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와 시인, 이데올로기 혹은 방법론의 과학

[김우재의 한국사회와 과학] (16)춘원 이광수의 실패한 과학담론 시인 이상이 도전한 천재적 접근

천재시인 이상.
천재시인 이상.

“1910년대 담론에서 과학 기술은 위대한 발명의 꿈과 문명 발전의 숭고를 내포한 대상이며 새로움의 향방이 불분명한 어떤 것으로, 경이로운 환상이나 기묘한 풍경으로 구성된다. 과학은 그 중립성과 객관성으로 인해 피식민 지식인들의 새로운 이상으로 떠오르지만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발달된 과학 기술의 습득과 개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은 1910년대 담론에서 과학과 기술이 현실성을 가진 대상이 아니라 암기되는 지식의 대상이나 엽기적인 취미와 몽상의 대상으로 표상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최신 과학 기술과 문명은 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허구적인 몽상과 신비한 미혹의 세계로 나타나며, 동시대 과학 문명 제국의 시선을 전유한 피식민 지식인들은 그에 대한 모방 욕망과 피식민의 소외된 현실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계몽 담론이 요청하는 개척 과제인 동시에 대중의 엽기적 흥미가 향하는 대상으로, 피식민 지식인의 과학과의 거리감은 과학 기술 발전을 합리적인 연구 결과로 보기보다는 마술이나 신기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 공명하고 있다.”- 김주리, “1910년대 과학, 기술의 표상과 근대 소설: 식민지의 미친 과학자들”⁠

김주리는 1910년대 소설에 등장한 과학담론 속에 녹아 있는 피식민 지식인과 과학 사이의 거리감이, 과학을 마술이나 신기한 대상으로 보는 시각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과학을 소환했지만, 누구도 과학자가 아닌 시대, 1910년대 문학계가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잘 포착한 당대의 지식인은 <무정>이란 소설로 유명한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1917년 연재를 시작한 소설 <개척자>에서 주인공 김성재를 화학자로 설정하고, 김성재가 화학실험실에서 최신 과학기술을 발명하려는 욕망으로 미쳐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성재는 위대한 발명으로 인류와 사회에 기여하려는 이상을 지닌 과학자로 그려지지만, 결국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실패가 뻔한 실험에 몰두한다. 이광수는 김성재의 실패를 통해 당시 조선사회에서 실험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애를 추구하는 근대 과학의 기술적 숭고함은 식민지 조선에서 너무나 앞선 현실로 존재하며 따라서 그 숭고함이야말로 광기와 죽음의 근거이자 시대착오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이광수,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에 접근

식민지에서 조선 사회와 문화의 변혁을 추구하던 식민지 지식인 이광수에게, ‘사회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에 동조한 그는 후쿠자와의 묘소에 참배까지 할 정도로 그를 동양의 위인으로 숭배했고, 후쿠자와가 ‘유교에서 과학으로, 윤리에서 물리로’의 전회를 이루어낸 것처럼 그 역시 조선문화의 변혁을 이루어내려 했다.

이광수는 유교를 배격했고, 와세다대학에서 자연과학의 세례를 깊게 받았다. 그는 철학적으로 추리해보면 가능한 학문은 자연계의 과학적 탐구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단지 종교만이 아니라 자기 전공인 철학까지 비웃었고 생물학과 천문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수업에 열중했다⁠. 이광수의 사상을 과학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한 황종연은, 1910년대 식민지 지식인 이광수를 이렇게 표현한다.

“1910년대의 이광수는, 당시 그의 과학 소양이 어떤 수준이었든지 간에 과학이 조선인에게 열어주는 진보의 가능성에 크게 매혹되어 있었고 과학에 근거한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수립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광수가 1910년대에 이룩한 지적, 문학적 혁신은 많은 부분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추구와 연관되어 있으며 흔히 탈(脫)마법화라고 불리는 근대적인 방식의 세계 표상을 중요한 주제로 포함하고 있음을 나는 논증하고자 한다.”

