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천하’? 진정한 세계챔프 염동균

[조영섭의 잊을수 없는 선수와 순간들] 한국의 4대 세계챔프...승부 뒤집히는 불운도 머리좋아 ‘clever 복서’로 불리운 사나이 염동균 “세계타이틀전 더 유치할 것” 기염

파나마의 리아스코와 세계 타이틀전을 벌이는 염동균(왼쪽)
파나마의 리아스코와 세계 타이틀전을 벌이는 염동균(왼쪽)

가벼운 봄바람이 불던 지난 주말 필자는 국내 프로복싱 최고의 유망주인 장민혁(안산제일)선수의 경기를 참관하러 안산 실내체육관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경기개최를 후원한 김성권 ㈜화선 회장, 경기를 주최한 전 WBC 슈퍼 밴텀급 염동균 챔프(72세)를 만날 수 있었다.

필자는 지도자생활 원년인 1989년 복싱사업가로 변신한 염 챔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일송 프로모션을 운영하면서 굵직한 세계타이틀을 개최하며 왕성하게 활약하는 중이었다. 이어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출신의 김철호 관장이 운영하던 88 프로모션에 속해있던 필자는 1994년 6월 88 프로모션이 경영난으로 공중분해되자 MBC 우수신인왕(1993년) 최요삼 등 용산공고 학생들을 이끌고 이거성 사장이 대표로 있던 풍산체육관에 ‘심봉사 심청이 동냥젖 먹이듯’ 의탁(依託)하여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6개월이 지난 후 염 챔프가 필자에게 화양리에 있던 숭민프로모션으로 이적하라고 러브콜을 보내와 손을 맞잡는 복을 누리게 됐다. 이곳에서 최요삼은 전형적인 ‘클레버(Clever) 복서’ 염 챔프로부터 하이테크(High tech) 기술을 전수(傳受) 받아 장족의 기량발전을 이룬다.

왼쪽부터 염동균 챔프, 김성권 회장, 장정구 챔프.
왼쪽부터 염동균 챔프, 김성권 회장, 장정구 챔프.

한국프로복싱계의 4대 세계챔프 염동균은 1950년 11월 충북 옥천 태생으로 5살때 대전으로 이사해 초등학교 6학년때 복싱에 입문했다. 이듬해 보문중 1학년때 핀급에서 충남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후 1968년 충남공고 2학년때 호남선수권 결승(밴텀급)에서 이거성에게, 1969년 제23회 전국선수권 결승에서 백종우에게, 50회 전국체전 밴텀급 결승에서 최재호에게 패하자 60전 53승(29KO) 7패의 아마추어 전적을 뒤로하고 1970년 3월 프로에 데뷔했다.

그는 1971년 10월 16전째에 홍성종을 잡고 한국 주니어 페더급 정상에 오른 뒤 이 타이틀을 14차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74년 3월 통산 20전 17승(5KO승) 3패를 기록한 동양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장규철(당시 28세)의 7차방어 상대로 나서 12회 판정승으로 정상에 오른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장규철은 1971년 11월 와다누끼 고이지(일본)를 5회 KO로 잡고 정상에 올랐지만, 2년 4개월 만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황당한 첫 세계타이틀전 승부

5차 방어전까지 하며 이 타이틀을 지킨 염동균은 세계 랭킹 2위의 자격으로 1976년 8월 1일 부산공설운동장 특설 링에서 WBC 슈퍼 밴텀급 챔피언 리아스코(파나마)을 상대로 타이틀에 도전한다. 그 날은 오전 10시엔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당시 조폐공사)가 건국이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했다. 이날 경기까지 53전 46승 (21KO승) 6무 1패를 기록한 염동균의 타이틀 도전은 1966년 6월 김기수가 벤베누티(이태리)를 상대로 한 이후 10년 2개월 만에 국내에서 벌어지는 세계타이틀전이었다. 또 유제두의 충격적 패배 이후 5개월 만에 벌어지는 세계타이틀전이었기에 국내 팬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한국선수로는 7번째 세계정상 도전이었던 이 대결은 시종일관 염동균의 페이스로 진행됐다. 민첩한 푸트워크와 위력적인 레프트훅을 겸비하고 마치 소나무로 철갑을 두른듯 안면을 철벽 커버링한 염동균은 초반부터 주도권을 잡고 리아스코를 맹폭, 3회와 7, 8회엔 그로키 상태까지 몰고 갔다. 경기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난 후 모든 시선이 염동균에게 모아졌지만 케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쥔 주심 레지 로자딜라(미국)가 어물어물 리아스코의 손을 들어 판정승을 선언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는 경기에서 선전에도 불구하고 패배가 선언되자 망연자실해 하는 염동균.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는 경기에서 선전에도 불구하고 패배가 선언되자 망연자실해 하는 염동균.

