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성’의 시대...망국 이후 찾아온 과학의 열망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⑮’과학천재’ 이상설의 비운과 공백기 뒤늦게 깨달은 ‘과학의 필요’...그 한계
“순수한 문과계통의 학문만을 학습하여 가지고 교문을 나온 그네들은 자연과학에 아무런 교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반신불수의 대학 졸업생들이다. 불행히도 그네들의 수효는 전 졸업생 수의 약 칠 할이나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인문계통 졸업생이 사회에 나와서는 정치 경제 법률기타 모든 중요 방면에 지도자격으로 군림하여 이공학부 출신의 기술자를 부리는 지위를 점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불완전한 학제 밑에서 대학을 졸업한 자가 어떠한 기회에 과학의 위력을 느끼게 되면 이에 대한 기본 질적 문제를 고찰할 만한 과학적 교양이 없음에 따라 전연(全然)히 맹목적, 맹신적으로 그 위력에 추종하여 자연과학의 공식적 성과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무조건 굴복과 동시에 덮어놓고 경의와 신앙을 가지게 된다. 때로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자기 지위에 종속된 권력이나 위력행사를 감행하다가 대사를 잡치는 지도자도 종종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을 설복시키려면 단순히 자연과학의 공식적 위용을 과시하면 충분하다.”- 최규남, ”한경희. 한국 엔지니어의 형성과 발전. 들녘, 2021”에서 재인용
1900-1920년대 대한제국과 식민지 초기는 한국과학기술의 암흑기였다. 갑오개혁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양반층 자제들은 법학이나 군사학 등을 전공하고 돌아와 식민지가 된 조국의 관료가 되었고, 1900년대를 거쳐 1920년대 활발하게 미국으로 진출한 유학생들 중엔 한국과학기술의 1세대가 섞여 있었지만, 이들이 주체적으로 연구하고 활동할 기반은 식민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막내였던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20세기초 한국에서 독립협회를 창설하며 의학도도 과학도도 아닌 계몽운동가로 활동해야만 했다.
<신편 한국사>의 ‘근대과학시대’ 개화기 편의 저자(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이런 수준 낮은 과학기술의 처참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서양에 유학하여 직접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온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간접적으로 이를 익혀 온 인재도 한 명도 없는 채 조선왕조는 19세기를 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교육을 충실히 할 수 있게 외국으로부터 자격 있는 과학기술 교육자를 초빙해서 국내의 청소년을 교육시키는 여유조차 전혀 없었다. 1880년대 이후 근대적 학교는 계속 문을 열었지만, 과학기술 교육에는 더구나 효과가 없었다.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기까지 겨우 이 땅에서 이룩된 과학이라면 초등교육 수준의 과학 지식이 조금씩 대중화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뿐이다. 애국계몽운동의 핵심에 때로는 과학기술을 말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 운동에 참가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의 과학 수준이 바로 초등학교 이하에 머물 따름이었다. 이런 낮은 수준의 과학기술에서 도약할 수 없었던 조건은 190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겨우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많지도 않은 이들의 진로 역시 조국의 과학기술 수준 향상에 이바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의사’로 살지 못한 서재필과 ‘수학자’로 살 수 없었던 이상설
서재필이 쓴 독립신문의 사설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내용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망국을 앞둔 조선의 지식인 계층에게 가장 급한 문제는 민족의 독립이었고, 과학기술은 당장 나라의 독립을 위한 방법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 이 시대 동아시아와 전세계는 민족주의의 전방위적인 확산을 경험하고 있었고, 민족주의에 새롭게 눈 뜬 조선의 지식층에게 과학기술 연구는 한가롭고 부차적인 요소인 게 당연했다.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상설의 삶은, 망국과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야 했던 근대 과학기술분야의 선구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을 요약해 보여준다. 이상설(1870-1917)은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과학사가 박성래에 의해 ‘한국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로 평가될 정도로 서양의 과학기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15세 때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도 고종의 초청으로 와있던 서양인 호머 헐버트 등과 교류하며 외국어와 서양과학 등의 신학문을 익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당시 세계열강의 힘의 근원이 선진학문 특히 자연과학에서의 수월성에 근거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침략을 피할 수 있는 조선 국력 신장의 열쇠는 서양의 선진학문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학습과 교육에 있다고 여겨, 1899년에 <수리>라는 수학책을 집필하고, 이후 <식물학>, <화학계몽초>, <백승호초> 등의 서양과학책을 필사해 펴냈다.
27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될 정도로 천재로 인정받았으나, 그의 조국은 일본에 병합될 위기에 처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의 당사자로 참가하여 조약의 체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자결하려 했고, 주변의 만류로 실패하자 이후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만주로 망명한다. 망명지 간도에서도 서전서숙을 설립해 수학을 가르쳤으나 일제에 의해 탄압당하고, 이후 잘 알려진 것처럼 1907년 고종의 요청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된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실패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이상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덴버 등을 순방하며 한인 교포 사회를 결속시키는데 노력했다. 이후 1909년 러시아-만주 국경 지방에서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한다.
