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챔프 유제두, 약물중독설의 실체는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한국 3대 세계챔프 유제두 ‘석연찮은’ 패배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와 일본 관련설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도전에서 와지마 고이치를 7회 KO시킨 유제두 선수.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도전에서 와지마 고이치를 7회 KO시킨 유제두 선수.

지난해 5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 WBA 주니어(Jr) 미들급 세계챔피언 유제두 태양체육관 관장(75세)이었다. 함께 오찬을 하기 위해 종로3가 국일관으로 필자를 부른 것이다. 일전에 필자는 그해 6월 7일 유 관장 타이틀 획득 46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겠다며 반승락을 받은 상태였다. 일행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한 유 관장은 필자에게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도 있으니 기념행사를 50주년 때로 늦추자”며 다른 주제를 섞어 모처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기만성형’ 챔프 유제두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젊은 날의 청량함이 눈가의 깊은 주름으로 변한 제3대 한국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유제두. 그는 1946년 4월 25일 전남 고흥 출신으로 고흥농고 재학시절 태권도, 축구, 배구, 육상 등 흡사 지난번 소개한 백인철처럼 ‘멀티 플레이어’였다. 1965년 고흥농고를 졸업하고 상경, 마포체육관에 입관한 후 1967년 3월 24일 서울 신인대회에 라이트 웰터급으로 출전했다. 첫 경기에서는 윤창빈에 KO승을 거뒀지만 2번째 경기에서 패해 탈락하고 이어 전국 신인대회에서도 1회전에서 탈락하는 등 평범한 전력을 쌓고 있었다.

그해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유제두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1차 선발 결승에서 이민호에게 판정으로, 2차 선발전 최종결승에선 박구일에게 체중 오버로 실격패를 당한데 이어 1968년 전국체전 결승에서 유장호에게 패하자 미련없이 프로로 전향한다. 유제두는 7전째에도 임병모에 7회 KO패하며 충격을 받았지만, 1971년 4월에 이안사노를, 7월에 케시어스 나이또(일본)를 각각 KO로 꺾고 국내와 동양 미들급을 평정하게 된다. 이 때 김기수 이후 스타 부재에 허덕이던 국내 복싱계 중량급에 샛별로 떠오른다.

지금은 한물간 스포츠로 치부되는 복싱이지만 유제두가 1971년 9월 이금택과 가진 동양타이틀 1차방어전에서 받은 대전료 “1백만원”은 당시 마포에 18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재단사로 하루 15시간 일하며 2만원 남짓의 월급을 받았던 전태열 열사의 급료로 유추해 보면 당시 정상급 복서들의 파이트 머니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자고 일어나니 ‘국민영웅’

그리고 1975년 6월 7일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이자 전직 트럭 운전수인 일본의 와지마 고이치와 대망의 일전을 벌인다. 당시 38전 31승(25KO)2무 5패를 기록한 와지마 고이치는 ‘불꽃 사나이’란 별명처럼 파이팅이 뛰어난 복서였다.

일본 큐슈의 고쿠라 체육관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유제두는 와지마를 맞아 7회 좌우 연타로 그를 침몰시켰다. 김기수, 홍수환에 이어 3번째 대관식을 펼친 유제두의 경기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열기를 뛰어넘는 전 국민의 환호 속에 타이틀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바이런의 어록처럼 유제두는 단 한 경기로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한국에서 세번째로 세계 챔피언에 오른 유제두가 타이틀 획득후 금의환향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한국에서 세번째로 세계 챔피언에 오른 유제두가 타이틀 획득후 금의환향해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유제두는 이 경기후 인터뷰에서 “조국을 위해 힘껏 싸웠다.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 도움을 주신 윤필용 수경사 사령관을 비롯 많은 분들께 감사함을 전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귀국해 청와대를 예방하자 그를 맞이한 고 박정희 대통령은 “부단한 노력으로 소중한 타이틀을 오래 지키라”고 당부하면서 “작년 이맘때 홍수환 선수가 청와대를 예방했는데 그가 너무 빨리 벨트를 풀어 아쉬웠다”고 말했다고 유 챔프는 전한다. 박 전대통령은 선수 뒤에서 지도하는 사람들이 선수에게 ‘잡념’이 생기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할 것이라고 재삼 부탁하면서, 유제두 챔프에게 금일봉 3백만원을 하사했다.

