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기·만들기 사업의 죽이기·없애기 효과
[경북대 민교협 시사칼럼]
- 공공성 포기와 지방소멸의 구조 무궁화호 축소 등 교통 인프라의 후퇴는 근대적 공공성 이념의 포기를 보여준다. 중앙권력의 ‘지방소멸 위기’ 담론은 생존 경쟁을 통해 지방을 차례로 삭제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대학 경쟁 비판 이재명 정부의 대학교육정책인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실상은 세 개만 만든다고 말을 바꾸더니, 지방대에 굴욕적인 소모적 경쟁을 강요하고, 탈락 시 예산 삭감 등의 협박으로 대학 사회를 황폐화하고 있다.
- 실패한 신자유주의적 경쟁 방식 중앙권력이 주도하는 각종 공모 사업과 ‘우수한 소수’ 선별 방식은 편법과 인력 소모를 낳을 뿐이다.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자들만 남기겠다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은 이미 파산했음을 깨달아야 환다.
지방 청소년 팬덤의 문화소외
지도 학생 중에 K-POP 생태계의 인프라 구조와 지방 중소도시 거주 청소년 팬덤의 생태 적소(ecological niche) 찾기를 연구 주제로 삼은 대학원생이 있다. 그 학생이 <인프라스트럭처의 인류학>을 다루는 수업 중에 교통 기반 편차로 인한 ‘지방 중소도시에서 팬덤 하기’의 어려움에 관해 말하길래, 『무궁화호를 위하여』(하승우, 2026, 한티재)를 읽어 보도록 권했다.
그의 일독 소감은 뜨거웠는데, 특히 그가 기말 보고서에서 주목한 부분이 있었다. 정치학자인 저자 하승우가 충북 옥천으로 이주한 직후 서울발 옥천행 무궁화호의 막차 시간은 22시 55분으로, 2차 자리까지 마치고도 무사 귀가가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막차가 17시로 당겨져서, 1차 자리도 포기하거나, 거듭 갈아타며 집에 오거나, 1박을 해야 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 학생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자신의 팬덤 생활기에서 반복되던 모습이다. 집이 구미인 그의 경험담은 서울에서 막차를 타기 위해 콘서트가 끝나기도 전 혼자 공연장을 빠져나온 일, 막차를 탔다가 김천에서 버스가 끊어져 택시비로 5만 원을 내고 귀가한 일, 철도가 좋아지고 빨라질수록 구미행 열차가 줄고 환승이 늘어나 결국 비용도, 시간도 증가한 일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과거 같으면 서울 고척에서 공연을 보고 영등포로 가서 바로 구미에 올 수 있었지만, 영등포-구미 간 열차가 사라지고 줄어든 현재는 고척에서 서울역까지 가서 김천(구미)역으로 이동한 후 다시 구미 시내로 들어와야 한다. 심지어 그가 반드시 서울 소재 대학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원 없이 팬덤 활동을 하고픈 마음이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고도 했다.
왜 무궁화호는 없어지고 있을까
잠시 하승우가 제기한 ‘무궁화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대략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노후 열차 퇴역 후 신규 열차를 발주하지 않아서 운행 편수가 격감 중인 무궁화호는 2028년 완전 소멸이 예정되어 있다. 그 자리 일부는 운임이 더 비싼 전동차가 채우고, 어떤 자리는 끝내 채워지지 않으면서, 그에 따라 일부 역들이 추가 폐쇄될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근대적 이상의 퇴조와 관련이 있다. 근대는 교통, 의료, 교육과 같은 공공재를 표준화하고 그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허용해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이념이 지배한 시대였다. 물론 현실은 항상 이상과 괴리가 있어서 이념이 그렇다는 말이지만, 적어도 근대적 중앙권력은 그 이상을 추구하는 시늉이라도 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 시늉하는 노력조차 내팽개친 것이다.
결국 오늘날 이른바 ‘지방소멸 위기’ 담론은 이 근대적 공공성의 이념을 포기한 중앙권력이 경기장을 설치하고 생존 경주를 시켜서 차례로 지방을 삭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을 구제한다면서 예산을 편성하고, 사업들을 벌여서 프로젝트를 모집하며, 계획과 실적 면에서 우수한 지방, 도시, 고을, 마을, 골목, 학교, 조합, 업체, 개인(들)을 지원한다는 선전이 요란하다.
중앙권력의 지방 향한 ‘우수한 소수’ 프로젝트
그 말인즉슨, 우수한 소수가 못 되는, 우수하지 못한 다수는 소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중앙권력이 프로젝트의 경기장을 설치하는 뜻은, 지방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지방부터 죽게 할지, 어느 지방이 죽어 없어져도 되는지를 고르는 일에 가깝다.
