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들의 출세주의와 과학기술 1세대의 지연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⑬일본 가서 문학·법률만 선택한 관비유학생 자연스레 친일관료化...’과학의 일본’과 대조
“그 당시는 가장 똑똑한 사람은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던 시기였어요. 글을 쓴다든지 말이죠. 좋은 문장가는 대단한 존경을 받던 시대였으니까 모든 학문의 목적이 문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전까지는 글이나 시를 잘 써야 과거에 급제해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 가장 부러움을 샀던 일이라면 관리가 되어 높은 지위에 올라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거였으니까요. 갑오경장 이후부터는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문학을 한다는 것이 별 소용이 없게 되자 법률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긴 했지만요. 그러한 시대였지만 우리 집안은 밥 먹는데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고 집안에서도 둘째라 뭘 하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보니 장사도 못하겠고 법률도 못하겠고 갈 곳이 공과 밖에 더 있었겠어요. 당시는 3·1운동이 실패한 후 국력, 민중력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국력의 기초는 기술이니 우리 민족이 살아가려면 기술의 발전이 꼭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된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제는 공과나 기술과 쪽으로도 들어가게 된 겁니다.”- 한국 화학계 원로 안동혁의 인터뷰 중에서(윤능민, 과학사상(3), 240-251p)
금수저 문과출신 관비유학생들의 좌절과 타락
갑오개혁으로 1883년에서 1896년까지 일본으로 관비유학을 떠난 유학생들은 대부분 한성에 거주하는 10~20대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에 머물며 유학생활을 했다. 후쿠자와는 “교육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며 학문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의미있다는 판단아래 유학생들에게 사회 실천을 수반한 교육에 힘쓰게 했다. 게이오학교에서 조선유학생들은 친목회를 결성해 상호 교류와 학문에 힘썼는데, 1895년 5월 6일 처음 열린 친목회에서 그들은 친목회의 목적을 “유학생들이 서로 보호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리 대조선국민의 본령을 크게 세우고 문화 실력을 양성하고자 함에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친목회보는 점차 학술 잡지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48명의 필자들이 총 80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글들은 첫째, 유학생의 학업에 열중하여 왕의 성은에 감축해야 한다는 특징 둘째, 국민의 각성과 애국을 촉구하는 성격 셋째, 국가의식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논설, 마지막으로 각 학문 전공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논설을 보면 당시 일본 메이지 시기 일본의 지식인들의 학문적 특징 즉, 서구학문의 체계를 근대적 학문으로 빠르게 흡수하는 방식을 유학생들이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진로설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게이오의숙의 특별찬성원들은 약 110명의 유명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게이오의숙 사람들이 한 그룹을 형성했다. 또 유럽과 미국 유학파 출신인 일본 대학의 교육가와 행정가들이 다른 한그룹을 형성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 메이지 정부의 중의원과 귀족원 원로 등의 정치인들도 대다수 참여했으며, 문학, 법학사 및 의사, 법률가, 변호사 등의 전공을 가진 전문가들의 그룹, 마지막으로 주요 신문사의 사장단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면모는 게이오의숙에 있는 조선유학생들의 향후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유학생들의 경로에 영향을 미친 다른 하나의 요인은 대한제국의 유학생 선발과 귀국 후 이들이 취업할 수 있는 일자리였다. 1895년 5월 게이오의숙 보통과에 입학한 이들중 45명은 상급학교에 진학했는데 이들의 전공은 법학원 9명, 전문학교 8명, 전수학교 4명, 항해학교 6명, 고등공업학교 7명, 공수학교 3명, 수학/측량/천문전문학교 1명, 상업학교 2명, 도쿄의 자혜의원에 1명, 농과대학 2명, 경시청 2명으로 분류된다. 이후 1897년에서 1910년까지의 대한제국기 조선유학생 졸업현황을 보면, 이미 1910년 일본유학생이 4211명으로 엄청나게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일본대학에서 정치학이나 법률학, 재정학 등 사회과학을 전공한 이들의 비중은 1910년 46%에 이를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를 연구한 왕현종은 이런 현상을 “대한제국기 조선지식인의 성향이 출세지향형으로 행정 및 법조계의 관료를 지향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봤다.
그나마 실제로 일본 대학을 졸업한 유학생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법률학과나 정치과를 졸업한 학생들조차 관료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유학생의 정치 성향이나 정치 연계 활동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들 유학생들은 귀국 후 서재필, 윤치호, 지석영 등의 ‘서구 시민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흐름’이 주도한 독립협회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군사관련 학과의 유학생들은 귀국하자마자 무관학교 교관이나 장교로 복무하게 되었으나, 이들 대부분이 1902년 유길준 등이 주도한 혁명일심회 사건으로 반역죄인이 된다. 박찬승은 이들의 희생에 대해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그리고 을미사변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차 있던 박영효, 유길준 등 권력에의 복귀를 노리면서 호시탐탐 쿠테타를 준비하고 있던 망명 정객 사이에서 유학생들만 희생된 것”이라고 말했다.

