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와 싸운 美, 그들의 돈은 빼앗지 못했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 선거와 부유세 법안 투표 왜 AI혁명의 중심부에서 억만장자 부유세 논쟁이 등장했나
- 빅테크 억만장자들은 후보 선거에서는 졌지만 세금 방어전에서는 이겼다. 머스크는 공화당에 4억 4,600만~4억 7,400만 달러를 쏟아붓고도 역풍을 맞았다. 반면 캘리포니아 부유세(제40호)는 반대 55.0%로 부결이 확실하고, 과세 영구 금지법(제42호)은 찬성 53.8%로 통과를 앞뒀다.
- 유권자는 재분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산 과세 방식을 거부했다. 제40호는 순자산 10억 달러 이상 약 200명에게 5%를 일회성으로 매기려 했으나 자산 평가 난점과 자본 도피 우려에 막혔다. 같은 날 연 소득 36만 1,000달러 이상 추가 소득세율 영구화(제3호)는 가결됐다.
- AI 시대에는 혁신을 누르지 않으면서 그 열매를 나눌 정교한 조세 정책이 필요하다. 자동화로 근로소득세 기반은 줄고 부는 극소수에게 몰린다. 필자는 저축·투자는 면세하고 과시적 사치 소비에만 중과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누진소비세를 대안으로 든다.
지난 11월 3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의 개표 결과가 속속 확정되면서 민주당의 완승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누가 승리했는가의 문제보다 훨씬 본질적이고 거대한 실험이 캘리포니아주 투표용지 위에서 벌어졌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곳 말이다.
이번 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상·하원 의원과 주지사를 뽑는 것 외에도 총 14개에 달하는 주민발의안(Proposition)에 직접 찬반 표결을 행사했다. 그 중 이목을 끈 것은 주민발의안 제40호, 일명 ‘억만장자 부유세’였다.
개표가 막바지에 이른 현재 반대 55.0%로 부결이 확실시된다. 한발 더 나아가 억만장자들과 재계가 부유세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맞불 작전으로 상정한 제42호, ‘신규 개인자산 및 은퇴자금 과세 영구 금지법’이 찬성 53.8%로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일론 머스크를 필두로 한 빅테크 올리가르히들이 공화당의 연방의회 장악을 위해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정치자금을 쏟아부었다가 유권자들의 역풍을 맞아 참패한 반면, 자신들의 금고를 지키는 세금 방어전에서는 시민들의 손을 빌려 승리를 거둔 셈이다.
빅테크 올리가르히의 정치 활동
이번 선거의 특징 중 하나는 미국의 빅테크 올리가르히(과두지배층)의 정치적 우경화와 천문학적인 정치자금 살포다.
과거 실리콘밸리는 다양성과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며 민주당의 우군이자 자금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민주당 행정부가 빅테크 반독점 분할 소송, 인공지능(AI) 안전 규제, 암호화폐 단속, 그리고 미실현 자본이득 과세를 밀어붙이자, 이들은 규제 철폐를 약속한 도널드 트럼프와 공화당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디언 등의 집계에 따르면 일론 머스크는 공화당 중간선거 기부금으로 무려 4억 4,600만~4억 7,400만 달러(한화 약 6,200억~6,500억 원)를 쏟아부었다. 이는 2010년 무제한 정치자금 기부가 허용된 이래 단일 선거 주기 사상 개인 최대 기부액이다. 또한 2024년 대선 당시 실리콘밸리 고액 기부자 전원이 낸 돈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액수다.
벤처캐피털의 대부 마크 안드리센과 벤 호로위츠, 오픈AI 공동창업자 그레그 브로크먼,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등도 앞다퉈 지갑을 열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만이 캘리포니아 부유세에 대해 찬성하며 실리콘밸리의 집단적 조세 저항과 결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심판은 냉혹했다. 살인적인 물가로 인한 생활비의 급등과 AI 데이터센터의 무분별한 확장에 따른 전력난, 그리고 억만장자들이 민주주의를 돈으로 사려 한다는 대중의 분노가 결합해 강력한 역풍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주민투표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후보자를 뽑는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법안을 결정하는 주민투표(발의안 40호 부결 및 42호 가결)에서는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인물을 뽑는 선거와 달리, 복잡한 세법 조항과 경제적 파급효과를 다투는 주민투표에서는 유권자들이 정보의 비대칭성에 놓일 수 있다. 막대한 자금으로 TV와 소셜미디어에 경제 불안이라는 공포 마케팅 광고를 벌인 효과가 의외로 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억만장자들이 정치자금을 제한하는 공적 선거자금 지원 확대 법안(발의안 제4호)마저 부결 위기에 처해 있어 금권의 지배력은 쉽게 꺾이지 않을 전망이다.
피케티의 꿈은 왜 좌초했나
이번 캘리포니아주 주민투표에서 부유세 도입은 좌절될 가능성이 높다. 부유세는 소득이 아니라 순자산 자체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19세기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 사상에서 출발한 자산 과세 논의는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항상 앞지르기 때문에 상속과 자산 축적에 의한 불평등은 세금으로 교정하지 않는 한 영구히 심화된다”고 갈파하면서 급부상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에마뉘엘 사에즈, 가브리엘 주크만 교수 역시 적극적인 부유세 찬성론자다.