순간적으로 일어난 뜻밖의 결과에 모두 어리벙벙했고, KBC(한국 권투 위원회)가 거세게 항의하며 해명을 요구하자 로자딜라 주심은 순간적인 착각으로 ‘저지 페이퍼(Judge Paper)’가 잘못 기재됐다는 해괴한 변명을 내놓았다. 이후 25분만에 1차 판정을 번복, 염동균의 판정승을 선언하고 도망치듯 링을 떠났다. 하지만 이후 결과가 또다시 뒤집어지는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진다.

당시에는 채점표가 지금처럼 라운드 별로 공개되지 않았고 주심이 보관하고 있다가 경기 종료 후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심판이 황당한 채점을 했는지를 중간에 알 수가 없었다. 경기 다음날 <경향신문>에는 ‘한국 야쿠르트 가족 염동균 슈퍼 밴텀급 세계선수권 획득’이란 광고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이틀 후인 8월 4일 WBC 랭킹표에 염동균은 당당히 슈퍼 밴텀급 세계챔피언으로, 리아스코는 2위로 이름을 올렸다.

세계 챔피언 '8일 천하' 헤프닝으로 끝난 염동균의 첫 타이틀전.
세계 챔피언 ‘8일 천하’ 헤프닝으로 끝난 염동균의 첫 타이틀전.

타이틀이여, 다시한번...’빠른 발’로 잡다

하지만 결정권을 쥔 WBC(세계복싱 평의회)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번복된 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 8일 만에 염동균의 타이틀을 박탈해버렸다. 홈 링에서 눈뜨고 강탈당한 억울한 경기가 됐다. 염동균에겐 1971년 11월 괌에서 벌어진 조 살로마 전에서 첫 패배를 기록한 이후 35전 무패(33승 2무 17KO승) 기록이 5년만에 깨지는 패배이기도 했다. 더욱이 챔피언 리아스코에 지급한 4천만원의 파이트 머니도 아까웠고, 염동균의 피나는 연습과 정열이라는 희생도 빛바래졌기에 더욱 억울하고 안타깝고 허무했다.

잡힐 듯 말 듯 신기루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진 이 타이틀은 끝내 염동균 챔프의 품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타이틀을 쥐고 있던 챔피언 라이스코는 곧이어 일본의 로얄 고바야시와의 타이틀 전에서 8회 KO패를 당한다. 1976년 11월 24일 장충체육관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염동균은 당시 챔피언 로얄 고바야시와 WBC 슈퍼 밴텀급 타이틀을 놓고 일전을 벌인다. 당시 23전 21승(18KO승) 2패를 기록한 강타자 고바야시를 맞은 염동균은 거칠게 돌진하는 황소에게 검을 꽂는 투우사처럼 회심의 일격을 가해 선제 다운을 뺏으며 기선제압에 성공, 끝내 2 대 0 판정으로 타이틀을 거머쥔다. 8일 천하의 아쉬움을 극복하고 한국 프로복싱 제4대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것이다.

당시 고바야시는 선제공격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염동균의 빠른 발을 잡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고바야시는 정상에 등극한 지 단 46일 만에 벨트를 풀어 역대 챔피언 중 최단 재위 기간을 기록한 챔피언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에 오른 염동균은 인터뷰에서 윤쾌병 야쿠르트 회장과 매니저인 서순종 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어 1977년 2월 도전자 결정전을 통해 멕시코 강타자 루벤 올리바레스를 6회 KO승으로 꺾은 호세 세르반테스(콜롬비아)와 벌인 1차 방어전에서, 염동균은 철저한 히트 앤드런(hit and run) 작전을 펼쳐 15회 판정승으로 1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WBC 세계 슈퍼밴텀급 챔피언 염동균(왼쪽)이 콜롬비아의 호세 세르반테스와 펼친 1차방어전.
WBC 세계 슈퍼밴텀급 챔피언 염동균(왼쪽)이 콜롬비아의 호세 세르반테스와 펼친 1차방어전.

