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미국 유학생의 오리엔탈리즘과 한계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⑭그들의 기독교적 자유와 자본주의적 과학기술 해와파 과학기술1세대와 국내 1세대 ‘탄생’

이승만은 식민지 시기 미국유학파의 상징이었다.당시 미국 유학생들은 향후 정치/사회/경제 각 부문 모두에서 해방후 한국을 이끌어갈 리더가 된다.
이승만은 식민지 시기 미국유학파의 상징이었다.당시 미국 유학생들은 향후 정치/사회/경제 각 부문 모두에서 해방후 한국을 이끌어갈 리더가 된다.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미국이라는 제국에서의 배움을 선택했지만, 이러한 선택은 자아를 혼종적 주체로 구성했다. 조선에서 건너온 유학생은 제국과 식민,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항상 타자로서 호명되었다. 우월한 주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열등한 타자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 유학생은 타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더불어 제국의 문화를 일상을 통해 내면화했다. 그들은 미국 문화를 내면화했지만 결코 미국인이 될 수 없는 모순된 주체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타자성과 주체성으로 혼종된 주체는 조선을 그리워하지만 동시에 그 시선은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미국을 내면화 했지만 결코 타자의 위치를 넘어설 수 없었다.”- 송명진 “조선의 아메리칸 드림과 식민지인의 자기 인식. 문화와 융합”

기독교와 민주주의...미국 유학생들의 선택

“한미관계가 다시 수립된 이후 주변인들이 미국 유학을 통해 계층과 사회적 지위 상승을 꿈꾸는 유학 붐은 이미 개화기에 시동된 연원이 긴 사회현상이었다.”- 허동현의 논문 <개화기(1883-1905) 미국 유학생과 민족운동>중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유학생이었다. 주체적 독립 대신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를 계기로 독립한 한국에서, 미군정과 이승만은 향후 한국이라는 국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제도들을 탄생시켰고, 그 영향력은 한국사회의 곳곳에 여전히 스며들어 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책으로 미국 유학파가 만든 한국의 모습에 대해 분석한 사회학자 김종영은 한국사에서 미국유학생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대학과 사회의 지식권력은 미국을 빼고 이해될 수 없다. 하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와 한국 대학과 지식인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어떻게 이 직무유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일까? 미국 유학파는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가 구축되고 유지되는데 공모자 역할을 해왔다.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들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은 모순적이다. 비록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종속될지라도 이들은 그 덕분에 한국에서 특권을 누려왔다. 비유학파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학문적 위치와 자원 때문에 미국 유학파의 헤게모니에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 대학과 사회에서 상식으로서의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를 다루지 못한 점은 이해될 만하다.”

만약 한국 과학기술의 성공적인 1세대가 있었다면, 그들은 갑오개혁 이후의 유학생들 중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당시 미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과학기술력을 강조하며 국력을 키우던 국가였고, 미국식 연구중심대학 제도를 발전시키며 전세계의 인재들을 흡수하고 있었다.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라는 책은 “조선의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자리 잡고 있어서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곳이 되니…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이 취할 외교적 방략이 제시되어 있다. “중국과 전통적 우호를 다지고, 새로 맺은 일본과 국교를 발전시키며, 멀리 미국과의 연계를 추진하라”는 것이 황준헌의 제안이었고, 1882년 조선은 미국과의 불평등조약인 조미조약을 수교한다.

1895년부터 1905년에 이르는 러시아와 일본의 패권 다툼 속에서 조선의 무능한 위정자들은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우방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활발한 유학생 파견도 이루어질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조미조약이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폐기되는 1905년까지 미국 유학생은 6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 중 초대 대통령이 등장했을 정도로 향후 한국사의 전개를 생각하면 개화기를 거쳐 식민지 시기에도 이어지는 미국 유학생들은 과학기술 근대화의 관점에서도 흥미롭게 살펴봐야 할 집단임에 틀림없다.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했던 유길준이 최초의 미국 관비유학생이었고, 이후 이계필 (1885), 서재필(1886), 변수(1887), 윤치호(1888) 등의 유학이 이어진다⁠. 이 시기 미국유학생의 대부분은 정치망명객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난 약세의 양반가문 출신으로, 일본유학을 거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학을 선택했으나 이른 나이에 사고로 죽은 변수를 제외하면, 이들 대부분은 개화에 적극적이었고 훗날 독립협회를 통해 민족운동에 기여한다.