물론, 노력해서 ‘우수한 소수’가 되면 살아남지 않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 소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정이 그처럼 간단하지는 않다. 실제로는 사람이든 집단이든 기관이든 지역이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혹은 여럿보다 특별하게 우수하기 어렵고, 딱히 우수할 리도 없다. 모두가 다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수한 소수’란 아주 높은 목표를 계획으로 내세우고, 인력을 갈아 넣으면서 목표를 실적으로 이루어 내는 이들인 경우가 많다. 정작 ‘우수한 소수’로 꼽힌 당사자는 실적을 위해 몸과 혼을 살라 가며 그럴듯한 행사를 반복하고, 그 이익은 해외나 외지의 ‘잘 나가는’ 이들이 꿀 빨 듯 누리기에, 이러느니 그냥 돈을 나눠주면 좋겠다고 푸념하는 일이 벌어진다.
또 그러노라니 실적의 질적 수준을 희생하면서라도 양적 목표 채우기에 몰두하거나, 불법은 아니어도 편법이나 무법의 영역에 걸친 일로 귀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학 사회를 예로 들면, 논문 ‘쪼개기’(하나의 연구를 여럿으로 나누어 발표하는 일)나 ‘업어주기’(서로가 자기 논문 공저자로 상대의 이름을 올려주는 일)가 전자의 예라면, 올봄에 화제가 된 ‘학술 용병’(재원이 풍부한 명문대학이 대학평가 지표를 올리려고 인용도가 높은 해외 연구자에게 많은 돈을 주고 소속 대학을 병기하도록 하는 일)은 후자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우수한 소수’로 선정되어도 그 자리가 천년만년 그의 것으로만 있지는 않다는 데에 있다. 그런 편법, 무법, 인력 갈아 넣기는 양심에 꺼려져서 하지 않을 뿐, 마음만 먹으면 따라서 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들이 아니다. 그것을 모방해 학습한 효과는 금방 나타나고, ‘우수한 소수’의 자리를 향한 경쟁도 바로 격화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모든 사람은 다 고만고만하므로, 참신한 편법, 차원이 다른 무법, 더 강력한 인력 갈아 넣기 외에 새로운 답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그 경쟁에서 탈락하면, 어제의 ‘우수한 소수’는 오늘 운명적 소멸의 캐터필러 무한궤도 앞에 내동댕이쳐진 가여운 못난이가 된다. 그러므로 우수한 소수가 된다고 해도 소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이재명 정부 교육부의 협박 아닌 협박
다시 대학 얘기를 하면, 이재명 정부의 교육부가 하는 일은 윤석열 정부에서 하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방대 교원으로서는 그 이름도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서울대 열 개 만들기’를 한다더니, 우선 세 개만 만든다고 말을 바꾸고, 서울대의 어떤 누구도 하지 않는 식의 경쟁을 지방대에 시키면서, 그 세 개 안에 못 들면 통상 주어지던 예산도 어찌 될지 모른다고 협박을 해댄다.
대학 당국은 그 협박을 고스란히 구성원을 향해 반사하며, 가장 약한 자리에 있는 조교수들부터 대학 전체를 위한 희생양이 되라고 윽박지른다. 그나마 이런 상황은 국립대의 정규직 교수에 한한 이야기다.
지방사립대 문제는 어찌 되는지 나라님들은 일언반구도 말씀이 없고, 비정규 교수, 강사의 호소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모습 역시 도통 변함이 없다. 이렇게 저렇게 어렵사리 아우성쳐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커지면, 다시 선심 쓰듯이 ‘새로운 살리기나 만들기’ 프로젝트 공모 사업을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죽이기와 없애기’ 효과를 산출하고, ‘무궁화호의 문제’를 증식시킬 뿐이다.
파산한 신자유주의의 악취
사실 이 ‘무궁화호의 문제’, 살리기‧만들기 프로젝트의 전성시대, ‘지방소멸 위기’라는 단두대가 우리 세계에 설치된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라는 세계관이 있다. 1970년대 중후반 싹이 터서, 80년대에는 영국과 미국을 제패하고, 90년대에 전 세계적 패권을 잡았으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공적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정당성의 기초를 잃었고,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최종적으로 숨통이 끊어진 사고방식이다.
한국에서는 김영삼 정권 시기에 본격 도입이 시도되었는데 바로 나라가 도산하는 통에, 이후 여(與)와 야(野), 민(民)과 관(官)과 정(政)을 막론하고, 모두 좋든 싫든 크게든 작게든 그 사상의 자장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문제는 그것밖에 배운 것이 없는 이들이 중앙이고 지방이고 권력의 방향타를 쥐고서, 숨통이 끊어진 녀석을 살아있는 신처럼 떠받들고 살아가는 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미 숨이 끊긴 존재에 숨통이 붙어 있다고 믿는 것만큼 꺾기 어려운 고집은 없다. 그들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신전에 시체 썩는 내가 진동한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냄새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쟁을 시켜서 ‘우수한 소수’를 골라 살리겠다는, 그러면 우수한 자들로 가득한 세계가 되리라는 그대들의 생각은 잘못되었고, 이미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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