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投票)와 vote, 그리고 책임질 사람

[박만규의 ‘에티모버스’(Etymoverse)] vote에 담긴 소망, 맹세의 참된 의미는 공약 보다 사람..’책임’질 사람을 뽑기 때문

오는 3월9일 운명의 대통령 선거일이 18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진= 연합뉴스
오는 3월9일 운명의 대통령 선거일이 18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진= 연합뉴스
  • ‘에티모버스’(Etymoverse)는 어원을 뜻하는 Etymology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를 필자가 합성한 말이다. 어원에는 옛사람들의 사고가 비유 속에 담겨 있어 세계에 대한 인류의 다양하고 심오한 사유를 알게 해준다. 이는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20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 얼마 안 남았다.

투표란, 집단에서 공통의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이다. 동양어권에서 투표(投票)는 단지 표를 던진다는 뜻이지만, 서양어권에서는 ‘소망’이라는 뜻이 있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vote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의 voto는 모두 소망을 뜻하는 라틴어 votum에서 기원하는 단어들이다. 흥미롭게도 프랑스어에는 이 라틴어 votum에서 기원한 단어 voeu가 있는데 여전히 ‘소망’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투표는 ‘소망’을 담는 신성한 행위

그런데 왜 ‘소망’을 뜻하는 단어에서 ‘투표’라는 뜻이 나왔을까? 공동체를 위해 일해 줄 후보가 있을 때 투표는 ‘이 후보가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하는 ‘소망’을 실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일 투표를 합시다”라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내일 소망을 합시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투표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소망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의 ‘소망’이 단순히 자신이 가지는 희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세는 신(神)의 시대였기 때문에, ‘신에게 비는 소망’이라는 뜻이었다. 나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제가 이런 소망을 갖고 있으니 이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 votum이 ‘소망’이라는 뜻 외에 ‘맹세’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맹세를 뜻하는 영어 단어 vow가 여기서 나와서 여전히 ‘맹세’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소망’을 뜻하는 단어에서 ‘맹세’라는 뜻이 나왔을까?

이때도 사람에 대한 맹세가 아니라 신에 대한 맹세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내가 신께 ‘소망’을 말하면 신께서 내 소원을 바로 들어 주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신께 소원을 빌면 그 대신 내가 신께 어떤 일을 하겠노라고 다짐과 맹세를 해야 한다. 그래야 신께서 이를 어여삐 여기셔서 내 소원을 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소망’은 그 반대급부로 나의 ‘맹세’를 동반하게 되므로 이렇게 인접한 두 행위가 하나의 단어로 개념화된 것이다.

투표는 ‘소망’이다. 3월 9일 우리의 소망을 실현하자.

누가 책임감이 더 강한가

그런데 이번 투표에서는 소망하는 후보가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유례없이 많다고 한다. 참 불행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땐 그냥 ‘선택’을 하자. 다른 후보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나쁜 후보를. 좋든 싫든 투표는 필수적이다. 이후 우리에게 행해질 모든 정치의 합법성은 바로 이 투표에서 기인하게 된다.

혹여 기권을 선택함으로 인해 초래되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이란 무엇인가?

‘책임’이란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하여 마땅히 져야 하는 의무나 부담을 말하는데, 이같이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을 옛사람들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였을지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영어에서 ‘책임이 있는’을 뜻하는 responsible이라는 어휘는 라틴어에서 기원하여 고대 프랑스어를 거쳐 들어온 말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답변(response)을 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어떤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질문이 왔을 때 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을 경우, 논리적으로 볼 때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응당 ‘답변’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이고 따라서 자신이 당연히 답변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답변을 한다면 그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만일 응당 해야할 답변을 내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동양에서의 ‘책임’은 어떻게 개념화되어 있을까? ‘책(責)’은 ‘책망’(責望)에서처럼 꾸짖는다는 뜻이고 ‘任(임)’은 ‘임무’(任務)에서처럼 맡긴다는 뜻이다. 즉 윤리적 관점에서 올바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호되게 꾸짖는다는 조건으로 일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책임을 진다는 말은 꾸지람을 받을 의무를 걺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책임’을 개념화할 때 서양에서는 논리적으로, 동양에서는 윤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는 3월 9일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일에 우리의 ‘소망’을 담는 일을 해야 한다. 만일 소망하는 후보를 정하기가 어렵다면, ‘책임’을 생각해 보자. 즉 어느 후보가 그나마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만 결국 그 정책을 공약한 사람이 실제로 그것을 시행할지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약속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정이 조금 더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받들고 책임을 질 ‘사람’

그러나 나는 이 말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결정의 이론들이 있지만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누구나 마지막 단계에서는 계약의 내용이 아니라 계약 당사자의 신뢰성에 판단하여 계약을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고민하고 고민한 다음 도장을 찍을 때는 내용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살펴볼 뿐이다.

그렇다. 투표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 단계에서는 새로운 공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공약으로 후보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정보과잉 상태이다. 최종 결정을 앞둔 상태에서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살펴볼 뿐이다. 그 사람이 책임을 질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후보 캠프에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후보가 책임을 질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하고 이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는 것이다. 물론 말뿐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 궁극적으로 그러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믿게 하는 것이다.

3월 9일의 투표에서, 정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 당선되고 이를 통해 유권자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글쓴이

박만규 아주대 교수

박만규 아주대 불문과 교수는 언어에 관한 다양한 주제, 특히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언어, 어원과 인간의 사유, 한국어와 영어/프랑스에 나타난 세계관의 차이, 현대 프랑스 문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수행하고 있다. 한국사전학회와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프랑스정부 학술공로훈장을 수훈했다. 저서로는 ‘설득언어’와 ‘빛나는 당신이 있다면 촛불을 켤 필요가 없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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