견을 들으며 여러 생각이 스쳤다. 한국 이민자들 대부분은 현재 불법 이민자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과는 처지와 사회적 맥락이 크게 다르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출범한 직후인 작년 2월에 시행된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 이민 정책을 높게 찬성하는 백인을 근소하게 따르는 것이 바로 ‘아시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9월 조지아 사바나 현대차-LG 공장의 대규모 이민 단속에 대해 한인 이민 사회의 반응은 복잡했다. 고숙련 기술을 가진 한국 근로자들을 어떻게 중남미 불법 이민자들과 동일하게 단속할 수 있느냐는 원망 어린 분노에 대해, 아무리 한국 근로자가 뛰어나고 미국 경제에 기여하더라도 규칙은 규칙이라는 원칙론이 맞섰다.
여기에 직장이나 사업장 혹은 동네에도 이런 단속이 시행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더해졌었다.
한국계 이민자들이 트럼프의 강경책에 근소하게 높은 지지를 보냈던 배경에는 ‘고숙련 전문직’이라는 자부심과 ‘불법 이민’에 대한 원칙론이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사바나 현대차 공단에서 벌어진 무차별적인 단속은, 국익과 원칙이라는 이름의 칼날이 언제든 아시안 공동체의 목전까지 다다를 수 있음을 시사하며 이민 사회 내부의 복잡한 균열을 야기했다.
‘한국계’ 클로이 킴이 제시하는 방향
독자들께서는 경험해 보셨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선명해 보이는 문제들도 막상 그 내부로 들어가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는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나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보면 이 문제가 생각만큼 양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체득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설문조사의 다른 결과는 이를 잘 보여준다. 아시안 이민자 집단 내부에서도 나이가 많을수록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고, 반대로 미국에서 태어난 아시아계는 같은 정책에 반대하는 성향이 뚜렷했다. 이 결과는 이민 문제를 내부에서 바라보는 한인 이민자들의 위치가 얼마나 복합적이고 미묘한지 보여주는 것이다.
슈퍼볼만큼은 아닐지라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2026 밀란-코티나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다. 미국 스노보드 대표팀 간판 선수인 클로이 김은 이민 2세대 한국계이다. 클로이 김은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고 미국의 메이저 브랜드 광고에도 등장하는 등 영향력이 높은 셀럽 선수다.
그런 클로이 선수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전한 말은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민자 1세대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클로이 선수의 영어 인터뷰를 번역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부모님은 이민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 일어나는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아요. 미국은 우리 가족과 저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줬습니다. 전 미국 대표 선수인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의견을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우리는 사랑과 연민을 바탕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런 모습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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