경술국치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1914년엔 박은식, 신규식, 이동휘, 성낙형 등과 신한혁명당을 창설해 본부장을 맡았으나, 이후 신한혁명당 활동은 국내 조직원들이 체포당하면서 중지된다. 1916년엔 건강이 악화되어 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키로 옮겼으나 사망했다. 그는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9세기말 조선에서 태어난 지식인들에겐, 한국과학기술의 1세대가 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망국의 시기에 혼란한 국정을 수습해야 했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 이후엔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또는 조용히 눈치나 보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근대과학의 기원을 조선시대로 끌고 들어가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김근배는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과학기술자 되기>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이공계 고등교육을 받은 약 2300여명의 인물들을 추적한다. 갑자기 식민지 상황에 놓인 조선인들에게 근대식 교육은 “신분과 지위를 바꿀 가장 중요한 통로”로 여겨졌으나, 이 시기 도입된 이공계 교육은 조선인들에겐 매우 낯설고 불확실한 선택지였다. 이들 대부분은 중하층 출신이었고, 사회적 명망가의 자제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이공계에 진출했다.
식민지 국내에서 이공계 고등교육을 받은 1900년~1920년대생들은 향후 미국 및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과학기술자들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의 1세대를 형성하게 될 운명이었다. 즉, 한국에서 근대과학이라 불릴 수 있을만한 시도가 처음 나타난 것은 망국 이후의 일이다. 개항 이후 30년이 넘게 과학기술을 수용하지 못한 근대의 지연이 과학기술 1세대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라를 잃고서야 찾아온 과학에 대한 열망
“일제강점기는 한국 근대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전부터 이어져온 한국의 내재적 노력을 발판으로 근대 과학기술이 이 시기에 들어 더 활발히 추진되었다. 과학기술의 근대적 제도라 할 고등교육기관, 시험연구기관 등이 세워졌고, 전문분야별로 과학기술자들의 활동이 몇몇 학술단체의 학술저널을 통해 발표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때는 대한제국 시기에 비해 과학기술활동이 더 체계적인 제도의 구축을 통해 활기를 띠었음을 알 수 있다.”- 김근배(2011). “식민지 과학기술을 넘어서-근대 과학기술의 한국적 진화-”
나라가 망하자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나라가 일본에 병합된 존재론적 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은 뒤늦게서야 과학기술의 부족이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되었다고 자각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910년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다가 1917년 ‘매일신보’에 다시 장편으로 발표된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미국에 유학해 생물학을 공부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누구도 ‘생물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형식도 생물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 하여” 생물학을 선택한다. 형식은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과학을 먼저 줘야겠어요”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기약 없는 약속으로 들린다. <무정>은 당시 25세에 불과했던 이광수조차 과학이 중요하다는 현실의 파악에나 성공했을 뿐, 어떻게 과학을 수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당시 식민지 인문지식인의 처참한 현실을 그려내 보여줄 뿐이다.
1910년대의 조선은, 나라는 망했고 과학기술은 배워야겠는데, 그 누구도 방법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초등교육을 갓 벗어난 수준의 과학지식이 교육되기 시작했고, 과학기술을 교육해야 할 이들은 대부분 유학을 선택하는 상황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외교권이 박탈되자 개화자강파에 의해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즉 ‘애국계몽운동’이 펼쳐진다. 이들은 당장 국권을 무력으로 되찾을 수는 없으니, 장기전을 전제로 실력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교육구국운동, 언론계몽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신문학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독립군기지 창건운동 등이 이 시기 애국계몽운동의 주요 아젠다였다.
갑자기 찾아온 대각성(大覺醒)의 시대에 과학 또한 갑자기 지식인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자라는 직업 자체가 전무했던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인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은 문학을 통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인문주의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은 문학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망국 직후 조선에서 최고의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이들 대부분은 문학에 몰려 있었다.
나라가 망했다는 인식이 확산되던 1910년대 출판된 <신문계>, <청춘>, <학지광> 등을 중심으로 ‘과학과 실험’ 담론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 담론은 교양으로 암기하는 지식이거나 엽기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읽을거리로 존재했다. 교양으로 소개된 과학기술은 계몽을 목표로 했으며,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을 형상화하는데 기여했다.
1908년 일본유학파였던 이창환은 <대한흥학회월보>에 실은 ‘철학과 과학의 범위’라는 글에서 “철학이라 함은 형이상적 무형한 사상과 심리학과 같은 것이오, 과학이라 함은 형이하적 유형한 물리학과 이화학과 같은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같은 해 <태극학보>에 김영재가 쓴 ‘과학의 급무’라는 글에는 “오인이 지칭하는 바 과학은 즉 실학이니 공리공론도 아니며 상상도 아니오. 실제의 학문이니 차를 실제상에 응용하면 국가사회의 각종 사업을 발달케 함과 동시에 일반 국민의 상식을 발달케 하는 기초가 되나니...(중략) 실학은 즉 과학이니 고로 과학의 보급이 금일 급무라 위할지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조선을 망국에 이르게 한 유학을 공리공상의 허학으로 보고, 다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실학, 즉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광범위한 인식은 여러 잡지를 통한 물리,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 제반 분과 과학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대각성의 시대가 열렸고, 이미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라에서 과학은 환대받는다.

