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프와 탈라리코의 연설, 우리의 환상

‘사랑’과 ‘개혁’을 외친 美 민주당 연설 이들의 연설이 한국 정치권에 던지는 화두는

제임스 탈리리코 상원의원 당선인(왼쪽)과 존 오소프 재선 상원의원 당선인원
제임스 탈리리코 상원의원 당선인(왼쪽)과 존 오소프 재선 상원의원 당선인원
  • 두 연설의 문제의식은 진영 대립을 넘어서며 한국 정치에도 화두가 된다. 오소프는 거대 자본에 포획된 정치와 경제의 구조 개혁을 내세웠다. 탈라리코는 진짜 대립이 좌우가 아니라 “위와 아래 사이의 싸움”이라며 사랑과 연대의 정치를 호소했다. 대립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법이 달라진다.
  • 다만 실행 방안이 추상적이어서 연설이 주는 감동은 제한적이다. 오소프는 정치자금 개혁과 보편적 의료보장을 내걸었지만 기업 영향력을 제한할 법, 재원, 의회 설득 방안은 충분히 밝히지 않았다. 탈라리코의 ‘사랑의 정치’도 법과 예산, 행정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 새 정치의 언어를 현실로 만드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니 실천을 확인해야 한다. 두 연설은 정치의 목표를 진영의 승리가 아니라 시민의 삶을 바꾸는 데 두려 했다. 한국에서도 연대의 언어는 정치자금 투명성과 교육·의료·주거 정책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미국 정치인들의 연설은 화려하다. 속물적인 트럼프와 MAGA류의 정치인에 비해 민주당 정치인들은 고상하고, 환상적인 연설문을 쓴다. 버락 오바마의 연설이후 중요한 이벤트가 된 것이다.

3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연설은 전세계를 열광시킨다. 진영 싸움에 정신없는 한국의 시민들은 이 고상한 연설문에 꽤나 감동을 받았다. 이 연설문에는 미사여구가 아닌, 실제 진실이 얼마나 담겨있는 것일까. 존 오소프와 제임스 탈라리코는 차기, 또는 차차기를 노릴 만큼 명석한 정치인으로서 우리가 주목할 연설을 한 것일까.

이들 두 정치인의 승리선언 연설에는 공통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을 심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 정치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는 포부는 다른 국가 시민들에게조차웅혼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존 오소프 상원의원은 거대 자본에 포획된 정치와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내세웠고, 제임스 탈라리코 상원의원 당선인은 증오와 분열의 정치를 넘어 사랑과 연대의 정치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두 사람의 표현은 달랐지만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 정치에도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은 미국 사회의 갈등을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립으로만 볼 수 없으며, 정치와 경제를 장악한 소수의 권력에 맞서 다수 시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해법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권도 화두가 될만한 문제의식이다.

이는 트럼프 이후 민주당이 어떤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려 하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두 연설은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비해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추상적이라는 인상이다. 정치적 수사와 감동적인 개인사, 도덕적 호소가 풍부하지만, 이를 실제 제도 개혁과 정책 성과로 연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이들 연설에 대한 감동은 제한적이다. 하지만 문제의식만큼은 무제한적이다.

자본에 포획된 정치, 분열을 동원하는 권력

오소프 연설의 중심에는 정치와 자본의 유착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는 미국 정치가 거대 기업과 부유층의 돈에 좌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과 거액 기부자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고, 제약회사와 보험사, 빅테크의 영향력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적 의료보장 제도와 정치자금 개혁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그의 주장은 트럼프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다. 트럼프가 물러나더라도 정치자금과 기업 권력의 구조가 그대로라면 미국의 위기는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 승리를 과거로의 복원이 아니라 개혁의 출발점으로 규정했다.

탈라리코는 같은 문제를 사회적 분열이라는 관점에서 풀었다. 그는 “미국의 진짜 대립은 좌파와 우파가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들과 아래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억만장자들이 소셜미디어와 언론, 정치권을 통해 시민들의 차이를 부각하고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 동안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킨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 중에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춘 정치인이 있던가. 놀라운 시각이다. 그는 무조건 “약자 편에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강조한 ‘사랑의 정치’는 한국 정치 풍토에는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화해나 관용의 구호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권력에 맞서고 불의 앞에서 외면하지 않는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설명이다. 정치적 차이를 이유로 상대를 적으로 만드는 방식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두 연설은 결국 같은 구조적 문제를 가리킨다. 소수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이 시민들의 분열을 이용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민주당은 그 구조를 바꾸는 정치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 한국보다 더 분명한 계급적 관점의 정치 개혁을 제시한다.  