너무나 강력했던 도전자...부상까지 겹쳐

염동균은 1977년 5월 푸에르토리코에 원정에 나서 16게임 연속 KO승을 기록하고 있던 윌프레도 고메즈(당시 21세)와 회심의 2차방어전을 펼친다. 고메즈는 윌프레도 베니테스, 헥토르 카마쵸와 함께 푸에르토리코가 자랑하는 전설적인 ‘복싱 트로이카’로 꼽히는 인물. 1972년 뮌헨올림픽에 플라이급 국가대표로 출전했다가 2회전에서 탈락한 후 1974년 11월 프로에 데뷔, 천부적인 펀치력으로 데뷔 2차전부터 연속 KO 퍼레이드 를 펼치고 있던 선수였다.

이 경기에서 염동균은 1회 선제 다운을 뺏으며 무더위 속에서 나름 선전하며 분투했지만 체력이 소진된 12회에 KO패를 당하며 챔피언 자리를 내준다. 이 경기에 대해 염 챔프는 필자에게 “1회전에 다친 오른손이 경기 끝나고 보니 퉁퉁부어 글러브가 빠지지 않았다”며 “링이 너무 푹신푹신해 스텝을 제대로 밟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염동균이 고메즈와 싸운 중남미국 푸에르토리코의 상환시(市)는 이후 1977년 11월 김태호가, 1978년 7월엔 오영호가, 1983년 3월엔 정순현이, 1985년 5월엔 이승훈이 원정 도전에 나섰지만 단 한 차례도 이겨보지 못한 ‘마(魔)의 적지’로 불린다.

염동균에 타이틀을 뺏어간 윌프레도 고메즈. 그는 17차방어전까지 모두 KO승을 거둔 강타자였다.
염동균에 타이틀을 뺏어간 윌프레도 고메즈. 그는 17차방어전까지 모두 KO승을 거둔 강타자였다.

고메즈는 염동균에게 빼앗은 타이틀을 17차 방어까지 모두 KO승으로 이끌어내며 지켰다. 그는 1981년 8월 산체스에게 8회 KO패 당할 때까지 32게임 연속 KO승을 거뒀는데, 고메즈의 강타를 12회이후 까지 버틴 복서는 염동균, 레오 크루스, 루페 핀토르 단 3명뿐이었다. 대결에서 비록 졌지만 염동균은 고메즈와 대결에서 3천만원을 수령하는 등 1억원이 넘는 파이트머니를 받았다.

1억원은 1977년 당시 월급쟁이가 40년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될 정도로 큰 돈이었다. 염동균은 현역시절 서초구 방배동에 34평 삼호가든 아파트를 구입했다. 1977년 6월 서울 을지병원 앞에 경양식집 ‘동균의집’을 차려 인생 2회전을 시작했으며, 후에 대전시 정동에 체육관을 설립했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과 WBA 플라이급 두체급에서 세계정상을 정복하게 되는 이열우 선수를 발굴, 1983년 제4회 전국 회장기쟁탈 선수권 라이트 플라이급 결승에서 장시혁(성지공고)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한국의 제4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염동균.
한국의 제4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염동균.

똑똑한 챔프, 복싱사업가와 행정가로도 활동

이열우도 염동균 챔프의 본향인 옥천 출신이다. 옥천은 박영균, 장태일을 배출한 담양군과 함께 군(郡)단위에서 세계챔피언을 두 명씩이나 베출한 유이한 지역이다. 이후 프로모터로 변신한 염 챔프는 백인철, 박종팔, 유명우, 김환진, 김철호, 장정구등 대형선수들의 세계타이틀전 경기를 유치하며 흥행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이후 세계챔피언 출신으로 최초로 KBC 사무총장도 지냈다.

한평생 복싱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한국복싱의 역사이자 전설인 염 챔프는 필자에게 “조만간 세계 타이틀 1, 2차례 더 유치한 후 프로모터 사업을 접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글쓴이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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