갑오개혁으로 일본에서 공부중이던 유학생들은, 아관파천 이후 “역적의 손에 의해 파견된 유학생”이라는 낙인이 찍히자, 상당수가 미국으로 도주유학을 떠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헌식, 이범수, 임병구, 여병현, 이하영, 안정식, 박희병, 이희철 등으로 미국유학생 대부분은 선교사의 지원을 통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기독교계를 통한 미국유학은 국망의 시기에도 활발해져 바로 이 시기 이승만을 비롯해서 윤병구, 신흥우, 박용만, 민찬호, 정한경, 유일한 등이 유학길에 오른다. 이들 역시 권력 핵심에서 벗어난 주변인이었고, 상인 유일한, 역관 가문 출신의 김규식 등 중인과 상인의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 제2기 미국유학생들에게서 보이는 특징은, 그들 대부분이 결국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갑오개혁의 실패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은 “신분적 주변성과 사상적 이단성으로 인해 유교전통을 비롯한 전제군주제와 양반 지배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즉 전통의 질곡에 항거해 근대적 가치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혁명적 지식인”으로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분명 새로운 시대를 열어 조선을 근대화시킬 ‘창조적 소수자’ 역할을 수행할 기회를 거머쥔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는 없었다. 이들은 분명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체계를 벗어나 있었지만, 관료로의 출세길을 원하는 면에선 일본 유학생들과 대동소이했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청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인문과학 내지 사회과학 분야에서 정규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기독교를 매개로 미국의 문화에 적응했던 미국식 사고와 가치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이승만이 미국유학을 통해 갖게 된 꿈은 “한국적 기독교 국가의 건설”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조국에 뿌리내리려는” 소망을 지닌 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해나갔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를 고민했던 지식인 집단 메이로쿠샤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분명 존재했지만, 당시 일본 근대적 지식인 대부분은 종교를 교육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기독교보다 과학에 더 친화된 입장을 견지했다. 결국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입헌군주제로 귀속되지만, 메이로쿠샤 대부분의 지식인은 자유민권사상에 친화적이었으며, 영미식 민주주의에 천착했다. 즉, 제2기 조선의 미국유학생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았던 메이로쿠샤의 지식인 집단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선택했다면, 향후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나가야 했던 창조적 소수자였던 제2기 미국유학생 집단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선택한 셈이다.

조선말 종교로 받아들인 서학의 잔재는, 한 세대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학기술의 근대화는 너무 이른 희망이었다.

1920~30년대의 미국유학...과학기술1세대의 씨앗

나라가 망하고, 1910년대의 미국 유학은 조선총독부의 허가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총독부의 허가를 받는 일은 매우 어려웠고, 일제는 조선인의 구미 유학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었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을 열등하게 유지하는 것이 총독부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10~1918년 사이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도미유학생은 약 185명으로 보인다.

무단통치의 시기인 이 당시 매년 500~700명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총독부는 일본 이외의 지역으로의 유학은 허가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총독부는 중국에서 도미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많아지자, 이들을 막기 위해 상해주재 일본영사로 하여금 유학을 준비하는 한인들을 잡아들이기까지 했다. 1910년대의 미국 유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불법이민자로 유학한 학생들도 많았다. 게다가 1917년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으로의 입국은 점점 더 힘든 일이 되었다. 하지만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이대위를 비롯해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던 한인회는 유학생들의 정착을 돕는데 크게 힘썼고, 향후 이들의 도움으로 유학을 마친 유학생들이 노동과 영업을 통해 1930년대 미주한인사회의 중추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1912년 시카고 학생들에 의해 학생조직이 발기하면서, 북미대한인학생동맹회가 조직되었고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했던 박용만에 의해 학생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유명무실해졌다가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국제정세가 뒤바뀌는 1918년을 기점으로 북미대한인학생회가 발기되고 이후 1920년 대표적 유학생단체가 되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로 발전해나간다.

망국 이후 1910년대 도미한 유학생들 역시 대부분 미국선교회 사업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 신학과 의학을 전공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대부분의 유학생은 신학생이기도 했는데 당시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의 관리는 한국인 유학생을 보면 “군도 신학을 공부하러 왔는가”라고 물었을 정도라고 한다.