문인들이 소환한 과학과 그 한계
<신문계>는 1913년 창간호에서부터 발전된 과학기술의 적극적인 소개를 창간의 목적으로 삼았다. 1914년엔 과학호를 특집으로 발간하며 근대과학기술 문명의 이상을 고취하고자 했다. 이 잡지도 이전세대 잡지들이 이미 시도했던 교양 수준의 과학지식을 소개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는 식민지 상황에서 과학기술연구 자체를 장려하는 것 자체가 현실과 유리된 당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당시의 필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신문계>에서 특집으로 나온 과학호에 실린 ‘명사의 과학담’에는 조선 과학이 미약하니 전문학문보다는 보통학문을 습득하라는 조언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신문계>의 필자들은 “1910년대 중엽의 조선에 있어서 과학 및 공업의 발전을 통한 물질문명의 창달은 요원한 것이 아니며,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기정사실화된 미래로 제시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공유했다. 왜냐하면 <신문계>의 필진 대부분은 일본 유학파였고, 1차세계대전의 파탄과 동시에 그 반동으로 일본의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호황을 경험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과학기술이 선사할 수 있는 물질문명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고, 그들이 보기에 비록 식민지일지언정 조선에서도 일본과 같은 과학기술의 물질문명이 탄생하는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들 일본유학파 출신 인문 지식인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대각성을 촉발한 개념은 ‘과학’이었고, 과학이라는 용어는 <신문계>, <학지광>, <청춘> 등의 잡지를 통해 기존의 이학이나 실학 등과 확연히 다른 독자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들 지식인들이 과학기술을 통한 물질문명의 도래를 기정사실화하자, 과학이 차지했던 자리에 청년 담론이나 인생주의, 자연주의 문학론 등이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한다. 특히 최남선이 간행했던 <아이들보이>나 <청춘>등의 잡지는 전시대의 <소년>에 비해 과학 관련 주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신문계>의 필진 중 한 명이던 백대진은 <과학연구의 방법>이라는 글을 발표한지 불과 10개월도 안되어 <근대인의 물질욕과 정신관>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과학은 ‘물질주의-물질문명-물질적 생활-물질욕’이라는 연쇄작용을 만들며, 이로 인해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겐 “심신 피로라는 곤경과 정신병 신경쇠약을 조장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백대진이 과학을 상대화한 도구는 바로 자연주의 ‘문학’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망국과 함께 찾아온 대각성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과학을 소환했다. 하지만 과학을 소환한 이들 대부분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문주의의 타성에 젖은 상황에서 과학에 대한 반발심 또한 동시에 싹트기 시작했다. 즉, “식민지 조선에서 과학과 문학은 사실상 거의 동시적으로 정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형래는 망국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시기에 펼쳐진 이와 같은 과학/문학 개념의 정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과학이 초래했다고 여겨지는 여러 문제를 직시함으로써 해소 내지는 보완하고자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구상되었지만 동시에 과학의 혁신이 없었다면 성립 불가능한 관점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배리적이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라는 이율배반을 내포한 상태로 정초되었다.”
1900년대 과학소설이 과학을 신비하고 기이한 소재를 빌려오는 도구로 사용하는 동시에 과학자를 기괴한 괴물로 사용하였다면, 1910년대 과학소설은 이보다 더 성숙한 과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특히 이광수와 같은 1910년대 신지식층은 전신, 비행기, 잠수함, 각종 서양의학의 발전을 목도하면서 과학을 통해 “전통적인 숙명론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자력론”을 구상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경성 유람기>는 기차를 발명한 ‘스지분손’을 인류 문명 발전의 최고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잡지 <청춘>은 증기기관의 발명자 제임스 와트의 삶을 천재-위인-영웅으로 포장한다. 과학을 통한 문명발전과 이를 실행하는 주체인 천재-위인-영웅 과학자는 민족 부흥의 논리와 연관을 맺기 시작하고, 이런 기조는 이상춘의 소설 <기로>에서 소년 발명가 영웅의 탄생으로 나타난다.
중학교에서 배운 응용화학 지식만으로 염료 공업을 일으켜 성공하는 <기로>의 주인공은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꿈꿀 수 있는 최선의 신화였다. 하지만 동시에 1910년대의 경성은 유학생 지식인의 눈에는 제대로 된 도서관과 학회 하나 없는 과학기술의 원시사회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인들이 계몽의 도구로 소환했던 ‘과학과 실험’ 담론은 불과 몇년도 이어지지 못한 채 다시 망국 이전의 담론들이 지식인사회의 주제로 등장한다. 과학이 담론으로 유행했지만, 문인들 중에서 과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과학이 지식을 생산하는 구조에 관심을 가진 이도 없었다.
이런 과학에 대한 표면적인 관심과 곧이어 벌어진 무관심은 과학을 통한 민족자강에 대한 치열한 생각이 없거나 혹은 그러고 싶어도 아예 방법을 모르는 상황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일본 유학파 문인들이 주도했던 문학을 통한 과학계몽운동은 대중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는지 모르지만, 국가적으로는 아무런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문학계 내부에서는 과학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퇴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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