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지배당하지 않는 소통이 필요한 때다

[박정인의 언론비평] 윤당선자, 디지털 시대에 물리적 공간 탓? ‘소통 모르는 지도자’ 낙인 생길까 걱정 “우리 소통할까요?” 묻는 지도자 돼야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윤석열 당선자. 사진= 연합뉴스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윤석열 당선자. 사진= 연합뉴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 역사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은 명⋅청 왕조 500년간 중국 황실의 상징부로 군림했다. 푸이가 청의 마지막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황제 24명이 이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옛부터 자금성에는 황제용(用) 말고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하늘과 동급인 절대군주의 궁궐에서 누가 감히 지저분하게 배설을 한단 말인가. 1997년의 기억이니까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필자도 자금성 한복판에서 화장실이 없어 난감했던 경험이 있다.

자금성은 그 존재 자체로 황제 이외의 모든 이들에게 위압감과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궁궐 입구부터 황제의 거처인 건천궁까지 거의 1km에 육박하는 돌바닥을 무릎을 꿇고 기어가야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조선의 국격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들은 황제 근처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사신의 무릎만큼이나 피멍이 들었을 거라고 보면 된다.

미국 워싱턴 DC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잘 계획된 도시지만 알게 모르게 또 다른 공간적 의미를 안고 있다. 덜레스 국제공항을 나와 도심을 향하다 보면 시어도어 루즈벨트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유명한 미 해병 전쟁 기념 조각상과 알링턴 국립묘지 옆을 지난다. 이어서 컨스티튜션 가를 통과하며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 한국전쟁 메모리얼, 2차 세계대전 기념비를 잇따라 구경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쟁들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일으키지도 않았고 몇몇 전쟁은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워싱턴 DC에 처음 들어서는 외국인들은 도심 입구부터 미국이 세계 어디서든 전쟁을 벌일 수 있는 현대판 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섬뜩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요즘 세대들은 광화문에 옛 조선총독부 석조건물이 경복궁을 완전히 가린 채 서 있었고 1995년에야 철거됐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정적인 역사도 역사의 일부분이니 자리를 옮겨서라도 보존하자는 반대론을 “씰데 없는 소리”라고 묵살하고 70년 된 건물을 시원하게 폭파해버렸다.

마지막 잔해가 폭파되는 순간 허공으로 솟아 오르는 먼지 구름 사이로 마법사가 요술봉을 휘저어 만들어 낸 듯 경복궁과 청와대 본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날 필자도 가슴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게 솟아오르는 느낌에 하루 종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공간의 변화가 애국심을 불러 왔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로마의 콜로세움부터 오늘날 건축물들에 이르기까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 사례는 허다하다. 세계사의 흐름 속에는 공간을 이용해 지배받는 사람들의 의식을 조종한 지도자들의 흔적이 길게 남아 있다.

“소통하겠다”며 소통안한 결정 ‘유감’

윤석열 당선자가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역사의 지도자들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기 위해 공간을 활용했던 것과 정반대의 이유를 내세웠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갇혀 있으면 그 공간에 대통령의 의식이 지배 당하니 밖으로 나와 국민과 소통하겠다는 뜻이다.

같은 이유로 청와대를 이전해 국민과 더 가까이 가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당시 광화문 이전 공약을 내세웠었다. 하지만 경호와 비용, 시민 불편 문제가 발목을 잡아 성사되지 못했다.

구중궁궐에 숨었다는 오명을 지우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전을 강행해야 한다는 윤 당선자의 의지를 탓할 이유는 없다. 이것저것 따지다가는 결국 또 다음 정권으로 미룰 게 뻔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화두였다.

우리는 수 천년 인류 문명사에서 몇 안 되는 대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가 불을 사용하게 되고, 도구를 만들어 농경을 시작하고, 증기기관에 이어 전기를 발명한 역사적 전환기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번 전환의 본질은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인류의 소통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전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바로 앞에서 얼굴 마주보듯 대화할 수 있는 시대다. ‘지지직’하는 노이즈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들리는 지구 반대편 친구의 목소리에 열광하던 HAM이나, 비싼 요금 탓에 서둘러 용건만 말하고 끊어야 했던 국제전화의 시대는 지나갔다. 스마트폰 통화와 카카오톡,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이 이들을 대신한 지 오래다.

그 뿐 아니다. 코로나가 번지니까 전세계 학교들이 화상 수업을 하고, 기업들이 화상회의를 열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통신망을 무너뜨리니까 일론 머스크가 스타링크를 이용해 우크라이나에 위성 인터넷 망을 열었다. 이제는 메타버스로 원하는 가상의 소통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과 소통하고 싶은데, 공간이 의식을 지배해서, 청와대에서는 곤란하다’는 윤 당선자의 논리는 구시대적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궁금하면 유튜브를 보면 된다. 가정복지와 청년문제에 대한 생생한 여론은 대통령이 길거리로 걸어나가서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산책 나온 젊은 부부와 대화하지 않아도 온라인 공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굳이 물리적 공간이 중요하다면 지금의 청와대를 활용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청와대의 효자동 쪽이나 팔판동 쪽 담을 허물고 사랑방과 공원을 만들어서 일반 국민과 정치인들이 이용하게 해도 된다. 여야 원내대표가 청와대 사랑방에서 차 마시면서 말씨름을 하는데 대통령이 갑자기 나타나서 “잘 좀 봐주셔”라고 하는 장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공사비도 훨씬 적게 들고 경호하기도 다른 곳보다 수월하다.

공간이 열려도 마음이 닫히면 소통은 불가능

문제는 의지다. 청와대가 아니라, 용산이 아니라,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오픈 집무실을 만들어 놔도 대통령이 눈과 귀를 닫으면 소통은 안 되는 것이다. 소통은 양쪽이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야 비로소 시작된다.

윤석열 당선자는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문제를 도면까지 펼쳐놓고 직접 국민에게 설명했다.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설득과 소통은 성격이 다르다. 설득은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일방적이다. 윤 당선인이 용산 이전을 설명한 방식이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막힘이 없음’, 즉 쌍방향이다. 소통하려면 내 주장을 잘 얘기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의 주장을 잘 들어줘야 한다. 윤 당선자도 그러려고 집무실을 옮긴다는 것 아닌가. 소통하자고 집무실을 옮기는 거라면 옮겨도 될지, 어디로 옮길지, 언제 옮길지를 소통 상대방에게 묻는 게 우선이다.

윤 당선자 측이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집무실 이전을 강행하는 데는 ‘한다면 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대통령, 추진력 넘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충분히 있을 거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소통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데 소통 없이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모순 아닐까?

윤 당선자는 용산 이전 건 때문에 취임도 하기 전에 소통을 잘 모르는 지도자일 수 있다는 걱정을 불러왔다. 이제는 소통이야말로 공간과 가장 무관한 행위이자, 공간을 극복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집무실을 빨리 옮겨야 한다는 윤 당선자의 주장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금이라도 공간은 열려 있어도 마음이 닫혀 있으면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윤 당선자가 알면 좋겠다. 집무실은 용산이지만 몸과 마음은 전국 방방곡곡의 국민 속을 찾아다녔으면 좋겠다. 대통령의 휴대전화는 정부비품이지만 그 안에 저장된 전화번호는 시장의 상인, 공장의 근로자, 전방의 사병, 그리고 방역 현장의 간호사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소통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지 말고, “우리 소통할까요?”라고 상대에게 물었으면 좋겠다.

글쓴이

박정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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