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대구, ‘빨갱이 목사’가 꿈꾼 하느님 나라
[경북대 민교협 시사칼럼]
- 마르크스 명제의 참뜻과 최문식의 신앙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던 도피처로서 종교를 의미했다. 대구 10월항쟁의 핵심 인물 최문식 목사에게 기독교는 저세상이 아닌 이 땅의 역사적 현실을 변혁하는 힘이었다.
- 사회복음과 기독교사회주의의 결합 그는 빈곤과 불평등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후 사회주의 운동을 신앙적 실천으로 품었다.
- 낙인을 넘어선 역사적 재조명 ‘빨갱이 목사’라는 단선적인 이념의 낙인을 넘어,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복잡한 삶과 신앙의 본질을 10월 대구항쟁 80주년을 맞아 되돌아볼 가치를 느끼게 한다.
10월 1일 대구 10월 항쟁 80주년
한 사람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설명해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구 10월 항쟁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최문식 목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목사이자 기독교인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이후에는 좌익 정치세력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1946년 10월1일 시작된 대구 10월항쟁에도 참여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인민군 점령 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활동에 관여했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붉은 목사’, ‘빨갱이 목사’, ‘공산주의 목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질문은 조금 다르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최문식의 복잡한 생애 전체를 과연 ‘빨갱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글은 그를 무조건 변호하거나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을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지나치게 단선적인 평가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회주의자가 된 목사
최문식을 이해하려면 해방 이후의 정치활동보다 먼저 일제강점기의 삶을 볼 필요가 있다. 1905년생인 그는 1920~30년대 대구 YMCA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당시 YMCA는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청년들이 농촌과 노동, 교육, 빈곤과 사회문제를 토론하고 실천하던 공간이었다. 최문식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사회문제에 관심 두게 되었고, 1933년에는 이재복 목사와 함께 이른바 ‘기독교사회주의 비밀결사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은 해방 이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와 빈곤,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형성된 문제의식이 해방 이후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목사와 사회주의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가. 최문식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생각에 있다.
최문식은 대구 계성학교와 평양숭실전문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3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신학지남』에 「하느님 나라 사상에 대한 논고」 등을 발표했다. 그에게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죽은 뒤 가는 천국이 아니었다. 그곳은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세계였다.
또한 가난과 불평등, 노동의 고통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은 신앙과 분리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그의 기독교 신앙은 당시의 사회복음(Social Gospel)과 만날 수 있었다.
하느님 나라와 사회복음
미국의 월터 라우센부쉬가 발전시킨 사회복음은 복음을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빈곤과 노동문제, 사회적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변화시키는 것 역시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로 보았다.
한국에서는 평양신학교 교수였던 남궁혁 같은 신학자가 하느님 나라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남궁혁은 칼뱅주의적 정통성을 유지하면서도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만 가두지 않았다.
보수적인 학술지 『신학지남』에 최문식의 논문을 실어준 것도 당시 편집을 맡았던 남궁혁이었다. 최문식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기독교적 전통과 연결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다. 마르크스 하면 흔히 “종교는 인민의 아편(opium of the people)”이란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명제만으로 마르크스의 종교관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언급하기에 앞서 종교가 ‘현실 고통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the expression of real suffering and a protest against real suffering)’이라고도 하였다.
‘인민의 아편’ 명제에서 중요한 것은 전치사 ‘of’이다. 인민의(of the people) 아편, 다시 말해 ‘괴로울 때 먹는 아편처럼 억압받는 인민이 현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종교를 찾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포이에르바하가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면, 마르크스는 아편, 즉 종교를 만들어낸 조건, 특히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현실의 조건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실제 고통에 대한 저항’ 명제는 종교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현실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종교가 이상향을 향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상향은 유토피아, 곧 존재하지 않는 곳(utopia, no-place)이다. 피터 팬이 해적 선장 후크와 악어를 무찌르고 도착한 네버랜드(Neverland)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유토피아의 빛으로(in light of) 이 세상을 성찰하면서 현실을 변혁하려고 저항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현실의 고통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넘어서는 이상을 제시하고 현실에 저항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최문식에게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러한 역사적 지향점이었다. 그는 신앙과 사회개혁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의 사회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당시 그가 이해했던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결합하여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사회주의라는 당시의 사회사상과 연결하여 모색한 역사적 시도였다.
해방과 대구 10월항쟁
해방은 최문식에게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현실 정치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 참여했고, 우익의 ‘경북치안유지회’와 좌우 협력을 모색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 결성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이 단체를 해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는 새로 결성된 ‘경북도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미군정과 점점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46년 10월 1일에 시작한 대구 10월항쟁에서의 그의 역할은 더욱 복잡하다. 그는 미군정과 식량정책에 비판적이었고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항쟁이 격렬한 충돌로 번지자, 그는 군정 당국과 면담하고 라디오 선무방송을 요청하는 등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노력도 하였다.
이 점은 최문식을 단순히 ‘폭력혁명을 지지한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 그의 실제 행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좌익 정치 운동에 참여한 정치적 행위자였지만, 동시에 폭력의 확산을 막으려 했던 중재자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그의 모든 정치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항쟁이 미군정의 계엄으로 진압되자 그는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후 인민군에 의해 석방된다.
결국은 숙청되어 행방불명되었지만, 인민군 점령 체제 아래에서 정치활동에 관여했던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최문식에 대한 재평가는 그의 잘못이나 한계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의 신념과 선택, 성취와 실패를 모두 역사 속에 되돌려 놓는 작업이어야 한다.
‘빨갱이 목사’라는 기억
그렇다면 왜 최문식에게는 오랫동안 ‘목사’보다 ‘빨갱이’라는 이름이 더 강하게 남았을까.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좌우 대립은 분단과 냉전 속에서 점차 절대적인 적대관계로 굳어졌다. 그 과정에서 한국 기독교와 친미 반공주의의 결합도 강해졌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려 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회의 기억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 결과 최문식의 삶에서 ‘목사’라는 사실은 희미해지고 ‘좌익’이라는 사실만 남았다. 복잡했던 한 인간의 사상과 행동이 결국 ‘빨갱이 목사’라는 한마디로 압축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역사 기억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친일의 과거를 가진 기독교인들이 해방 이후 친미와 반공주의를 통해 새롭게 정당화되는 것은 가능했는데 왜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배제되어야 했는가?
역사는 쉽게 재단할수록 단순해지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인간의 복잡한 얼굴을 드러낸다. 최문식을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그를 성인으로 만드는 일도, 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도 아니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 속에서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최문식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최문식은 한국 기독교는 사회와 역사, 가난과 불평등, 정의와 인간해방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 앞에 남긴다.
하느님 나라를 단순히 저세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이 땅의 역사적 현실과 연결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가난과 불평등, 억압과 사회적 고통 앞에서 어디까지 현실을 변화시키려 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최문식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삶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한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가 기억해 온 역사와 잊어버린 역사를 함께 돌아보며, 오늘 우리가 어떤 기독교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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