1910년대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과학은 조선의 산업 진흥과 연관되어 있었다. 송진우, 현상윤 등의 지식인들은 조선에서 산업혁명을 일으키려면 과학의 응용과 과학교육이 필수적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광수는 과학의 물질적 측면 외에도 정신생활의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그는 과학의 진정한 의의가 ‘과학과 인생과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고, 청년들에게 ‘과학정신’에 기초한 인생관을 권고했다⁠. 그에게 과학은 인간과 세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인간 생활을 합리적으로 영위하는 현대적 방식을 의미했다. 이런 이광수의 생각은 ‘과학은 현대의 종교’라는 사상으로 발전하고, 그는 인간 문화에서 과거에 종교가 차지하던 지위를 현재는 과학이 차지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광수가 보기에 식민지 조선은 유교, 기독교, 과학 삼자의 각축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이를 계몽하려면 과학을 가지고 유교 및 기독교의 제종교를 공격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상의 끝에서, 이광수는 신을 버리고, ‘진화론의 문귀를 염불 모양으로 외우게’ 되었다⁠. 이광수의 작품 속에서 문명과 과학의 서사를 분석한 서희원은, 이광수의 사유를 ‘과학’이라고 규정한다.

”문명과 종교, 민족의 수사를 조직하고 특정한 사유를 배제하며, 이를 소통·분배에 적합한 문학의 언어와 서사로 집약하는 것, 이러한 이광수의 사유를 지칭하는 데 가장 적합한 명칭은 분명 ‘과학’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과학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통해 문명의 발전을 견인하는 원동력이었던 동시에 인간에 대한 통제와 규율을 강조하는 비인간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하였다.”-서희원. “조선의 미래 혹은 문명과 과학의 서사 이광수 초기 논설과 소설을 중심으로”

이광수에게 최고의 과학은 생물학, 그 중에서도 진화론이었다. <무정>의 주인공 형식이 해외유학을 가서 생물학을 전공하려 한 이유는 이광수가 다윈의 진화론이 성경을 대신할 것이라고 생각한 과학주의자에 가까운 사유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며 기독교의 구속을 벗어났지만, 그의 진화론적 사유는 생존투쟁과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에 가까웠다.

춘원 이광수.
춘원 이광수.

그의 작품 <무정>에는 초월하는 인간 종으로서의 이형식이 그려지고, 이광수는 이형식을 통해 ‘근대과학 지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하나의 생물학 실험 보고서’로 이 소설을 완성해나갔다. 특히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주장했던 에른스트 헤켈의 책 <우주의 수수께끼>를 읽고 감명받았던 이광수의 진화론 이해는, <무정>의 주인공들이 개체발생을 통해 진화하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이른다. 진화론을 통해 이광수는 유럽사상사에서 보이는 급진적 계몽주의자의 태도에 근접하며, 마치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 디드로, 돌바크와 같이 ‘신 없는 자연’을 주장하게 된다.

이광수를 비롯한 1910년대 지식인들에게 과학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 생존경쟁의 현실 속에서 식민지 상황을 타개할 근대 교육의 중핵으로 떠오르며 위생, 건강, 문명, 합리성의 담론과 결합해 계몽적 가치를 갖는 핵심도구였다. 이광수의 초기 소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과 김선형이 생물학과 수학을 배우겠다는 의지로 유학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광수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자 <무정>이 발표된 이후 불과 1년 후에 쓰인 <개척자>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이광수의 시선은 변화한다. 이광수는 일본에 병합된 조선에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깨달은 지식인이었으나 과학기술이 생산되는 현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인문적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제국주의적 팽창이 확산되고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시기를 살던 그에게 과학기술은 물질문명의 기초임과 동시에 인류를 타락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도구로 인식되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 이광수의 생각은 중층적이었고, 이런 그의 분열된 사고는 소설 <개척자>에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이광수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문명을 대표하는 과학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정신적 가치를 문명을 구성하는 보다 핵심적인 가치로 여기면서, 이성에 토대를 둔 도덕성을 체현하는 인물의 면모를 그려내고자 했다. 서사 중반에 나타나는 서술자의 생명론에는 조선의 근대를 수립하는 길로서 ‘물질적 문명’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정신적 문명(문화)’의 창조로 관심이 이동하는 양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생명과 진화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로 나타나는데, 단선적인 진화론적 진보에 대한 회의와 함께 조선적인 것을 재산으로 삼아 근대적인 문화를 이루는 길을 암시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생명의 발현으로 나타난 문화의 본질은 ‘도덕’이며, 이광수에게 생명 담론이 ‘정’ 혹은 ‘본능’이 아닌 칸트적인 ‘이성’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과학’과 ‘문명’에 대한 이광수의 사유는 단일하지 않은 중층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이행미, “두 개의 과학, 두 개의 문명- 이광수의『개척자』를 중심으로”