하와이에서 신민회를 조직한, 미주독립운동사의 대표적 인물인 윤병구는 이런 상황을 보고 “우리 학생들이 시급히 배울 것은 농업과 공업, 기계와 과학이며, 경제 실업 면에서 독립하지 못하면 정치상 독립은 극히 어렵다”고 여겨, 1917년 워싱턴주의 위니치에 한인교육회를 설립, 한인 학생 중에서 농공 및 기계나 제조학을 공부하려는 학생을 돕고자 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분야에 뜻을 둔 유학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해외유학에 대한 개방책으로 선회했고, 당시 향학열에 불타던 국내의 학생들은 앞다퉈 사비유학을 떠나게 된다. 1920년대 일본을 제외한 해외유학생은 약 436명으로 나타나는데 이 중 대부분인 332명이 미국유학생이었다.

미국유학은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에 밀려 이등시민으로 전락한 한국인들에겐 출세의 기회이자 신분상승의 기회로 여겨졌다. 이 당시 유학생들의 전공분포를 보면 드디어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관심이 보이기 시작한다. 1925년의 조사표에선 여전히 사회과학 분야가 대다수이지만, 공학과 자연과학 유학생이 유의미한 숫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이런 비율은 1929년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1910년대 대부분의 유학생이 신학과 의학에 집중되었던 것에 비하면, 점차 실용학문으로 유학생들의 관심이 확대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이 시기의 미국유학은 ‘학위나 명예를 위한 유학에서 벗어나 실력양성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문학을 비롯한 신학과 의학 분야에 대한 선호도가 많은 것은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성 때문이다. 이렇게 1900년 전후에 태어나 일본 혹은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인물들 중에서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라고 불릴만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

자료: 홍선표(2001), 일제하 미국유학연구.
자료: 홍선표(2001), 일제하 미국유학연구.

미국 유학파의 계몽주의...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장경식은 그의 논문 <일제하 미국 유학생의 근대지식 수용과 국민국가 구상>에서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생과 미국 유학생의 근대지식 수용의 태도에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미국 유학생은 모든 학문에 10%대의 고른 분포를 보인데다 이공계 전공자가 전체의 25.1%를 차지할 만큼 근대화 이전의 조선과 큰 차이를 보여주지만, 일본 유학생은 법학, 경제/경영학, 문학전공자가 전체의 73.8%를 차지할 정도로 전통적인 관료지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확실히 미국 유학생 중에선 실용학문 전공자가 많았으며, 당시 존 듀이를 중심으로 미국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실용주의 사상도 미국유학생들의 이런 선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국으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은 북미조선학생총회를 만들어 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이 잡지를 통해 망국의 처지에 유학을 떠났던 이 시기 지식인들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미국으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은 북미조선학생총회를 만들어 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이 잡지를 통해 망국의 처지에 유학을 떠났던 이 시기 지식인들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1920년대 미국유학의 활발한 전개 속에 1910년대 주춤했던 유학생 조직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특히 1922년부터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가 영문으로 발간했던 The Korean Student Bulletin(한국학생회보)와 1925년부터 국문으로 발행했던 <우라키> 등의 회보들은 이 시기 미국유학생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당시 듀이는 한인학생회의 자문위원으로 기꺼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미국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대부로 큰 영향력을 구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에 비해 학문적으로 보잘것 없던 미국은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이 정초한 프래그머티즘 철학을 바탕으로 유럽의 사변적 강단철학에서 벗어나, 생리학과 심리학 등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일종의 응용철학의 학풍을 만들어나가는 중이었다. 프래그머티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모든 사상이 ‘실험’이라는 근대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광범위한 동의였다.

프래그머티즘에 따르면, 실생활에 아무런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관념은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이런 시기의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식민지 유학생들은 ‘과학’과 ‘실용주의’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최신 학문사조들을 흡수해 나갔다. 특히 듀이의 콜럼비아 대학 시절 제자였던 오천석은 귀국 후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을 주도하고 이후 미군정청 문교부 차장과 부장을 역임하는 등 해방 이후 한국 교육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경제학 분야에서는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의 영향이 강했고,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재무부 장관이 되는 김도연은 <마셜과 데이븐포트의 가치이론 비교>라는 주제로 콜럼비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는다. 이 외에도 이긍종, 김우평 등은 자유주의 경제원리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훗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조병옥만이 <경쟁이론의 연혁적 발전>이라는 주제를 통해 경제활동에서 국가의 역할을 고려하는 제도주의 학파에 속했다.

