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의 화신’ 김득구...쓸쓸한 40주기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불꽃처럼 온몸을 태운 김득구 선수 어릴때 냉대와 굶주림 날려버리려는 듯 명민한 두뇌파 복서가 그날은 전사처럼 그를 기리는 흉상·기념관이라도 있었으면
11월14일 김득구 사망 40주기에 맞아
1912년 질레트라는 선교사가 이 땅에 권투를 소개한 이래, 1982년 11월 14일은 가장 큰 슬픔이 밀려온 날이다. 그 날은 한국 복서로는 최초로 복싱의 메카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 펠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진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레이 맨시니와 일전을 벌인 김득구가 14회 비명에 간 날이다. 올해는 벌써 40주기이다.
김득구는 1955년 1월 8일 군산시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에서 재가한 모친 양선녀 씨와 부친 이동석 씨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이름은 이덕구(李德九). 그러나 출생이 주민등록상으로는 1959년 8월 1일 강원도 고성군으로 되어 있고 묘비에는 1956년 8월 10일생으로 되어 있다. 그의 복잡다난한 인생행로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친은 2살 되던 때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김득구가 6살 되던 때 강원도 고성의 김호렬 씨에게 또다시 재가했다. 3명의 의붓 형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김득구의 굴곡진 인생이 시작된다. 고성에서의 기억은 냉대와 굶주림 뿐이었다.
김득구를 기억하는 이들
필자는 김득구 타계 40주기를 맞아 생전에 김득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사업가 조성우 회장과 동아체육관시절 가장 가깝게 지냈던 절친 이상봉 선수를 지난 주말 종로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김득구의 6년간의 짧고 굵은 복싱 여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었다.
순창에서 목축업을 하고 있는 이상봉은 김득구가 약혼녀 이영미 씨와 함께 살았던 서울 관악구 봉천3동 연립주택 A동 2층 3호 바로 아래층에 살았던 절친이었다. 1982년 7월 김득구가 약혼식을 올릴 때 유일하게 참석한 복싱인이었다. 원래 이덕구였던 김득구는 이상봉을 같은 이 씨라고 말하면서 더욱 친밀하게 대해 줬다고 회고했다. 1948년 서울 태생의 조성우 회장은 1970년대 초반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인근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복싱의 광(狂)팬이다. 그가 김득구와 인연이 된 것은 조 회장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종업원이 WBA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김환진과 친한 친구 사이였던 게 계기였다. 당시 퇴계로에 있는 동아체육관을 다녔던 김환진이 훈련을 마치면 친구를 만나러 이곳 종로 3가를 왕래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김환진이 조성우 회장에게 후배 복서 김득구와 이상봉을 소개시켜 주면서 인연을 맺는다. 이때부터 조 회장은 무명의 복서 김득구를 소리소문없이 지원해준 은인이었다.
1977년 밴텀급으로 MBC 신인왕을 차지한 이상봉은 양돌맹, 하경주, 조자호, 윤석정 등 국내 정상급 복서들을 잡고 9전 8승(3KO) 1무를 기록한 유망주였다. 그러나 1979년 10월 WBC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낸 태국의 베니세 보코솔에 패배를 당한 후 복싱을 접었다. 이상봉에 의하면 조 회장은 당시 직공들 한달 월급이 4만원이던 시절 김득구에게 10만 원씩을 수시로 지원한 독지가(篤志家)였다. 필자가 연재하는 칼럼의 애독자이기도 한 조 회장은 “득구가 사무실을 방문할 때마다 ‘복서로 성공해서 어머님을 모시겠다’는 말을 수시로 하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회고했다.

리듬감이 좋았고 영민했던 두뇌파 복서였는데
김득구는 1975년 3월에 상경, 1976년 가을 동아체육관에 입관한 후 1977년 서울 신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를 발판으로 그해 이상봉, 박종팔, 양일, 김응식과 함께 천호 상전에 입학, 그해 5월 벌어진 제1회 김명복 박사배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1978년에는 제28회 학생 선수권과 제2회 김명복 박사 배를 차례로 석권, 2관왕을 차지한 김득구는 그해 12월 33전 29 승(17KO) 4패의 아마복싱 전적을 뒤로 하고 MBC 신인왕전에 출전했지만 3회전에서 탈락한다. 이후 1982년 11월 14일 WBA 라이트급 챔피언 맨시니에게 도전할 때까지 이필구, 임홍규, 김광민 등 국내 라이트급의 정상급 복서들을 제압하며 12연승을 달리면서 WBA 라이트급 1위에 오른다.
