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일드 《누가 내 얘기 안 했어?》가 던지는 추락과 비상의 사회학

일본 드라마 <누가 내 얘기 안 했어?>의 주인공 야쿠쇼 코지.
일본 드라마 <누가 내 얘기 안 했어?>의 주인공 야쿠쇼 코지.
  • 바닥으로 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일드 《누가 내 얘기 안 했어?》에서 백신 부작용으로 모두에게 잊힌 대배우(야쿠쇼 코지)는 사우나 청소부가 된다. 단역으로 복귀한 뒤 무명 배우와 스태프의 서러움을 보고, 예전의 호통이 ‘권력형 갑질’이었음을 깨닫는다.
  • 꼭대기에 오른 사람도 추락할 수 있어야 사회가 건강하다. 상층부의 자리는 희소해 누군가 내려와야 빈자리가 난다. 리처드 리브스가 말한 ‘유리 바닥’이 하향 이동을 막으면 사회는 신진대사를 멈춘다. 나도 떨어질 수 있다고 인식해야 사람들이 안전망에 동의한다.
  • 청년에게는 날개를 주고, 추락은 영구적 파멸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출발선에는 공정한 기회를, 정상에는 특권의 해체를 요구해야 한다. 넘어져도 “컷!” 소리 뒤에 털고 일어나 Take 2를 외치며 다시 카메라 앞에 서는 사회여야 한다.

두더지의 똥과 백신의 부조리

어릴 적 딸아이에게 즐겨 읽어주던 그림책이 있다. 베르너 홀츠바르트의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다. 난데없이 머리에 똥을 뒤집어쓴 두더지가 세상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네가 내 머리에 똥 쌌지?” 하고 따져 묻는 신나는 이야기다. 아마 아이들에게는 똥이 주는 이미지가 재미있는 모양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일본 드라마 한편을 보며 그 오래된 동화책을 떠올렸다. 제목부터 묘하게 겹치는 《누가 내 얘기 안 했어?(俺のこと、なんか言ってた?)》. 여기에는 두더지 대신 ‘아무도 모르는’ 유명배우인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영화 《쉘 위 댄스》에서 수줍은 샐러리맨으로 친숙하고 《퍼펙트 데이즈》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야쿠쇼 코지다.

극 중 그는 자타공인 국민적 대배우다. 하지만 신종 전염병 사태 속에서 사람들이 맞은 백신에 기상천외한 부작용이 숨어있었다. 백신을 맞은 모든 이의 뇌에서 주인공의 존재와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도, 매니저도 그를 잡상인이나 사기꾼 정도로 취급한다. 통장도 명예도 온데간데 없다.

신체는 살아 숨 쉬지만 사회적으로는 완벽하게 살해당한 채 투명인간이 된 그가 던지는 질문, “혹시 누가 내 얘기 안 했어?”는 현대인의 지독한 인정 중독을 쓰라리게 찌른다. 

사우나 바닥과 매슬로우 욕구 단계의 추락

언제나 저 위 하늘에서 놀던 거장이 길바닥으로 내팽개쳐진 후 닥친 첫 시련은 예술적 고뇌가 아니라 당장의 굶주림과 추위였다. 여기서 드라마는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을 기막히게 연결짓는다.

정상에 있을 때 그의 의식은 4단계(존중 욕구)와 5단계(자아실현의 욕구)의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간판이 박탈되자 단숨에 1단계(생리적 욕구)와 2단계(안전의 욕구)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거처와 끼니를 위해 그는 동네 허름한 대중사우나 청소부로 들어간다. 거기서 만난 관리인 치지미는 한국 드라마로 한국어를 독학한 인물이다. 그녀는 구질구질한 인간들을 향해 찰진 한국어 욕설을 날린다.

영국 대극장에서 셰익스피어를 읊던 명배우가 동네 목욕탕에서 구박받으며 지내는 장면은 배를 잡게 하는 코미디이자 거창한 권위를 깨부수는 탈권위의 장치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구원한 것은 실제로 몸을 쓰고 하루를 노동하며 먹는 비빔밥 한 그릇, 그리고 그 노동으로 받은 월급. 머리의 관념을 털어내고 발바닥을 땅에 디디고 일어나는 접지(Grounding)가 이루어진다.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바뀐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친절과 편의가 나의 탁월함에 대한 마땅한 대접인 줄 알았지만, 가장 낮은 곳에 서서 올려다본 세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단역 배우로 복귀한 주인공은 화려한 스크린 뒤편에 가려져 있던 방송·영화계의  현실을 목격한다. 살인적 촬영 스케쥴에도 견딜 수 밖에 없는 무명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서러움이다. 