관비유학생의 딜레마와 이기적 출세주의의 탄생
“전반적으로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정부의 유학생 정책은 당분간 해외 유학생을 통한 외래 서구 근대문명, 혹은 일본 근대 문명을 수용하려고 하였으나 인재계발의 측면에서나 독자적인 학술 교육체계 수립의 측면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조선 유학생들은 이상적으로 자신들이 품고 있던 ‘학술을 통한 사회 적 기여’라는 희망과 함께,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한 출세’ 라는 이중적 고민에 직면해 있었다.”- 왕현종
관비유학생들은 귀국 이후 관료의 자리를 보장받고 유학을 떠난 엘리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유학 도중 정권이 바뀌었고, 약속은 흐지부지 되었다. 1901년까지 유학생들이 줄줄이 귀국했지만 정부는 이들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 1904년에는 이들 유학생의 취업을 위해 이들 명단을 각 부에 돌리는데, 이들중 상당수가 법률을 전공했거나 공학을 전공한 이들이었다.
이전까지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유학생들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1904년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고종은 드디어 칙령을 내려 이들을 관료로 수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적을 수 밖에 없는, ‘일본화’된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대거 관직에 등용된 문과출신의 유학생들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자연스럽게 대표적인 친일관료가 된다. 이들 중 향후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이들 관비유학생에 관한 논문을 박찬승은 “1890년대 관비유학생 출신으로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한 이는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결론내린다.

1894년 말 개화파 정권에 참여한 박영효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관비유학생 파견에 대해 일본 측 역시 친일적인 인물을 육성한다는 점에서 적극 찬성했던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개화파는 몇가지 역사적 실수를 저지른다. 그 첫번째가 바로 실무관료를 육성한다는 구상으로, 유학생 대부분이 법률과 군사관련 전공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개화파 내각의 핵심인물들이 자기 주변의 인물을 추천하는 형식으로 관비유학생을 선발했다는 비리가 숨어 있다.
이렇게 선발된 유학생의 상당수가 박영효, 유길준, 김가진, 권형진, 어윤중, 윤영령 등 정부 주요 대신의 자제나 친인척들이었고, 다른 인물들 역시 대부분 양반가 자제였다. 하지만 인문학을 숭상하던 조선에서 실용학문을 익히라는 정부의 요구를 그대로 따른 인물들은 절반 정도 밖에 안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유학을 포기하거나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이 와중에 1896년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의 조선유학생 대부분은 허공에 뜬 상태로 방치됐다. 고종의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 유학생을 ‘역적이 파견한 유학생’이라고 여겼으며, 당연히 귀국 후 이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유학생 그룹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반정부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 이후 관직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유학생 출신 관료들은 모두 친일관료가 되었다. “결국 길게 본다면 조선 측의 유학생 정책은 실패했고, 반면에 일본 측의 조선유학생 정책은 성공”하게 된 셈이다. -박찬승
19세기 말 갑오개혁 이후에야 본격적인 유학생이 등장한 조선에 비해, 일본은 이미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막부와 유신정부의 주도로 수많은 유학생들이 구미로 진출한 상태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무사 집안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은 과학기술과 문화 방면을 전공해 일본의 근대 발전에 기여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요시다 쇼인의 촌숙에서 서양문명에 눈을 뜬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도 조슈번의 도움으로 메이지 유신 당시 해외유학을 떠날 수 있었고, 향후 메이지 정부에서 고위 관료가 되는 이들 대부분이 유학파 출신이었다.
1868년~1872년 구미로 떠난 일본의 관비유학생들은 대부분 과학기술계열 과정에 입학했고, 이들이 향후 일본 과학의 1세대가 된다. 조선이 이제 막 일본에 관비유학생을 보내던 시기에 일본에선 이미 과학의 1세대가 탄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대학을 서양의 전문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규정했다. 전문학은 자연과학 계열 과목을 뜻한다고 정했다. 이과와 문과의 구분은 이 당시에 생겨나기 시작해 동경대학의 학제인 4학부 즉 이학부, 법학부, 문학부, 그리고 동경의학부의 의학부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메이지의 전문화된 학문이란 이학, 즉 과학기술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오래된 한학과 과학기술 이외의 서양학은 모두 문학부라는 이름으로 신설되었다.

일본의 학문체제가 이처럼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유학생의 대부분은 법학과 문학을 선택한 셈이다. 19세기 말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과학기술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고, 조선의 선비들은 고위관료의 꿈만 꾸었다. 식민지 이후 지금까지 축적되어 내려오는 한·일 양국의 과학기술 격차는 대부분 이 시기에 그 운명이 결정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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