즉, 이광수는 일본 유학과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영향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의 물질문명적 가치와 정신문명적 가치 모두를 받아들인 거의 최초의 조선 지식인이었다. 그는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선에서 과학기술을 주제로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하며 이를 유행시켰고, 대중에게 과학의 의미를 각인시키는데 분명히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속 주인공들처럼, 이광수 본인은 과학자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고, 평생을 문필가로 살다 죽었다.

이는 이광수가 살아가던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과학을 전공해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과학연구를 위한 연구소도 없는 조선에서 이광수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앞선 지식을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형식, 즉 소설로 발표해서 조선의 지식인과 대중 모두를 계몽시키는 것 뿐이었는지 모른다. 과학에 대한 이광수의 이런 급진주의적 태도와 과학을 종교를 대체하는 무기로 보는 그의 사유는 당시 문학계에 과학을 각인시키는데 효과적이었으나 반대로 과학을 상대화하며 반발하는 태도를 불러일으켰다.

이광수에게 문학은 뉴튼적, 다윈적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 생존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 세계에 대해 소원한 인간의 마음을 기록하는 행위로 변화되었고, 동시에 초기 이광수의 작품을 기점으로 한국문학은 과학에 대하여 충정과 반심을 함께 가지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소설 '개척자'에서 주인공은 가산을 모두 쏟아부어 화학실험을 진행한다. 식민지 조선에선 불가능한 판타지였지만, 이광수는 이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과학과 근대, 그리고 문명과 식민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이광수의 소설 ‘개척자’에서 주인공은 가산을 모두 쏟아부어 화학실험을 진행한다. 식민지 조선에선 불가능한 판타지였지만, 이광수는 이를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과학과 근대, 그리고 문명과 식민지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이상, ‘방법으로서의 과학’으로 나아가기

망국 이후 1910년대의 조선 문학계에서 벌어진 과학담론은 이광수를 주축으로 과학을 이데올로기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시도이기도 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대부분 관심조차 없던 과학이 이제 문인들을 중심으로 거의 종교적 열광에 비유될 정도로 유행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천재 시인’으로 유명했던 이상 또한 과학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문인들과 달리 건축학도로 교육받았고 따라서 실제로 과학을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걸 넘어 과학의 방법론을 당대의 문인들보다 더 전문적으로 이해하고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이광수가 과학을 물질문명 건설의 도구일 뿐 아니라, ‘과학정신’을 통해 문화를 변혁할 도구로 여겼다면, 시인 이상에게 과학은 관념적 표상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다. 과학과 수학의 방법론에 매료된 이상은 과학의 언어를 보편언어의 가능성으로 생각했고, 수식과 숫자 등을 이용해 세계를 수학적이고 과학적 언어로 환원하려는 강박을 보여준다⁠.