‘트럼프 반대’를 넘어 새로운 정치적 연합으로

두 사람의 연설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지지층의 확장이다. 오소프는 공화당 인사와 무당층까지 포함하는 초당적 연합을 강조했다. 탈라리코는 트럼프에게 세 차례 투표했던 유권자들도 자신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고 소개했다.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주민들에게도 자신은 “텍사스인 모두의 상원의원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아마 트럼프 지지층을 모두 배척하는 방식으로는 미국의 정치적 다수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판단과 연결된다. 미국식 ‘구조적 다수’를 의미하는 것일까. 특히 탈라리코 상원의원 당선인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6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았고, 식수와 학용품, 식료품을 지역사회에 전달한 사례를 소개했다. 정치적 연대가 선거 때의 지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이웃을 돕는 공동체 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연설에서 개인사는 이런 정치적 메시지를 뒷받침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나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이야기, 가난한 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며 만난 학생들의 경험을 통해 약자의 삶을 설명한다.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반복했다. 거대 권력에 맞서는 시민들의 연대를 상징하기 위해서다.

오소프가 제도와 정책을 통해 새로운 연합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탈라리코는 공동체와 신뢰를 통해 그 연합의 토대를 만들려 한다고 볼 수 있다.

풍부한 정치적 언어, 아직은 추상적인 실행 구상

그러나 두 연설이 제시한 개혁의 방향과 실제 실행 가능성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오소프는 정치자금 개혁, 보편적 의료보장, 기업 권력 통제, 교육 투자, 국제적 리더십 회복 등 광범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하지만 거대 기업과 자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어떤 법과 제도로 제한할 것인지, 의료보장 확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의회 내 반대 세력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연설에서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탈라리코의 ‘사랑의 정치’ 역시 정치적 구호를 넘어서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웃을 돕고 시민들의 연대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지만, 국가의 의료·교육·경제 체제를 바꾸려면 법과 예산, 행정적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권력의 불의에 맞서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실제 정치에서는 어디까지 타협하고 어디서부터 대립할 것인지 구체적인 판단을 요구한다.

두 연설은 정책 공약집이나 국정 운영 계획은 아니다. 선거 승리 연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미사여구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승리의 의미를 설명하고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자리에서 모든 정책의 세부 설계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의 출발을 선언한 만큼 이후에는 구체적인 입법과 정책으로 그 약속을 입증해야 하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특히 민주당이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정치자금 개혁이나 보편적 의료보장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과제를 쉽게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형성된 연합이 실제 정책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한국 정치에 던지는 질문, 약자 편에 설 것인가 

존 오소프 상원의원은 만 39세, 제임스 탈라리코 당선인은 만 37세로 젊고 패기만만하다. 한국에서 이렇게 국민적 조명을 받는 정치인이 나오기엔 유리천장이 너무 단단하다. 정치신인들이 탄생할 토양이 매우 척박하다.

두 연설은 한국 정치에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우선 정치적 대립을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으로만 동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에서도 진영 간 갈등은 시민들의 일상적인 관계까지 파고들고 있다. 상대를 설득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취급하는 정치는 정책 경쟁과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든다.

그 만큼 한국은 통합과 연대의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소프가 제기한 정치자금과 기업 권력의 문제는 한국에서도 정치와 경제의 관계, 이해충돌, 정책 결정의 투명성이라는 과제로 이어진다. 탈라리코가 강조한 공동체적 연대 역시 교육과 의료, 주거와 생활비 부담을 줄이는 정책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두 연설의 의미는 ‘개혁’과 ‘사랑’이라는 표현 자체에 있지 않다. 정치의 목표를 정권과 진영의 승리가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바꾸는 데 두려는 시도에 있다. 그리고 실천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들은 트럼프에 반대하는 것만으로 트럼프 이후의 미국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오소프와 탈라리코의 연설이 던진 숙제는 이렇게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제시하는 일과 그 언어를 현실로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

우리 한국의 정치인들도 선거가 끝나면 행동이 달라지는 이유였다. 하지만 “약자에게 걸어라”라는 탈라리코의 연설 문장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글쓴이

문주용 저널리스트

문주용 저널리스트는 31년간 언론인 생활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힘든 세상에서 위로 받고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바라는 미디어를 만들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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