그 곳에서 그는 비로소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다.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이 스태프들에게 쏟아냈던 그 수많은 호통과 트집들이 실은 예술적 완벽주의로 위장한 ‘권력형 갑질’이었다. 권력에 도취되어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또 드라마는 우리 시대 중년 남성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찌질함을 사정없이 벗겨낸다. 바깥일을 핑계로 집안일과 육아를 아내에게 떠넘겨 왔다. 가족과의 대화는 늘 훈계조였고, 관계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에 불과했다. 

왜 추락할 수 있는 사회인가

여기서 우리는 개인적 성찰을 넘어 사회적 질문인 ‘사회적 이동성’으로 논의를 확장할 수 있다. 흔히 사회적 이동을 이야기할 때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 즉 바닥에서 꼭대기로 올라가는 상향 이동만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만큼 중요한 질문은 또 있다. 상층부에 도달한 사람들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가다.

고소득 일자리, 권력, 사회적 위신과 같은 상층부의 과실은 숫자가 제한된 희소재다. 꼭대기의 누군가가 내려오지 않으면 밑바닥에서 아무리 날갯짓해도 빈자리는 나지 않는다. 리처드 리브스는 《20대 80의 사회》에서 상류층이 자녀의 하향 이동을 막기 위해 치는 방어벽을 ‘유리 바닥’(Glass Floor)이라 불렀다. 입시 카르텔, 연줄 채용, 자산 세습으로 무능한 자식조차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받쳐주는 것이다.

추락하지 않는 특권이 제도화되면 필연적으로 밑바닥의 비상을 가로막는 절망의 사회가 된다. 유명한 경제학자인 파레토는 ‘역사는 귀족의 묘지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무능한 엘리트가 하향 이동을 거부하고 기득권에 안주할 때 사회는 신진대사를 멈춘다. 건강한 사회라면 자격을 잃은 자는 바닥으로 내려오고, 바닥의 새로운 활력이 위로 솟구치는 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나도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인식은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처럼 사회 정의를 지탱하는 도덕적 지렛대가 된다. 자신과 내 자식 역시 바닥을 닦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가역성이 전제될 때, 즉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회만이 밑바닥의 처우를 개선하고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두 번의 추락과 자기 초월 욕구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두 번의 추락을 통과한다. 첫 번째 추락이 자신의 교만을 부수는 자기와의 싸움이었다면, 두 번째 추락은 완전히 다른 층의 결단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명성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부당하게 대우받는 동료 배우들과 말단 스태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다시 추락한다. 타인을 위해 감행한 두번째 추락이다. 

성공한 이들은 부와 명예가 오직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실력 덕분이라 맹신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실력조차 운과 타인의 조력이 없으면 모래성에 불과함을 절감한다. 물론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만난 PD의 주연 발탁, 그리고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들의 도움과 시대의 행운이 없었다면 다시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드라마는 매슬로우가 말년에 5단계 피라미드 위에 얹은 제6단계, 자기 초월의 욕구를 감동적인 대사로 그려낸다. 

“자아실현을 이루고 나면, 자신이 꿈꾸던 사람이 되고 나면 인간의 욕구는 외부로 향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빈곤을 없애고, 내 경험을 세상과 나누고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것. 이것이 자기 초월의 욕구다.”

과거의 그가 세상의 중심에 서서 오직 인정받기를 원하던 미성숙한 에고이스트였다면, 두 번의 추락을 통과한 그는 비로소 타인을 살피고 세상을 돌아보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새들도 추락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싯구처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날개가 없으면 애초에 날아오를 수도 없기에 추락은 날개를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증명이다.

우리는 추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출발선의 청년들에게는 날아오를 날개(공정한 기회)를 주어야 하고, 하늘 높이 오른 자라도 활력을 잃으면 언제든 아래로 추락할 수 있는 사회(특권의 해체)여야 한다.

그리고 추락이 영구적 파멸이 되어서도 안 된다. 연극과 영화의 무대처럼 우리 삶도 누구나 배우인 사회였으면 좋겠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다가 대사를 잊어버리고 발을 헛디뎌 넘어져도,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툭툭 털고 일어나 Take 2, 3, 4… 를 외치며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그런 사회 말이다.

글쓴이

황동언 그린비즈 솔루션 정책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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