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선거’가 부른 참사

[박정인의 정치 평론] 당장 후폭풍이 잔 바람으로 끝난다고 국민의힘이 안심할 일은 물론 아니다. 정치의 속성상 후폭풍은 언젠가는 온다

사진=YTN캡쳐
사진=YTN캡쳐

선거판과 포커판

포커에서 상대의 패를 일부라도 볼 수 있으면 게임을 이기거나, 적어도 크게 잃지 않을 수 있다. 내 카드가 ‘원 페어’인데 상대방 카드가 ‘풀하우스’일 조짐이 보이면 지금까지 베팅한 걸 잃더라도 깨끗하게 포기하는 게 상책이다. 영화에는 별 볼일 없는 패를 갖고도 과감하게 판돈을 올려 상대가 겁 먹고 카드를 던지게 만드는 경우가 흔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포커는 또 상대가 원수여서 꼭 이기고 싶어도 그 희망을 반영하지 않는다. 카드에는 정의도 없고 감정도 없다. 냉정한 숫자의 승부일 뿐이다.

선거는 상대방의 카드 거의 대부분을 보면서 벌이는 포커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지역구도, 정치상황, 그리고 후보의 자질 같은 것들이 드러난 상태에서 승부를 벌인다. 물론 카드 전체를 까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선거운동기간 조직을 총동원해 열심히 표밭을 갈거나, 갑자기 정치이슈가 터져 판이 뒤집히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선거에서 패배

국민의힘 입장에서 강서구청장 선거는 그렇게 뒤집을 수 있는 선거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질게 뻔하고, 올인했다 지면 후폭풍만 거세질 선거였다. 사실 후보를 내지 않는 게 맞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당이 합작해 야당 텃밭의 구청장 선거를 내년 총선의 중대 바로미터로 만들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의아하다.

조짐은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실형을 선고 받은 김태우 전 구청장을 대통령이 불과 석 달 만에 특별 사면할 때부터 뚜렷했다. 김 전 구청장은 특별 사면을 받은 8월15일 당일 사실상 재출마 선언을 함으로써 대통령에게 화답했다. 이 때 포커 판세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있었다.

이준석 전 대표가 18% 포인트 차이 패배를 예견해 언론에 ‘쪽집게’라는 기사가 났지만 그건 과장이다. 국민의힘 산하 연구기관인 여의도연구원은 이미 선거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15~17% 포인트 차이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 시작이 그랬으면 죽기살기로 뛰어서 점수를 따야 가까스로 격차나마 줄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거에 임하는 국민의힘은 그러지 못했다. 강서구청장 선거구의 당내 역학 관계부터가 김태우 전 구청장의 재출마를 당위로 여기지 않는 구도였다.

지난 해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김태우 후보와 경합하다 단일화 후 국민의힘 선거를 도운 김진선 강서병 당협위원장. 이번 선거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김 전 구청장이 공천을 받자 한동안 잠적했다. 지역 당협위원장 셋 중에 한 명이 선거에서 사실상 빠졌다.

30년 간 강서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김진선의 정치적 후견인은 김성태 강서을 당협위원장. 야당 지역기반에서 3선을 하고 원내대표까지 지냈다. 김태우보다 김진선을 선호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선거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두 명째 손실.

구상찬 강서갑 당협위원장. 역시 강서에서 새누리당 소속으로 뱃지를 단 경력이 있다. 그는 선거지원은 커녕 김태우 후보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녔다고 당내 관계자가 불평했다. 세 명째 손실. 지역 선거 사령부가 이랬으니 격차를 줄이는 건 애당초 힘들었다.

김기현 원내대표는 현역 의원들을 동별로 배치해 지원하게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시작부터 싸늘했다. 의원들의 말말말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강서에 가면 그냥 민주당 얘기만 하는데 발 디딜 곳이 없다.“ “자기 지역구 의원 이름도 모르는데 다른 지역 의원이 돌아다녀 봐야 먹히질 않는다.” “김태우 후보 지지해 달라고 하면 ‘당에 그렇게 인물이 없어요?’라고 되묻는다.” 의원들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지더라도 바짝 뒤쫓는 선거에서는 이런 자조적인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안철수, 나경원 같은 스타급 인사들도 투입됐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한 의원은 “나경원 전 의원은 열심히 했지만 강서와는 물이 다른 느낌이 너무 나더라”고 평가했다. 안철수 의원은 막판에 불거진 욕설 파문이 거의 유일한 언론 노출이었다. 당내에서는 ‘대통령이 싫어하는 사람들만 지원 유세에 보냈다’는 농담반 진담반도 돌았다. 사실은 아니지만 당이 이번 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한 말로 읽혔다.