이상은 1910년생으로 1856년생인 유길준, 1890년생인 최남선, 1892년생인 이광수와 달리 경술국치와 함께 태어난 식민지의 아이였으며 도시인이었다. 식민지가 된 경성에서 태어난 이상은 어린 시절부터 근대적 교육을 접했고, 건축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기하학적인 기제들을 이용해 기술적 실현을 추구하는 건축은 당시 식민지의 조선인이 과학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분야였고, 바로 이런 차이로 인해 유길준, 최남선, 이광수에게서 보이는 과학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이상에게선 다른 차원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이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문학에서 과학-기술은 표층적 차원의 ‘지식’이나 ‘문명’의 차원이 아니라, 신체에 각인된 ‘감각-기분’의 문제로 깊이 스며들었다⁠.”(함돈균, “이데올로기로서 과학과 방법론으로서 과학 - 이상 시 창작방법론에 깃든 ‘과학’의 문제”)

짧은 시간일지언정 건축기사로 살았고, 글 쓰는 일을 빼면 건축기사가 그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즉, 이상은 당시의 문인들 중 유일하게 과학기술이라는 근대지식프로그램으로 훈련을 받은 걸 넘어 그 지식을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공인을 받은 지식인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상은 건축을 ‘근대 서양이 힘을 갖게 된 수학 프로그램의 기술적 버전’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상은 비록 과학기술을 교육받긴 했지만 전문적인 과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에서 강박적으로 상대성이론 등의 첨단 과학지식과 수식을 등장시킨다. 이상의 시를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한 함돈균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과학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개별적 삶을 보편 형식으로 치환할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으며, 자기 시에 그가 차용한 것은 바로 과학 언어가 지닌 이 보편언어의 가능성이었다. 그것은 문학언어의 차원에서 보자면 시의 언어를 확장하는 또 하나의 도구적 방법론이기도 했다. 기하학이라는 학문이 본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실의 삼각형을 포괄하고 관통하는 추상의 삼각형을 찾는 일이라고 할때, 과학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 치환하려는 이상의 대담한 기획은 언어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그 자체로 ‘시적 기획’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함돈균, “이데올로기로서 과학과 방법론으로서 과학 - 이상 시 창작방법론에 깃든 ‘과학’의 문제”

함돈균에 따르면 이상은 시인이었지만,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 이상으로 세상의 질병을 ‘진단’하는 ‘의사’이고 싶었고, 과학은 그의 시적 기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이상은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의 과학과 기술과 문명의 압도적인 힘이 그가 훈련받은 과학 프로그램으로부터 나온다는걸 교육과 훈련을 통해 ‘생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훈련을 받은 이상은,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열광 외엔 실제로 과학기술을 구현할 줄 모르는 당대의 문인들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과학지식, 즉 과학의 내용만을 보고 열광하는 그 문인들과는 달리 그 과학지식을 만들어내는 ‘과학의 방법론’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받아들인 아마추어 과학자였으며, 나아가 이를 문학의 언어이자 보편언어로 통합하려는 야심을 지닌 이론가였다. 함돈균은 이상이 수학자 데카르트에게 배운 방법적 의심을 그의 시에 적용했다고 말한다. 즉, 이상은 자신의 시를 가장 철저하게 의심하고 따져묻는 과학주의 방법론으로 썼다는 것이다.

이상의 시는 그 실체적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식민지에서 태어난 조선의 한 지식인이, 과학기술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훈련하고 이를 받아들였을 때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함돈균은 이상의 시가 과학을 문명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식과 답으로 받아들이던 당대의 지식인과 달리, 과학을 문명의 진보를 위한 질문으로서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이를 시적 기획으로 녹여낸 작품이라고 해석한다. 즉, 과학을 지식이 아니라 방법론으로 습득한 건축기사 이상에게 과학은 시의 문제에 있어서도 표면적인 내용의 차원이 아니라 창작방법론으로서 작용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경력의 말기에 친일행적을 보이는 유길준, 최남선, 이광수와 달리 이상은 단 한 편의 친일시도 남기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상의 시에 항일의식이 나타난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함돈균은 앞의 세명과 이상에게 보이는 친일 여부의 차이가, 과학을 수용하는 방식에서의 차이때문인지 모른다고 추측한다. 즉, 과학을 ‘식민지 시대 친일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문명개화론이나 진보론으로 받아들였던 유길준, 최남선, 이광수와 달리, 이상은 과학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방법론으로 받아들이며 과학을 통해 답을 구하기보다 질문을 던짐으로써 친일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대답이 무엇이건,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국가이데올로기와 경제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과학을 구출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과학적 삶의 양식’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선택적 모더니즘’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식민지 시기 열악한 상황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자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과학의 진정한 가치를 과학적 방법론으로부터 찾아나간 이상의 태도는,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를 던진다.