김득구가 상대한 WBA 라이트급 챔피언 맨시니는 24승(19KO) 1패를 기록한 하드펀처 였다. 맨시니 측은 이 경기를 손쉽게 KO로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12월 8일 3차 방어전을 미리 예약할 정도로 동양에서 날아온 김득구와의 방어전을 일종의 쉬어가는 경기로 생각했다. 이에 언더독 임을 깨달은 김득구는 그가 묵던 시저스 펠리스 1288호 호텔방에 ‘맨시니 너를 기필코 죽인다’라는 섬찟한 혈서격문을 써 붙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김득구는 본래 리드미컬하고 영민한 두뇌파 복서였다. 1982년 2월 벌어진 극강의 파이터 김광민과의 동양 타이틀전을 할 때만 해도 두뇌파 복서다운 전법을 구사, 큰 차이로 판정승을 거뒀다. 그러나 맨시니와 대결에서 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탐색전도 없이 사생결단을 각오한 듯 초반부터 격렬한 타격전을 펼쳤다. 김득구가 19전을 싸우는 동안 그렇게 물불 안 가리는 악마 같은 투혼을 펼친 경기는 없었다. 매 경기 한결같이 스텝 어웨이(Step away) 하면서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복서가 바로 김득구 였던 것이다. 그런 김득구가 기존의 스타일 대신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화끈한 경기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불꽃 튀는 타격전을 맨시니와의 타이틀전에서 펼쳤다.
그 경기는 적어도 9회까지는 누구의 우열도 점칠 수 없는 시소게임, 즉 대접전이었다. 그러던 10회. 김득구가 뒤통수를 때린다는 이유로 감점을 당하면서 팽팽하던 균형의 추가 흔들렸다. 급기야 11회에 김득구가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된 모습을 보이자 맨시니는 ‘폭주 기관차’란 별명처럼 사정없이 몰아부쳤다. 그리고 맞이한 14회, 맨시니의 회심의 라이트 일격에 쓰러지면서 27년의 인생드라마도 막을 내린다. 결국 김득구는 죽어서 돌아왔다.

쓸쓸한 40주기...기념 동상이라도 있었으면
당시 친구 이상봉은 김득구의 죽음이 헛되이 되어선 안된다면서 한국복서의 얼과 투혼을 전 세계에 보여준 그를 4.19 묘지에 안장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그는 또 김득구 흉상을 제작해 모든 체육인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 대로 실행되지 않고 김득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산야에 쓸쓸히 묻혔다.
필자와 대화를 나누던 이상봉은 “김득구의 무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김득구 타계 40주년을 맞아 모 방송국에서 김득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이었다. 이 말을 듣고 필자도 확인작업에 나섰다.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 수소문한 결과 김득구 묘지는 원래 주인이 따로 있는 사유지(私有地)였다고 한다. 그런 이곳에 수 년전 김득구의 유복자인 김지완 씨가 찾아와서 파묘하고 화장을 했는데 묘소를 따로 만들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현재 이곳에는 김득구의 이복형인 김근식 씨가 살고 있는데, 땅 주인을 포함해 세 사람 간에 조율이 있었던 것 같다. 이에 이상봉은 차리리 땅을 매입해서 묘지를 유지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문득 1980년 9월 1일 LA에서 WBC 밴텀급 챔피언 멕시코의 루페 핀토르와 타이틀전을 벌이다 12회 KO패를 당한 후 타계한 조니 오웬이란 영국 복서가 떠올랐다. 조니 오웬은 사후 그의 고향인 영국 웨일즈의 머타이어 타이필에 안장되었고 2002년도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그곳에 세워졌다. 조니 오웬의 동상 제막식에는 루페 핀토르도 참석했다. 그러나 한국복싱을 대표해서 이역 땅에서 비극에 가려진 명승부를 펼쳤던 김득구는 4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인들에게 잊혀진 존재로 전락했다. 한국복싱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과시했던 복서 김득구의 혼백이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 다니는 듯 해 복싱인의 한사람으로 억장이 무너진다. 지금이라도 김득구를 기념하는 흉상과 함께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작은 기념관이라도 만들어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이름 김득구! 편히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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