이밖에도 김태우 후보의 자질론, 짧은 구청장 재임 기간 당협위원장들과의 이권 갈등 문제 같은 논란들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후보와 지역, 당 내부까지 일사불란한 선거운동은 도대체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됐다. 추격의 고삐를 죄는 대신 브레이크를 거는 모양새였다.

대외악재는 더 치명적이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고, 김행 여가부 장관 후보자는 연일 부실 검증, 황당 발언 논란에 휩싸였다.

정의 대(對) 불의의 선거로 만든 윤 대통령

이런 참패를 다수가 예상했는데도 왜 김태우를 대통령은 초스피드로 특별사면하고 당은 보궐선거에 공천했을까?

일각에서는 선거를 바라보는 윤석열 대통령의 시각을 꼽는다. 선거를 정의와 불의의 대결로 본다는 것이다.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것 자체가 문재인 정부의 불의와 이재명 후보의 불의를 정의가 물리친 것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비리를 폭로한 공익제보자가 실형을 선고 받은 것이 불의였다. 따라서 다른 이가 아닌 김태우가 선거에 다시 나가서 정의의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김태우의 승리가 곧 문재인과 이재명에 대한 윤석열의 승리였다.

하지만 민주주의 선거는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 아니다. 선거는 민심의 이해관계가 서로 겨뤄서 다수의 이해관계가 채택되는 프로세스다. 지극히 타산적이고 현실적인 선택행위가 선거다. 어떤 합법적인 선거에서도 정의나 불의가 승리한 적은 없다. 다수가 만족할 약속을 하는 쪽이 항상 이겼을 뿐이다. 만족감을 주는 방법이 부당한 경우는 많았지만.

강서구 주민들 입장에서는 김태우가 공익제보자이든 정의의 사도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유권자는 일자리와 쾌적한 생활환경을 원하는데 후보가 정의를 부르짖으면 당선은 요원하다. 유권자 다수가 그게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결과는 더 뻔하다. 정부 여당이라도 표 찍을 명분을 줘야 했는데 유권자들이 받은 건 선물 대신 야당 대표 영장 청구와 기각, 그리고 장관 후보자의 부적절성 뿐이었다.

자신들이 정의라고 믿고 선거에 나섰다 참패하면 ‘이게 아닐 수도 있네’라고 반성해야 하는데 용산은 침묵하고, 당은 나몰라라 하는 분위기다. 선거에 지고 나서 김행 후보자가 사퇴한 것이 유일한 변화인데 그건 선거 전에 했어야 할 일이었다. 당내에서는 이제와서 “민주당이 강남구청장 선거에서 지면 당 쇄신해야 하냐”는 발뺌성 발언이 나오고 있다.

선거 패배의 후폭풍이 잔 바람에 그칠 가능성이 높아 가고 있다. 대통령은 계속 스스로 믿는 ‘정의의 길’을 갈 모양새다. 당은 어차피 질 선거였으니 큰 문제 아니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것 같다. 당 대표는 혼자라도 열심히 뛰었고 마땅히 대안도 없으니 그냥 자리를 지키게 될 전망이다. 쇄신이란 단어는 몇번 나왔지만 세력화 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당장 후폭풍이 잔 바람으로 끝난다고 국민의힘이 안심할 일은 물론 아니다. 정치의 속성상 후폭풍은 언젠가는 온다. 대통령 지지율이 자꾸 떨어지면 당내에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분열이 가속화 할 것이다. 총선 전에 사단이 벌어지면 차라리 축복이다. 후폭풍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총선판에 불어닥치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또다시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한 여권은 너무 빠른 레임덕의 수렁에 빠져들 것이다.

여권은 총선을 반 년 앞두고 최대 위기의 시작점에 들어섰다. 서울시 25개 구청 재정자립도 순위 19위 강서구청의 장을 뽑는 선거가 여권의 전체의 위기를 촉발할 것이라고는 불과 두 달 전 대통령 특별 사면이 단행되기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쓴이

박정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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