청와대를 예방해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고 있는 유제두 챔프(왼쪽)
청와대를 예방해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고 있는 유제두 챔프(왼쪽)

하지만 3백만원중 2백만원은 매니저 강 모씨가 불우이웃과 방위성금으로 헌납한다고 가져갔고, 남은 1백만원중 10만원은 회식비용으로, 잔금 90만원은 매니저, 트레이너, 유제두 선수가 각각 30만원씩 나눠가졌다. 그렇지만 헌납했다는 2백만원과 관련해, 언론에도 헌납사실이 전혀 보도 되지않아 유제두는 매니저의 행동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반면 2대 세계챔피언 홍수환도 박 전대통령으로부터 금일봉 2백만원을 받았는데, 그중 1백만원은 당시 KBC(한국권투 위원회) 박순철 사무총장에게 헌납했고 나머지 1백만원은 1972년 10월 한국밴텀급 타이틀전에서 최용호에게 9회 KO패 당해 병원에서 투병 중인 문정호에게 전달한 사실이 당시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됐다. 당시 현실에 비춰볼 때 유제두 매니저의 독단적인 행동은 적절하지 못했다는 게 대다수 복싱인들의 중론이었다. 홍수환 전 챔프도 필자와 통화에서 “그 돈은 유제두 선수의 몫”이라고 잘라말했다. 이때부터 유제두 선수와 매니저간 신뢰에 금이 갔다는게 유 챔프와 대화를 나눈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대형 사건이 생길 때는 그 전에 수없이 많은 전조가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유제두의 리턴매치 패배의 실체

대형 사건이란, 유제두와 와지마 고이치의 리턴매치를 말한다는 건 누구든 짐작할 것이다. 유제두는 1976년 2월17일 3번째 일본 원정으로 치러진 와지마 고이치와의 리턴 매치에서 초반부터 마치 ‘심지가 다 된 초’ 마냥 탄력이 떨어진 채 무기력하게 경기를 펼쳐, 8개월 만에 챔피언 벨트를 푼다. 왜 그날 경기가 그렇게 끝났을까. 이에 대해 유 관장은 필자에게 “다 지난 일인데...”라며 “더 이상 그 경기에 대해 할말이 없다”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주변에선 다양한 추측을 내놓았다. 당시 주치의로 동행한 전영환 박사는 “한마디로 챔피언 관리가 너무나 허술했다. 강 모 매니저가 경기당일 주치의가 앉아야 할 링사이드 좌석도 마련해 주지도 않고, 경기가 끝난 후 호텔 방으로 찾아가 보니 유제두 선수는 기진맥진 누워 있었으며 매니저 강씨와 트레이너 김모 씨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유제두 선수를 진찰하려 하자 두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만 두라고 막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매니저 강씨의 행동이 세계챔피언을 돌보는 매니저로는 상식 밖의 행동이 너무 많았다”고 꼬집었다.