이번 법안은 올해 1월 1일 기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순자산 10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 이상 억만장자 약 200명에게 보유 순자산의 5%를 일회성 세금으로 부과해 약 1,000억 달러(약 140조 원)의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저소득층 의료 지원(메디칼)과 공교육, 식량 지원에 투입하겠다는 담대한 구상이었다.
이들이 기존 소득세만으로 조세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일반 임금 노동자들은 소득세를 원천징수 당하는 반면 일론 머스크 같은 슈퍼리치들은 연봉을 거의 받지 않는 대신 자신이 보유한 빅테크 주식의 가치가 폭등하는 미실현 자본이득으로 천문학적 부를 쌓는다.
주식을 매각하지 않는 한 양도소득세는 발생하지 않으며, 필요한 생활비나 투자금은 주식을 담보로 초저금리 대출을 받아 충당하면 세금을 사실상 한 푼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유권자의 55%는 결국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이면에는 부유세의 구조적 문제점이 자리 잡고 있다. 먼저 비상장 스타트업 주식이나 지적재산권, 부동산, 예술품 등 유동성이 낮은 자산의 시장 가치를 과세 당국이 매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행정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아울러 현금이 없는 창업자가 세금을 내기 위해 주식을 강제 매각할 경우 경영권이 흔들리고 기업 가치가 추락한다. 가장 큰 문제는 부자들의 이탈(자본 도피)이다.
실제로 1990년대 유럽에서 부유세를 운영하던 12개국 중 오스트리아, 스웨덴, 독일 등 대다수 국가가 부유층의 국외 탈출과 행정 비용 과다로 제도를 폐지했고, 프랑스 역시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금융자산을 제외한 부동산 부유세로 대폭 축소했다.
이번 투표 과정에서도 구글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 등이 텍사스나 네바다주로 거처를 옮기겠다며 강력히 반발했고,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조차 주 재정의 파탄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주목할 지점은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이 보여준 분할 투표다. 유권자들은 부유세(제40호)는 부결시켰지만, 동시에 제3호(연 소득 36만 1,000달러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추가 소득세율 영구화 법안)는 가결시켰다.
부의 재분배와 교육·의료 재원 확충의 필요성에는 깊이 공감하면서도, 기업과 자본을 쫓아낼 위험이 큰 급진적 자산 과세 대신 검증되고 예측 가능한 고소득 흐름에 대한 누진 과세를 선택한 것이다.
자산세가 아닌 누진소비세라는 대안
이러한 맥락에서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제안한 누진소비세(Progressive Consumption Tax, 일명 사치세)는 현실적 대안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그는 저작인 《사치열병(Luxury Fever)》 등에서 연간 총소득에서 저축과 투자를 뺀 순수 소비액이 일정 수준을 넘을 경우 고율의 누진세를 매기자고 주장했다.
원리는 명쾌하다. 억만장자가 수조 원의 자산을 보유하거나 그 돈을 신기술 개발이나 공장 건설, 주식 투자에 쓰면 세금을 매기지 않고, 초호화 요트나 대저택, 전용기를 구매하는 등 ‘과시적 사치’ 소비를 할 때만 최고 70~100%의 징벌적 세금을 때리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호화 생활을 누리는 슈퍼리치의 조세 회피를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지 않고 오히려 저축과 재투자를 장려하게 된다. 나아가 최상위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가 중산층의 무리한 지출 경쟁(소비 폭포 효과)을 자극해 가계부채를 늘리는 사회적 외부불경제(어떤 경제 주체의 생산이나 소비 활동이 제3자에게 의도하지 않은 피해나 비용을 발생시키지만, 그 피해에 대한 대가를 해당 경제 주체가 부담하지 않는 현상-편집자주)까지 억제할 수 있다.
AI 시대의 새로운 조세 정책
캘리포니아의 실험은 결코 먼 나라의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왜 하필 AI혁명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먼저 부유세 논란이 벌어졌는지 직시해야 한다.
AI와 로봇 자동화가 인간의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하면 국가 재정을 떠받쳐온 근간인 근로소득세 기반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반면 부는 자본을 독점한 극소수 기업가들에게 집중된다. 캘리포니아의 부유세 투표는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에 국가가 복지와 공공 인프라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묻는 조세 실험의 서막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종합부동산세가 일종의 부유세 역할을 해왔으나, 순자산이 아니라 대출이 낀 부동산의 총공시가격을 기준으로 부과되고, 수백억 원의 금융자산가는 놔둔 채 특정 부동산 보유자에게만 부과되어 중산층 은퇴자의 조세 저항을 키웠다.
최근 가상자산 소득과세 유예,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논란과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논쟁 역시 기본적인 조세 철학도 없고 과세의 기본원칙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지우고 부의 편중이 가속화할 경우에 대비해 자본의 혁신을 짓누르지 않으면서도 그 열매를 공정하게 나눌 정교한 조세 정책을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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