이 시기 미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내 일신과 내 사회와 내 민족에 가장 긴요한 부분”은 바로 ‘과학’이었다. 과학은 단지 식민지 조선이 아니라, 이제 막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학문과 사상의 독립을 이루어가던 미국에서도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유학생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순수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도미 이전에 이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과학 그 자체의 역사와 함의보다 ‘종교와 과학’이라는 주제를 통해 과학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당시 동아시아와 미국까지 휩쓸었던 사회진화론의 영향력 속에서 유학생 대부분은 진화론을 ‘민족의 실력양성’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만 다루었다. ‘우라키’에 등장하는 과학에 대한 논설들 또한 장세운의 <과학의 한 구석에서 살펴본 종교의 일면>, 조희염의 <진화론을 인정하여야 할까>등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진화론의 틀에 갇혀 있거나 예수회 신부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영적인 진화론을 염두에 둔 사회적 맥락 위에 놓여 있었다.

한치진 같은 이는 동양에서 서양에 휘둘리지 않는 일본처럼 우리도 빠르게 서양의 과학적 물질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나라를 빼앗긴 이들 유학생들에게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는 너무나 먼 기대였다.

식민지 유학생의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주의적 과학기술

<조선의 아메리칸 드림과 식민지인의 자기 인식>이라는 논문의 저자 송명진은 “식민지 시기 미국 유학생이 식민과 제국,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위치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이 펴낸 <우라키>라는 잡지 속에는 바로 이런 미국 유학생의 혼종적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당시 미국유학생은 미국에 대한 동경을 넘어, 미국을 통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일종의 ‘제국주의적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우라키>에는 조선을 바라보는 미국 유학생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미국 문명에 대한 찬사는 반드시 조선의 결핍으로 연결되고, 발전의 필요성으로 마무리된다. “조선을 문명과 대비되는 미개, 미발전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구가 동양을, 제국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동일했다.”(송명진)

동시에 미국 유학생들은 미국 문명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데, 이는 개화기 유학자들이 보여준 옥시덴탈리즘(반서구주의)과 연결된 사상이었다. 그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 즉 “리적으로 열등한 서양을 창조함으로써 우월한 동양의 정체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옥시덴탈리즘적인 면모가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 미국 유학생의 정체성을 혼종적인 것으로 구성한” 셈이다.

장차 대한민국을 건설하게 될,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가 될 이들 미국 유학생들은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와 과학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동의하는 새로운 근대화된 인종이었다. 이들보다 먼저 미국에 유학했던 윤치호의 문명관 또한 ‘문명개화의식, 민주주의인식, 기독교의식, 그리고 황인종의식’으로 집약되어 있었다. 사회진화론을 근거로 결국 친일협력의 논리로 이어지는 윤치호의 모습이 이 시기 미국 유학생 대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적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동시에 이들은 사회주의에 강한 비판의식을 보였다. 1920년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사조가 급속도로 확산될 때, 미국 유학생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했고 그 근거로 내세운 논거들 역시 ‘실용주의적 과학정신과 자본주의의 사유재산 옹호론, 기독교의 종교 도덕과 자유주의’였다.

이승만의 반공 논리 또한 미국 유학생 집단에겐 당연한 귀결이었다. 장주식의 말처럼, 미국 유학생들은 향후 남한 자본주의국가 건설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룹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공유하던 자유주의에 기초한 반공 논리는 향후 한국에서 펼쳐질 역사적 전개에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한국 과학기술의 1세대는, 해방후 정국 속에서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 미국유학이라는 어쩌면 대단한 축복을 받은 이들이 기독교적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든 채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국내에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과학기술의 1세대들은 어쩔 수 없이 공학과 의학 분야로 몰려들었다. 미국이라는 우월한 위치에서 성장한 과학기술의 1세대와는 달리, 식민지라는 현실 속에서의 차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성장해야 했던 국내의 과학기술 1세대에게 과학기술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배움이었으며 동시에 독립을 위한 자강의 유일한 동력이기도 했다.

한국 화학계의 원로로 불리는 안동혁의 인터뷰는, 식민지 상황에서 유학을 떠날 수도 없었던 처지의 중산층들이 어쩔 수 없이 공학으로 눈길을 돌린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여전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학문식민지에 사는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뼈저린 교훈을 찾아내야만 한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