이상의 시에 강박적으로 등장하는 수학과 기하학적 표기와 방법론은, 건축가로 근대과학 교육을 받은 이상이 과학적 방법론을 시의 형식에 적용시키려던 시도일 수 있다.
이상의 시에 강박적으로 등장하는 수학과 기하학적 표기와 방법론은, 건축가로 근대과학 교육을 받은 이상이 과학적 방법론을 시의 형식에 적용시키려던 시도일 수 있다.

과학에 대한 대항담론의 등장 - 문학과 과학의 반목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조선의 지식인들은 과학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지식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인이었다. 최남선, 이광수 등의 일본유학파 문인들은 그들의 시와 소설에 그들이 일본에서 배운 서양 과학기술의 지식을 활용했고, 이를 통해 조선을 계몽하려 했다. 하지만 과학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인 이광수 같은 문인들이 장악한 문학계에서 과학은 물질문명을 타락시킬 수 있는 위험한 도구라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기 위한 인문학적 합리성을 문학으로부터 찾으려는 대항논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광수가 과학을 수용한 방식은 우생학과 사회진화론 등의 역사에서 나타난 과학주의의 일종이었으며, 과학을 절대적 지식으로 여기는 과학주의 속에서 권위주의적 사유가 싹트는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인 이상은 그나마 과학기술을 전문적으로 훈련해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유일한 문인이었으며 서양 근대과학의 정수를 그 과학적 방법론에서 찾는 날카로운 지적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그의 난해한 시는 그의 시대에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엔 부족한 형식이었다. 1910년대 문학계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과, 방법론으로서의 과학이 공존하는 상황이었으나 당시의 과학담론 대부분은 과학을 이데올로기로 왜곡한 이광수 같은 과학주의자가 독차지했다.

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0년대 과학지상주의라고까지 불리던 문학계의 과학담론은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에 나타난 과학은 ‘제로의 가치’로 논의된다. <화상보>라는 소설에서 유진오는 식물학자 장시영의 입을 통해 과학은 무해무익한 것이지만 세상이 모두 마이너스인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 1910년대 <경성유람기>와 <무정>에서 과학은 세상에 엄청난 혜택을 주는 학문이고, 과학자는 영웅호걸로 대접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1940년대의 과학은 모든 것이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치를 갖는 영역으로 퇴보한다.

식민지라는 제한적 조건 속에서 조선인이 도달할 수 있는 과학자의 한계는 일본 엘리트 과학자의 조수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과학기술로 성공하려던 1910년대 태어난 지식인들은 대부분 제국의 기술 관료라는 위치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해방이 올지 오지 않을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과학기술의 1세대가 될 인물들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여기지도, 영웅이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 식민지 피지배층의 일원으로 조용히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0년대 문학에 등장하는 과학과 과학자는, 1910년대를 들끓게 한 문학계의 과학담론이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1940년대에도 문학계에 과학담론이 나타나지만, 더이상 그 과학은 민족의 희망이나 유일한 구원이 아니라 일제하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보통 사람의 그저그런 한 직업분야로 그려진다. 1910년 문학계의 과학담론을 통한 계몽운동은 실패할 것이다. 소설가 유진오의 소설들은 이를 잘 드러낸다. 유진오의 1935년 단편 '김강사와 T교수'는 식민지 시기 나약한 지식인상을 다룬다.
1940년대에도 문학계에 과학담론이 나타나지만, 더이상 그 과학은 민족의 희망이나 유일한 구원이 아니라 일제하 식민지라는 현실에서 보통 사람의 그저그런 한 직업분야로 그려진다. 1910년 문학계의 과학담론을 통한 계몽운동은 실패할 것이다. 소설가 유진오의 소설들은 이를 잘 드러낸다. 유진오의 1935년 단편 ‘김강사와 T교수’는 식민지 시기 나약한 지식인상을 다룬다.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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