전 세계챔피언 김기수는 경기중 유제두가 사용한 ‘입가심 물’은 관례에 따라 일본권투위원회가 준비한 물을 사용했다는 강모 매니저 등의 주장에 대해 “챔피언이 해외에서 방어전을 치르는 경우 음료수는 물론 음식물까지 본국에서 직접 공수해 사용한다”면서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툭하면 터진 일본 복싱계의 약물중독 사건

사실 과거 일본에서 발생한 프로 복싱 약물중독 사건은 차고 넘친다. 1986년 7월 24일 동경에서 벌어진 WBC 슈퍼 라이트급 챔피언이자 37승(35KO)2패의 전적을 보유한 레네 아레돈도(멕시코)는 도전자 하마다(일본)에게 초반부터 연체동물처럼 허우적거리다 단 189초만에 KO패 당한 후 약물에 중독당한 것 같다고 폭로, 파문이 일었다. 아레돈도 측은 경기 2시간전 주최 측이 제공한 이상한 음식을 먹은 후 한때 의식을 잃고 토했었다고 항의했다. 이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듬해 리턴 매치가 열렸는데, 도전자 아레돈도는 갓잡은 생선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매서운 공격을 뿜어내며 챔피언 하마다를 일방적으로 난타했다. 결국 6회 KO승으로 설욕하는데 성공해 챔피언에 복귀했고, 하마다는 곧바로 은퇴했다. 아레돈도와 하마다의 2연전은 유제두와 와지마 2연전의 복사판(複寫版) 이었다.

1982년에는 일본의 시사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이 일본의 도카시키와 한국의 김용현간 1981년 6월 2일 동경에서 벌어진 세계랭킹전에서 김용현이 약물에 중독됐다고 폭로했다. 유독 일본에서 복싱선수 약물 중독설이 계속 터졌던 것이다. 필자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얼마전 서대문구에 사는 전 동양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김용현 선배를 만나 장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선수시절 아침 운동이 끝난 후 냉장고에 보관된 오렌지를 트레이너 정 모씨가 꺼내주면 먹곤 했는데, 당시 시합을 앞두고 누가 이 오렌지에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한 것이 드러났다. 귀국 후 1982년 3월15일 뉴서울 호텔에서 공식 합동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김용현은 “일본이 유제두 선배를 꺾기 위해 얄팍한 꼼수를 쓴 것은 ‘팩트(Fact)’”라고 단언했다. 홍수환 챔프도 필자에게 1978년 2월 1일 가사하라와의 일본 원정 경기에 동행한 친구와 대화를 나눈 녹취록을 보내줬는데, 그 대화 내용 속엔 호텔방에 친구와 함께 투숙한 홍수환이 주문한 햄버거 스테이크를 먹지 않자, 친구가 대신 먹고 설사를 했다는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 사건후 심기일전한 유제두는 1977년 7월 임재근과의 라이벌전에서 7회 KO승을 거두며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에디 가소(니카라과)와의 타이틀전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생뚱맞게도 정작 세계 도전길에 오른 것은 유제두가 아니라 KO패한 임재근이었다. 대신 유제두는 1978년 12월 강흥원과 동양타이틀 21차 방어를 끝으로 부활의 날개를 접는다.

지난해 5월 서울 종로3가 국일관에서 만난 유제두 챔프.
지난해 5월 서울 종로3가 국일관에서 만난 유제두 챔프.

한 시대를 풍미한 국민 영웅의 은퇴는 그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은퇴후 그는 1982년 수경사 복싱팀을 맡아 이승훈을 비롯 백인철, 유명우, 장태일, 이경연, 박영균을 세계챔피언으로 탄생시켰다. 또 1983년 구로구 독산동에 설립한 태양체육관을 무대로 동양 챔피언 독수리 5형제인 박정오, 정선용, 장영순, 차남훈, 김성윤을 키워냈다. 그 외에도 나치오, 송성운, 최응산, 김오남 등 정상급 복서들을 쉼없이 배출하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유 관장은 슬하에 3남매를 두었는데 장남 형욱 씨는 서강대 신방과를, 둘째 수민 씨, 막내 상옥 씨는 모두 성균관대를 졸업해 씩씩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풍년이 들도록 가족 농사를 잘 지은 대표적인 복싱인이다. 올곧은 신념과 원칙으로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묵묵히 걸어온 세계챔프 유제두. 그의 여생에도 건승을 바란다.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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